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엿새가 지나 서란은 적연을 이별하고 제선성을 출발했다. 제선성을 출발하기 전 날, 적연은 마지막이라며 서란의 침상을 파고들었고 서란은 그런 적연의 몸을 두 팔로, 온몸으로 받아 안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편지에 써서 말하라.”
적연이 화가의 운을 띄우며 서란의 벗은 몸을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훑었다.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멍울진 가슴에 와 닿는 적연의 입술에 몸을 떨며 서란은 그 다음 구절을 읊었다.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한동안 서란의 가슴팍에 와 닿던 적연의 입술이 붉은 유두를 머금었다. 서란은 아, 하고 탄성을 지르며 적연의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적연이 혀를 내밀어 서란의 유두를 핥고 다시 입술을 내려 배며 옆구리를 핥았다. 서란은 탄성을 내지르며 적연의 머리를 애써 밀어냈다.
“아가씨.”
적연이 서란의 몸에서 입술을 떼고 입을 열었다. 조용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서란은 자신의 눈 앞을 가득 채우는 적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적연의 눈은 온통 눈물로 젖어 촉촉해져 있었다.
“창기와 기생의 눈물은 거짓일 때만 의미가 있는 법이지요.”
“…….”
“그러나 오늘 제가 흘리는 이 눈물은 거짓이 아닌 진심입니다. 그러니 기생 적연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적연에게는 무엇보다 큰 의미가 있는 눈물일 수밖에요.”
적연의 눈물이 서란의 얼굴이며 가슴에 얼룩졌다. 서란은 자신의 몸을 파고드는 적연의 몸을 더욱 더 꼭 끌어안았다. 다리 사이에서 얼얼한 통증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쾌감이 느껴지는 가운데 적연의 눈물이 한없이 따뜻하게 느껴져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적연의 눈가로 가져갔다.
“왜 이렇게 울어, 적연.”
“…….”
“내일 헤어지면 우리의 인연은 당연히 마지막을 고하겠지. 하지만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한 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잖아. 그러니까 그만 울어. 응?”
서란의 말에 적연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서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적연의 눈물이 흔들리는 서란의 가슴에서 흘러내려 침상의 보료 위에 깔린 이불을 적셨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다.
징이여 돌이여 지금에 계시옵니다 징이여 돌이여 지금에 계시옵니다 이 좋은 성대에 놀고 싶사옵니다 사각사각 가는 모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으오이다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그 밤이 움이 돋아 싹이 나야만 유덕하신 임을 여의고 싶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기옵니다 옥으로 연꽃을 새기옵니다 바위 위에 접을 붙이옵니다 그 꽃이 세 묶음 피어야만 그 꽃이 세 묶음 피어야만 유덕하신 임을 여의고 싶습니다 무쇠로 철릭을 마름질해 무쇠로 철릭을 마름질해 철사로 주름을 박습니다 그 옷이 다 헐어야만 그 옷이 다 헐어야만 유덕하신 임을 여의고 싶습니다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 무쇠로 황소를 만들어다 쇠나무산에 놓습니다 그 소가 쇠풀을 먹어야 그 소가 쇠풀을 먹어야 유덕하신 임을 여의고 싶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 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천 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사비국이 들어서기 이전에 존재했던 고려라는 나라의 가요를 부르며 서란은 적연의 머리를 꼭 감싸 안았다. 사랑하는 임과 이별하고 싶어 하지 않는 여인의 마음을 노래한 이 가요는 지금의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다. 어쨌거나 서란 자신은 내일이면 제선성을 떠나 유흔을 만나러 가라고루성에 가야 했다.
‘다만, 적연 너에게는 어울리겠지.’
서란은 적연의 머리를 꼭 감싸 안으며 말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빈말에 다름없었지만 이러한 따뜻한 말 한 마디조차 해주지 않고 헤어지기에는 적연의 말처럼 하룻밤 인연도 인연이 아니던가. 서란은 말을 하는 내내 적연의 등을 내려다보지 않고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기와 기생에게 있어 하룻밤 인연은 아무것도 아니라지.”
“…….”
“하지만 한 인간에게 있어 하룻밤 인연은 세상 그 무엇보다 큰 의미로 다가올 수도 있겠지.”
“…….”
“기억해둬.”
“…….”
“내 이름은 한서란. 새벽의 광명,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야.”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그래. 그게 내 제화족 이름이야.”
“…….”
“반드시 내 이름을 기억해둬. 내가 너를 만나러 다시 제선성으로 돌아올게.”
서란과 적연은 오랫동안 서로의 몸을 거칠게 파고들었다. 마치 서로의 영혼의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모두 드러내듯 서로의 아래를 거칠게 삼키는 행위는 흡사 며칠 굶은 사람이 음식 앞에서 체면도 위신도 모두 잊은 것처럼 게걸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아. 하아.”
“아가씨.”
서란의 몸 안에 적연의 흔적이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로도 만족하지 못한 것일까. 적연은 서란을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았고,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자신의 흔적을 뿌렸다. 서란은 적연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을 거듭 느끼며 몸을 떨었다. 마지막으로 적연이 서란의 몸 안에 질펀하게 씨앗을 뿌리고 빠져나가고 서란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아마 자신은 돌아가면 적연과의 인연을 잊으리라 생각하며 서란은 적연에게서 등을 돌린 채 잠이 들었고 적연은 그런 서란을 바라보다 씁쓸한 미소와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나 주는 거야?”
다음날 아침, 적연은 떠날 준비를 하는 서란의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아주었다. 길이가 두 뼘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금비녀의 양끝에는 붉은 석류석으로 된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자리 잡고 있었고, 용의 발밑에는 금으로 만든 얇은 판들이 매달려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예, 아가씨.”
“예쁘다.”
“제 마음의 선물이에요, 아가씨.”
서란은 비녀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재력과 지위, 권력, 사회적 명성을 과시하기 위해 기방에 가 동기(童妓)들을 간택하듯 골라 처음을 사 머리를 올려주고 일평생 동안 전두(纏頭)를 주며 자신의 전리품인 양 끼고 다니는 인사들을 서란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기생에게 비녀를 받고 보니 자신이 그런 사람들보다 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해지는 것을 서란은 어찌 할 수 없었다.
“언짢으시다면 제가 드리는 전두라고 생각해주시겠어요?”
기생이 무가의 후계에게 전두를 준다고? 서란은 자세를 바로 하고 적연을 바라보았다. 적연이 서란의 머리에 꽂힌 비녀를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머리를 올렸답니다. 어느 부유한 상인이 첫 전두로 큰 집 세 채를 주었지요.”
“…….”
“그러니 더는 머리를 올릴 필요도, 아가씨처럼 저의 좋은 친구가 된 분께 전두를 받을 이유도 없지요.”
“…….”
“그래서 마음의 선물이라 한 것인데 아가씨께서는 제게 ‘그리움’이라는 전두를 주셨다 여기시는 것 같아서요. 그러니 이 비녀는 제가 아가씨께 드리는 전두로 하려 합니다.”
적연의 말에 서란은 가만히 적연을 끌어안았다. 적연을 끌어안은 서란은 가만가만 그의 등을 쓸며 한시를 읊어주었다.
비 개인 긴 언덕에 풀빛이 푸른데 임 보내는 남포나루에 슬픈 노래 흐르네 대동강 물은 그 언제나 마르려나 해마다 푸른 물에 이별의 눈물 더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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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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