[무협 연재] 홍매지숙명-북해도의 호랑이(38-2) "시간을 사고싶다고"

이슬비 | 기사입력 2021/01/25 [11:22]

[무협 연재] 홍매지숙명-북해도의 호랑이(38-2) "시간을 사고싶다고"

이슬비 | 입력 : 2021/01/25 [11:22]

 

<지난 글에 이어서>

 

엿새 후서란은 서인에게 예를 올리고 김씨가 저택을 나섰다올 때와는 달리제선성에 있을 효를 제외한 비화와 구향소하자영화요 다섯 사람과 함께 길을 나서는 서란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홀가분하면서 복잡해보였다.

 

이번에는 천천히 갈 건가, 빨리 갈 건가?”

 

비화가 물었다. 서란은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빨리.”

 

…….”

 

빨리 갈 거야.”

 

말을 마치고 서란은 앞장서서 빠르게 말을 달렸다. 카이성에서 제선성까지 주야로 빠르게 말을 달리면 육주야(六晝夜)면 도착할 터였다. 이번에는 빨리 도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하며 서란은 바쁘게 말을 달렸다.

 

육주야가 지나 서란 일행은 신씨가의 영지인 단헌의 수도 제선성에 도착했다. 한 객잔에 짐을 푼 서란은 주인에게 목욕탕의 위치를 물어 목욕을 하고 소하에게 효를 찾아보게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하를 따라 객잔으로 들어선 효가 서신을 백연에게 전했음을 알려주었다. 서란은 흐음, 하고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백연 아카포의 반응은 어땠어?”

 

그냥 그대가 온다니까 좋아하던데. 오랜만에 만날 수 있겠다면서 엄청 좋아하더라. , 여자는 사랑을 하면 더 예뻐지는 법인데 얼마나 예뻐졌을지 궁금하다고도 했고, 그대와 함께 마실 서호용정도 최상급으로 준비해두겠다고 전해달라더라.”

 

그래? 그러면 내일쯤 가면 되겠네.”

 

서란은 제선성의 번화가로 나가 헌옷가게에서 옷을 사고 장신구를 파는 가게에서 비녀와 뒤꽂이를 골랐다. 서인을 만나러 가기 전과 달리 몸치장에 열을 올리는 서란을 보며 화요는 신다희와 미모를 두고 기싸움을 하러 갈 일이라도 있느냐며 타박을 했다. 서란은 그런 화요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야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 여자들은 원래 연인을 만나러 갈 때보다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더 신경을 많이 써. 몰랐어?”

 

그런가. 남자들은 보통 연인을 만나러 갈 때 신경을 많이 쓰니까.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는 아무렇게나 하고 나가지만.”

 

그래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열등하다는 거야. 사랑은 떠나도 친구는 떠나지 않으니까. 그게 우정이고 신의니까.”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서란은 방금 고른 백금 비녀와 뒤꽂이 두 개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한 척이 넘는 길이를 한 비녀의 가운데에는 섬세한 기법으로 투조된 커다란 불새가 장식되어 있었고, 양 옆에는 섬세한 보요 장식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비녀를 돋보이게 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듯한 뒤꽂이들에는 역시 작은 불새가 얹혀 있었고, 한 줄의 보요가 매달려 있었다.

 

이거 잘 간직했다가 혼례복 입을 때 같이 해볼까? 아니다. 그때는 유흔이 더 예쁜 걸 골라주겠지.’

 

그러나 아무리 비녀와 뒤꽂이를 쓰다듬으며 혼례복을 입고 유흔의 곁에 선 자신을 상상해보아도 심란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랑은 떠나도 친구는 떠나지 않는다. 스스로가 내뱉은 말에 이토록 심란해할 거면서 그리 아무 말이나 내뱉을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한동안 그 자리에 마치 못 박인 듯 서 있던 서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심란한 것은 심란한 것이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서란은 선물용 과자를 파는 과자점을 몇 군데 돌아다니다 어느 가게에서 매화와 동백을 닮은 무른 과자를 한 상자 고르고, 서양에서 들어온 신기한 물건들을 파는 거리의 한 상점에서 유리로 된 찻주전자와 찻잔을 골랐다.

 

그래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건가.”

 

비화가 값을 치르는 서란의 곁으로 다가들며 물었다. 서란은 유리로 된 찻주전자와 찻잔이 깨지지 않게 몇 겹의 비단 보자기로 각각 따로 싼 것을 비화에게 들리고 앞장서 걸어갔다. 비화가 하, 하고 웃으며 서란의 손에서 찻주전자와 찻잔을 받아 들고 구향과 소하에게도 나눠 들게 했다. 서란은 앞서서 걷다 말고 잠시 멈춰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란은 다시 터벅터벅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백연을 만나러 가는 일에는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니 아까부터 드는 심란한 마음쯤은 이쯤해서 접어두는 것이 옳았다.

