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연재] 홍매지숙명-하망연(何茫然)(41-2) "火印 뭐 큰 일이라고"

이슬비 | 기사입력 2022/02/21 [11:13]

[무협연재] 홍매지숙명-하망연(何茫然)(41-2) "火印 뭐 큰 일이라고"

이슬비 | 입력 : 2022/02/21 [11:13]

 <지난 글에 이어서>

신씨가는 굉장한 부자인가 보구나. 우리 한씨가에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물어주고도 이 정도의 정원을 유지할 수 있다니.”

 

사람의 품격을 알려면 그 사람이 머무는 곳을 보면 된다. 그것이 신씨가 가주님의 지론이라서요.”

 

별관의 내정원도 외정원 못지않게 화려했다. 별관의 거대한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들과, 온갖 기화요초들로 장식된 거대한 신상들이었다.

 

대체 이 양식은 뭐지? 밖은 해이안교 시대의 양식. 안은 대체 어디 양식이야.’

 

서란은 그 중 한 신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검붉은 옷을 입고 한쪽 발로 눈표범을 밟고 있는 여신은 크고 강렬한 눈동자로 인해 전체적인 모습보다 눈만 도드라져 보이고 있었다.

 

누구지?”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적연에게 물었다. 적연이 여신의 옷자락을 양산 끝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구일 것 같습니까?”

 

글쎄. 모르니까 너에게 묻는 거잖아.”

 

훌란 한정.”

 

?”

 

훌란 한정. 무녀 훌란. 한씨가의 시조이신 그분입니다.”

 

서란은 어안이 벙벙해져 그저 멍하니 적연의 입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씨가의 시조신인 훌란의 상이 왜 신씨가 저택의 별관에 있단 말인가. 서란은 이건 뭐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적연의 얼굴에서 신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신씨가의 가주님께서 그분을 좋아하셔서요.”

 

신씨가의 가주님께서?”

 

. 아무도 이길 수 있다 생각하지 않은 전쟁을 7년이나 지속한 끝에 자치권을 얻어낸 신적인 능력을 높이 평가하시는 것이지요.”

 

서란은 신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딘지 신상의 눈이 자신을 똑바로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아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적연을 잡아끌었다.

 

그래서 내가 머물 방은 어디지?”

 

왜 이리 조급해하십니까. 이런 색다른 풍경들도 보면서 천천히 가시지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서란의 변화를 눈치 챈 것인지 적연이 걸음을 빨리 했다. 적연의 뒤를 따라가며 서란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훌란의 눈동자가 자꾸만 자신을 뒤쫓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적연의 뒤를 따라 자신이 머물 방으로 들어온 서란은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어제 그렇게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격렬했던 정사 때문인지 침상 위에 눕자마자 나른하게 눈이 감기고 있었다. 서란은 적연에게 객잔으로 가서 비화와 구향, 소하, 자영, 화요를 데려오라 명령하고 눈을 감았다. 우선은 몸이 나른해서 조금 자야 할 것 같았다.

 

곤하게도 자더군.”

 

서란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서란은 방 안에 함께 앉아 있는 비화와 적연을 바라보았다. 적연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비화는 서란의 모습을 보고도 별 말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다회에 간 자신이 날이 밝고도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서란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 자에게 들었어. 그대와 하룻밤 인연을 맺었다고 하더군.”

 

으응.”

 

부끄러워 하기는. 그게 무어 그리 큰일이라고. ? 그대의 첫 경험을 정인이 아닌 다른 사내와 함께 한 것이 못내 아쉬워서 그러는 건가?”

 

비화!”

 

서란이 큰소리로 비화의 이름을 불렀다. 비화가 풉, 하고 웃으며 서란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목에 그 흔적이나 어찌 하지 그래. 누가 보아도 어젯밤에 무척 격렬한 사랑을 나눴겠구나 생각이 들 텐데.”

 

비화의 말에 적연이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서란은 구리로 만든 거울로 자신의 목덜미를 비춰보았다. 목덜미에는 마치 꽃잎 같은 붉은 흔적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이걸로 가리시지요.”

 

적연이 고운 비단으로 된 천을 서란의 목에 둘러주었다. 서란은 하, 하고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 정말 미치겠네.”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서란은 침상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나는 인간이 되기에는 글러먹은 모양이야.’

 

서란은 비화에게 이런 꼴이나 보이다니 가지가지 한다고 스스로를 책망하며 베개에 더욱더 깊이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서란 자신은 정말 인간이 되기에는 애초에 글러먹은 존재가 맞는 것 같았다.

 

별 일 아니라니까 그러네. 정인이 아닌 다른 사내와 첫 경험을 함께 하고 그 흔적으로 화인(火印)까지 새긴 것이 무어 그리 큰일이라고.”

 

제발 좀!”

 

서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비화에게 베개를 집어던졌다. 서란이 던진 베개를 여유롭게 두 손으로 받아내는 비화의 표정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아무튼 출발은 언제 할 거야?”

 

서란은 비화를 한 대 때리려 했던 손을 멈추고 침상에 앉아 숨을 골랐다. 적연이 얼른 찬 물 한 잔을 떠와 서란의 입가에 잔을 대주었다.

 

고맙다.”

 

찬 물을 마시고 정신이 조금 돌아온 서란은 잠시 고민했다. 유흔이 유구에서 출발해 가라고루성으로 가는 데에는 적어도 열이틀이 걸릴 터였다. 그리고 이곳 제선성에서 가라고루성으로 가는 데에는

 

엿새 후에 출발할 거야.”

 

엿새?”

 

. 이곳 제선성에서 가라고루성으로 가는 데에는 엿새 정도 걸릴 테니까. 그리고 유흔이 유구에서 가라고루성으로 가는 데에는 적어도 열이틀이 걸리겠지. 우리는 그 엿새 동안 이곳에서 좀 쉬자.”

 

말을 마치며 서란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 열이틀 후면 가라고루성에 도착해 정옥을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이 불현듯 무겁게 다가온 까닭이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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