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서란은 한동안 가요의 구절을 들여다보며 오늘 다회의 표제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단순한 환영의 의미나 동맹이 무사히 성사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라면 굳이 이런 구절을 적어두었을까 하는 생각에 서란은 다실에 있는 손님들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다실에 있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젊은 남성들이었다.
“그 노래를 아시오?”
다희가 물었다. 서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희의 앞에 놓인 철화로며 철솥을 바라보았다. 철화로는 무늬도 장식도 없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철솥의 좌우에는 입에 여의주를 문 용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솥 하나가 좌중을 압도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우선은 요리부터 들도록 하시오. 오늘의 다회는 오직 그대를 위한 것. 내 그대를 위해 밤이 새도록 이 다실을 닫지 않을 것이니 천천히 즐기다 가도록 하시오.”
다회는 늦어도 두 시진 정도면 끝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서란 자신을 위해 밤새도록 다회를 끝내지 않겠다니. 이런 호의를 받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서란은 양쪽 무릎을 꿇고 양 손의 검지를 맞대 바닥에 대고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에 세모꼴로 난 공간에 이마를 붙였다.
“하하하. 내 무가의 후계에게 이런 큰 예를 받을 줄은 몰랐소. 고맙소, 서란. 어서 일어나시오.”
농경민족인 삼백족과 달리 수렵민족인 제화족은 종족 전체가 전사였다. 따라서 눈앞에 있는 상대가 언제 자신을 향해 칼을 빼들지 알 수 없었고, 자신 또한 언제 눈앞에 있는 상대를 향해 칼을 빼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제화족에게 있어 이마를 바닥에 댄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길이나 다름없었고, 목협막부가 힘을 잃어감에 따라 오랫동안 중앙 권력에서 소외되어 온 제화족 무가가 득세함에 따라 무가의 대부분은 제화족의 예법을 본 따 각 가문의 예법을 제정하였기에 무가의 경우, 삼백족이라 하여도 이마를 땅에 대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무가의 구성원들에게 있어 이마를 바닥에 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목숨을 맡겨도 좋은 사람에게 자신의 목숨을 부탁한다는 의미로 하는 가장 큰 예법이었고, 그에는 ‘나는 당신을 그만큼 믿으니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누군가가 나를 죽일 것이라면 그것이 당신이었으면 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작 차 한 잔에 그대의 목숨을 받을 줄이야. 이것 차 한 잔의 값 치고는 너무 무겁지 않소?”
“고작 차 한 잔이 아니지 않습니까. 보통은 두 시진이면 끝나는 다회를 저 한 사람을 위해 밤새 열어주신다니 차를 즐기는 이로서 이보다 더한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실에서 차를 마시며 세상사를 잊는 동안에도 언제 어디서 칼이 날아들지, 또 언제 어디서 칼을 뽑아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 무가에서 태어난 이들의 숙명. 그러니 저는 저를 위해 밤새 다실을 열어주시는 가주님께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 저의 목숨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하하!”
서란은 짚자리로 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쌌다. 짚자리로 된 바닥에서는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는 것이 모든 예법의 기본이었다.
“우선은 요리부터 들도록 합시다. 생선회보다는 채소절임이 상큼하고 가벼울 것 같아 그리 준비했소.”
다희가 서란의 앞으로 다가와 밥과 된장국, 그리고 채소절임이 담긴 소반을 내려놓았다. 서란은 채소절임을 곁들여 가며 밥을 다 먹고 된장국의 건더기를 건져먹었다. 된장국에는 두부와 파, 그리고 새우튀김이 들어 있었다. 건더기를 젓가락으로 건져가며 먹은 서란은 젓가락으로 국물을 저어 그릇을 들고 마셨다. 곧 다희가 국그릇과 채소절임 접시를 내가고 밥통을 가져와 밥그릇에 밥을 새로 퍼 담았다.
“안주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소.”
서란은 다희가 내온 쟁반을 내려다보았다. 쟁반에는 술과 치테킨이 담겨 있었다. 다희가 술과 치테킨 접시를 소반 위에 내려놓았다. 서란은 고기를 다져 납작하게 구워 만든 치테킨을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어떻소?”
“꽤 맛있습니다.”