 

부군마님께 전해라. 부군마님의 친구인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 왔다고.”

 

다음날 오후, 서란은 신씨가 저택을 찾아가 백연을 만났다. 서란은 자신의 신분을 물으며 앞을 막아서는 시종들에게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 왔음을 밝혔고, 시종들에게서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 왔다는 말을 들은 백연은 반색하며 달려 나왔다.

 

서란!”

 

아카포!”

 

왜 이제 왔어!”

 

백연이 다짜고짜 끌어안으려 드는 것을 서란은 한 손을 뻗어 저지하고 우선 예를 갖추었다. 백연이 친구 사이에 무슨 예를 올리냐며 손을 내저어 말렸지만 서란은 시종들 앞이니 어쩔 수 없다며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 신씨가의 부군마님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강녕하고말고. 어서 일어나. 너랑 같이 마시려고 서호용정도 잎차로 준비해뒀단 말이야.”

 

서란은 백연의 뒤를 따라 신씨가의 내당으로 들어섰다. 내당에서 가장 큰 전각의 입구에는 글씨에 금박을 입힌 현판이 붙어 있고, 처마의 용마루마다 기린상이 올라가 있었다. 마치 황궁의 한 켠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모습에 서란은 잠시 멍하니 전각의 처마를 올려다보았다.

 

멋있지? 이런 건 아마 황궁에서도 구경하지 못할 거야.”

 

한씨가에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형편이 많이 안 좋았을 텐데도 이 정도를 유지하고 살았다. 역시 북해도의 숨은 용이라 이 말인가.’

 

서란은 현판과 용마루의 기린상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어디 하나 금 가거나 부식된 곳 없이 멀쩡한 상태가 신씨가가 괜히 북해도의 숨은 용이라는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흔히 말하는 속물이 다 됐군.’

 

친구의 집에 놀러왔으면서 눈앞에 보이는 진기한 물건을 보고 순수한 마음으로 신기해하고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문의 재정상황과 그 가문이 가지고 있는 명성을 얻은 이유를 유추하다니. , 어렸을 때 친구를 사귀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자신은 지금 언제 어디에서나 한씨가의 제2후계이며, 광인 유란의 딸이며,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그러나 서란은 그러한 속마음을 숨기고 백연에게 물었다. 한 번도 황궁에 가본 적이 없는 열네 살 아이의 순수한 호기심을 가장하며 서란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카포는 황궁에 가본 적이 있어?”

 

아니. 나도 황궁은 가본 적이 없어. 가주님이야 몇 번 다녀오셨지만 나는 언제나 여기 신씨가 내당에 남아 있었으니까.”

 

으응.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야 가주님이나 가주님을 모시고 다녀온 시위들, 시종들, 시녀들, 노예들이 이야기해줬으니까. 너도 가주가 되면 꼭 황궁에 가봐. 신하 된 도리로 황제폐하께 입조하러 간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 영주들도 모두 그 핑계로 황궁에 가는 거고.”

 

으응.”

 

어서 들어가자. 차나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나 나누게.”

 

백연의 처소로 안내된 서란은 자리에 앉기 전 미리 준비한 선물을 백연에게 건넸다. 무른 과자와 유리로 된 찻주전자와 찻잔을 받은 백연은 뭐 이런 걸 다 가져왔느냐고 기뻐하며 서란이 가져온 찻잔에 차를 우리도록 했다. 어린 차 싹과 여린 찻잎이 하나하나 꽃처럼 피어나는 모습을 감상하며 백연과 이야기를 나누던 서란은 차가 다 우러나고 우러난 찻물을 몇 모금 삼키고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시간을 사고 싶다고. 자신이 가주가 될 시간을 사고 싶다고. 신 세 가문이 연합해 동북지방을 차지하고 영토를 나눠 그곳에서 나오는 이득으로 더 강해졌으면 한다고. 그리하여 강해진 신씨가와 천하의 패권을 두고 겨뤄보고 싶다고. 말을 마치며 서란은 백연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 일은 자신이 혼자 결정할 일이 아니니 일단은 가주님께 알현을 요청해보겠다는 백연의 말에 서란은 고맙다고 말하며 해맑게 웃어보였다. 이 고지식한 남자도 결국은 가문이 얻을 이익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란은 잘 알고 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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