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연재] 홍매지숙명-여명의 눈동자 43-1 "쾌락 알고 받아들일 필요"

제43장 여명의 눈동자(1)-1

이슬비 | 기사입력 2022/08/16 [09:32]

[무협연재] 홍매지숙명-여명의 눈동자 43-1 "쾌락 알고 받아들일 필요"

제43장 여명의 눈동자(1)-1

이슬비 | 입력 : 2022/08/16 [09:32]

다음날 아침, 서란은 서양인거주구역으로 데 바옌 부인을 찾아갔다. 때마침 욕조에 누워 느긋하게 하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던 데 바옌 부인은 서란의 방문을 알리는 하녀의 말에 서둘러 옷을 걸치고 나왔다. 응접실에 앉아 있는 서란에게 다가와 안부를 묻는 데 바옌 부인의 긴 머리카락에서는 미처 닦아내지 못한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어머. 제가 칠칠치 못하게 미처 물기를 다 닦아내지 못했습니다. 여행은 즐거우셨는지요, 레이디 서란?”

 

부인의 염려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도 만났고요.”

 

이제는 저에게도 입에 발린 말을 다 하시는군요. 저에게까지 그럴 필요는 없으실 텐데 이거 정말 섭섭합니다.”

 

서란은 데 바옌 부인에게 김씨가와 신씨가의 사절로 임명받은 일과 김씨가에서 만난 남자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참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놈이었다며 한바탕 불평을 늘어놓은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적연의 이야기를 꺼낼 뻔한 것을 알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서란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셨습니다.”

 

그렇습니까?”

 

. 뭐랄까……, 전보다 분위기가 많이 성숙해지셨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훨씬 더 차분해지셨다고 해야 할까요.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서란은 입에 머금은 금황색 차를 목으로 넘겼다. 과일향과 함께 목을 적시고 넘어가는 찻물의 부드럽고 은은한 맛이 입 안에 오래 남았다.

 

이것은 철관음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안계철관음입니다. 복건성에서 생산되는 철관음 중에서도 안계의 것을 으뜸으로 친다기에 준비했습니다.”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찻잎의 모양이 관세음보살과 같고, 그 색이 철 같다 하여 철관음이라 불리는 이 차를 굳이 자신의 앞에 내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서란은 찻주전자를 기울여 차를 한 잔 더 따랐다. 금황색 차가 쪼르륵, 소리를 내며 잔으로 떨어졌다.

 

보살이란 지혜를 가지고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는 길로 나아가는 이를 뜻한다지요.”

 

데 바옌 부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서란은 깜짝 놀라 차를 쏟고 말았다. 아무리 동양에 살고 있다지만 서양인이 어떻게 불교에 대해서까지 이해하고 있단 말인가. 서란은 데 바옌 부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사람들은 말하지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고통이 필수라고요.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요.”

 

…….”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고통만 알고 쾌락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절반밖에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통과 쾌락이 함께 공존하는 법이니까요.”

 

…….”

 

그러니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쾌락을 알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서란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이 여인은 자신이 이번 여행에서 유흔이 아닌 다른 사내를 만났음을, 그 사내에게서 처음 쾌락을 찾았음을 알고 있었다. 서란은 말했다.

 

부인께서야말로 쾌락에 대해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돈을 벌어 무엇에 쓰겠습니까. 재산을 불려 무엇에 쓰겠습니까. 나중을 대비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이유이고, 가장 큰 것은 역시 먹고 입고 쓰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렇다면 레이디 서란, 먹고 입고 남는 돈은 당연히 어디에 쓰겠습니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이지요?”

 

서란은 탁자 위에 쏟아진 찻물을 바라보았다. 탁자 위를 덮은 고급스러운 흰색 모슬린천 위로 금황색 찻물이 서서히 번져가는 것이 보였다. 하얀 천을 금황색으로 물들이는 찻물을 바라보다 말고 서란은 데 바옌 부인에게 물었다.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무엇 때문일까요?”

 

데 바옌 부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그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바라보며 서란은 자신 또한 마주 미소를 지어보였다.