서란은 술을 한 잔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벚꽃으로 만든 술인지 술에서 벚꽃향기가 그윽하게 올라왔다.
“혹시 미동(美童) 좋아하시오?”
술잔을 기울이는 서란을 바라보던 다희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서란은 술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다실에 모인 손님들은 모두 젊고 잘생긴 남성들이었다.
“내 그대의 취향을 몰라 그저 젊고 잘생긴 남성들로 몇 준비하였소. 이래봬도 이름난 기방의 예기들이나 고급 유곽의 최고위급 창기들이라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오.”
마치 자신의 선물이 상대의 마음에 들기를 바라며 선물을 고른 자신의 안목을 뿌듯해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쉬며 다희와 남성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저 남성들을 물린다면 다희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될 것이었고, 그렇다고 저 남성들 중 한 명을 지목한다면 유흔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이 될 것이었다.
“어찌 그러시오? 혹시 내가 준비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오?”
남성들 중 한 사람을 지목하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서란의 머리 위로 다희의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서란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남성들을 하나하나 내려다보았다. 서란의 눈길을 받은 남성들이 일제히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올렸다. 서란은 문득, 장식 단에 걸린 족자에 적힌 시구를 바라보았다.
팔월 보름은 아! 한가윗날이건만은 님을 모시고 지내야만 오늘이 한가위일 것입니다. 아으 동동다리
서란은 족자에 적힌 구절의 한참 뒤에 등장하는 아홉 번째 구절을 읊었다. 어찌하여 다회의 표제가 되는 시가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가요인가 싶었더니 이런 의미였던가. 서란은 한숨을 쉬며 남성들에게 얼굴을 들라 명령했다.
“너 이름이 뭐지?”
서란은 남성들 중 가장 잘생긴 남성을 골라 이름을 물었다. 남성이 눈을 내리깔며 자신은 백화원의 예기 적연이라고 말했다.
“하하하. 이름을 묻는 것을 보니 그를 지명한 모양이오. 좋소. 나머지는 물러가고 적연 너는 서란 아가씨께 한 잔 올리거라.”
남성들이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적연이 서란의 옆으로 다가와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서란은 적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크고 가느다란 눈과 맑은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유흔을 닮아 있었다.
“눈이 참 예쁘구나.”
서란의 말에 적연이 고개를 숙였다. 곧 연어구이와 대구조림이 나오고, 연하게 우린 말차가 나왔다. 서란은 연어구이와 대구조림을 곁들여 술을 마시고 차를 마셨다. 뒤이어 물이 나오고 과자가 나오고 진하게 우린 말차가 나왔지만 서란은 그것들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기에 여념이 없었다.
차를 마실 때 술을 섞어 마시는 것은 예의에 약간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상대에게 사내를 선물하며 함께 밤을 즐기도록 종용하는 이 상황에서는 예의에 약간 어긋나는 행동을 해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더구나…
‘나 아직 유흔과도 못 해봤다고.’
술김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문득 우습기도 했지만 서란은 곧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은 어찌 되었건 이 적연이라는 사내와 함께 밤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서란은 술을 거듭 마시며 할 수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한동안 술을 마시던 서란은 이제 취기가 꽤 올랐음을 알고 술을 들이키던 손을 멈췄다. 서란이 술에 꽤 취했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인지 다희가 다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다시 돌아와 이부자리를 건네주었다.
“그러면 좋은 밤 보내시오.”
다희가 완전히 사라지고 서란은 적연의 뺨에 손을 올리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적연이 능숙하게 서란의 뒷목과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서란을 이불 위로 눕혔다. 서란은 자신의 옷이 사락사락 소리를 내며 벗겨지는 것을 느끼며 적연을 끌어안았다. 적연이 긴장할 것 없다는 듯이 웃으며 서란의 목덜미며 가슴팍에 입을 맞췄다.
“유흔.”
서란은 문득 유흔의 이름을 부르며 적연의 품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옷을 벗은 적연이 서란의 몸 위로 몸을 겹쳤다. 처음으로 다른 누군가의 몸이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아픔과 쾌감을 느끼며 눈을 감는 자신의 눈가로 아픔인지 쾌감인지 모를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서란은 계속 유흔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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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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