 

차갑고 푸른 하늘에 기러기 소리 들리누나

창을 열고 내다보니 눈과 달이 뜰 안에 가득하다

마음과 눈앞의 근심은 나에게만 있을 뿐인데,

저 빛도 임 계신 곳을 환히 비춰줄 것이 아닌가

 

참으로 솔직한 여인이었다. 남녀 간의 잠자리와 애욕(愛慾)의 정을 비롯한 성에 대한 이야기는 쉬이 다른 사람 앞에서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물론, 호색(好色)을 자랑으로 여기는 삼백족 사회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들끼리도 성에 대한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주고받았지만 성매매를 금지할 정도로 폐쇄적인 제화족 사회에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성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제화족의 문화를 잘 아는 이가 이렇게 대놓고 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니.

 

저 멀리 사비국의 기녀들이 지은 시조를 읊은 서란은 찻잔에 남은 차를 입술로 가져갔다. 아마 이 여인은 상대가 자신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을 내보이게 함으로써 그를 시험해보는 것일 터였고, 그것이 상대에 대한 그녀 나름의 마지막 시험일 터였다.

 

기녀시조로군요. 사비국의 기녀들이 하룻밤 사랑을 나눈 사내가 그리워 읊는 시조라 하지요. 이번에 만난 사내가 기생이었나 봅니다.”

 

저를 시험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란은 적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 자신을 시험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데 바옌 부인이 예의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머금고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제가 레이디 서란을 시험하고 있다 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야 마담 같은 분이 제화족의 문화를, 더구나 여성우월주의적인 북방의 문화를 모르실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저 스스로 저의 밑바닥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제가 어떤 사람인지 시험해보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 그러니 이제 말씀해주시지요. 저를 시험하려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데 바옌 부인은 서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하녀를 불러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치우고 새로운 차를 내오게 할 뿐. 서란은 데 바옌 부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 그녀의 눈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한동안 촉촉이 젖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레이디 서란께서도 아시다시피 어느 나라이든 연회석에서 흥을 돋우고, 손님에게 몸을 파는 이들이 존재하지요. 그것이 기생이든 창기이든 말입니다.”

 

……?”

 

그리고 제 고향에도 그러한 창기들이 있습니다. 그녀들 중 가장 최고급 창기에 해당하는 이들을 코르티자나라고 부르지요.”

 

코르티자나…….”

 

. 모든 고급 창기가 그러하듯이 코르티자나 또한 단순히 용모가 아름답고 잠자리기술만 좋아서는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습니다. 기예에도 뛰어나고 여러 학자들과 동등하게 토론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지적 수준도 갖춰야 하지요. 그렇다보니 여인에 대한 교육이 제한되어 있는 저의 고향에서 창기들은 가장 교육 수준이 높은 여인들이기도 하답니다.”

 

……?”

 

그러고 보니 레이디 서란께서는 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셨지요? 그럴 수밖에요. 저의 남편은 사실, 진즉에 죽었으니까요. 그는 저보다 30살이나 많았고, 저는 그때 고작 열여덟이었으니까요.”

 

서란은 설마,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움켜쥐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코르티자나였단 말인가? 코르티자나의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 많은 늙은이에게 팔려가듯이 혼인을 했단 말인가?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코르티자나였습니다. 최신유행의 옷을 입고 하녀를 대동하고 거리를 거닐면 수십 명의 남자들이 꽃을 들고 뒤를 따랐지요.”

 

…….”

 

하지만 몸을 파는 이들의 좋은 세월은 얼굴의 아름다움이 다하면 끝나는 법. 저는 그것이 싫었습니다. 저의 아름다움이 끝나면 저는 뒷골목의 사창가로 기어들어가 퇴물취급을 받으며 헐값에 몸을 팔아야 할 테니까요. 그렇게 포주가 데려온 손님을 하루에도 몇 명이고 쉴 새 없이 받고, 그러다 손님에게 퇴짜라도 맞는 날이면 사정없이 매질을 당하는 그런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지더군요.”

 

서란은 하녀가 새로 내온 차를 잔에 따랐다. 노란빛을 띤 연두색 찻물이 잔에 채워지자 서란은 찻잔을 가져와 향을 들이마셨다. 농한 향을 맡은 서란은 차를 조금씩 입으로 넘겨보았다. 달디 단 첫맛과 함께 쓰고 떫은 두 번째 맛이 찾아왔다. 어느덧 입 안에는 상큼한 맛이 가득 남아 있었다.

 

육안과편이군요.”

 

서란은 차의 이름을 말하며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안후이성 육안 일대에서 생산되는 육안과편은 차를 가공하는 방법이 까다로워 서호용정과 동정벽라춘과 마찬가지로 부르는 것이 값인 명차 중의 명차였다.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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