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안보고 틀 깨는 예술 깨우친 30년, 궁극의 자유 찾는 구도의 길”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9) 김근중 화가

인터넷저널 | 기사입력 2023/01/19 [01:19]

“눈치 안보고 틀 깨는 예술 깨우친 30년, 궁극의 자유 찾는 구도의 길”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9) 김근중 화가

인터넷저널 | 입력 : 2023/01/19 [01:19]

“제 예술을 돌아보니 사실화, 추상화, 단색화 흐름을 보입니다. 자유를 향한 갈구랄까요. 관객의 눈치, 화단의 고착화한 틀을 깨고 싶었죠. 고통스럽지만 30년 공을 들인 거죠. 죄성 또는 카르마를 드러내야죠. 억눌린 감정과 욕망을, 분열돼 숨은 반쪽의 주체를 인정하고 표현할 때 예술이 궁극의 자유를 찾을 수 있다고 봐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아홉 번째 주인공 김근중 화가(68·남)의 말이다. 18일 오후 양서면 청계리 화실에서 만난 김 작가는 자신의 예술세계와 작가정신을 이렇게 요약했다. 기교가 아닌 태도를 갖기까지 30년이 걸렸다고 했다.

 

그는 예술의 시작을 필묵사상에서 찾았다. 거침없는 선 그 속에 담긴 철학을 배우려고 대만으로 떠난 게 계기였다. 미대를 졸업했지만 어떤 예술을 해야 할 지 막막하던 때다. 모사뿐 아류에 불과한 시절, ‘길’을 찾아 대만문화대(예술연구소) 유학(석사과정)을 떠난 것이다.

 

석도 ‘일획론’ 꽂혀, 대만유학 ‘길찾기’

 

청나라 산수화 대가 팔대산인(八大山人, 스님)을 공부했다. 동양화에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의 작가다. 석사 논문도 ‘팔대산인 회화상 필묵과 구도 연구’였다. 또 동시대 작가 석도(石濤, 스님) 그림에도 빠졌다. 필묵의 첫 획이 모든 것의 시작으로 도를 구현하는 길이라는 일획론(화어록(畫語錄)에서 언급)에 빠졌다.

 

▲ 김근중 화백.  © 최방식


“깨달음이 깊은 사람에겐 법이 필요 없는데, 그렇다고 법이 없는 게 아니라는 석도(石濤)의 말에 꽂혔죠. 근본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림의 가치를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구현하는 데 있다는 걸 가르치죠. 막막하던 미술학도에게 ‘길’을 보여준 것이었어요.”

 

손기술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그림이 가치가 크다는 걸 터득한 것. 학교의 미술교육이 되레 창작예술을 옥죈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다. 석도의 ‘지인무법’(至人無法)은 화풍이나 화단 틀에 얽매이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던 것.

 

장자는 소요유(逍遙遊)편에서 지인(至人, 도를 깨달은 이)은 자기가 없다고 했다. ‘잔잔한 물(또는 거울)’과 비교했다. 물이 잔잔하고 맑음을 유지하려면 더러운 게 섞이지 않아야 하고 막히지도 않아야 하듯이. 거울에선 잘나고 못난 거 따질리 없고 사물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니 상할 일이 없다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그는 대만유학을 마치고 산수화를 그려 대학시절 인연이 있는 교수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호통뿐. ‘이놈, 중국 가서 공부한 게 중국 냄새뿐이냐.’ 깨달음을 그림에 담지 못했다는 지적에 화들짝 놀란 것이다. 30대를 앞둔 때다.

 

고심 끝에 벽화를 선택했다. 금호미술관과 수묵화 개인전을 약속했는데 생각을 바꿔 벽화로 나갔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제갤러리와 일본 켄지다키갤러리(도쿄) 전속작가를 꿰찰 수 있었다. ‘2000년대 새 작가’ 기대주 1위(신동아, 평론가와 기자 상대 설문, 1990년대 중반)로 뽑히기도 했다.

 

“고구려나 둔황(중국) 벽화와 같은 재료를 사용했죠. 내용은 벽화형식을 차용한 추상화였고요. 포스트모던 작품이랄까. 국내에서는 생소해 관심을 가졌을 거예요. 그 덕에 10여년 잘나갔죠. 하지만 형상을 계속 만들어내는 게 어려웠어요. 한계에 봉착한 거죠.”

 

실화->추상화->단색화, 구도의 길

 

10년만에 그림을 바꿨다. 처음엔 ‘단색조 벽화’였는데, ‘이게 무슨 그림이냐’(형상이 없다보니)는 혹평과 그에 따른 경제난 우려로 그만뒀다. 그 뒤 전통민화를 현대적 재해석(말풍선 애드벌룬 등을 가미한)한 꽃그림을 선택했고, 그걸로 10여년을 버텼다.

 

▲ 김근중 화백의 양평 청계리 작업실.  © 최방식


“제가 좀 저돌적인가 봐요. 마음 가는 데로 그림도 바꾸고요. 이번에는 꽃그림을 해체하고 싶은 거예요. 추상화로요. 꽃의 시원이나 근본을 찾아서. 저는 ‘꽃이전’(before flowers)이라 불렀어요. 수묵벽화와 모란꽃을 소재로 사실화에서 추상화를 거쳐 단색추상화 흐름을 반복한 거죠. 그 때 내 그림이 ‘궁극의 자유’를 찾아가는 회화란 걸 알았죠. 밥만 먹고 행복할 수 없듯이, 정주에서 유목으로 음에서 양으로 가듯이요.”

 

그는 자신만의 작가정신을 찾았다고 했다. 남은 과제는 거침없이 표현하는 것이란다. 억눌린 감정과 욕망을 두려움 없이 그려 보려는 것이다. 왜곡된 반쪽만의 회화에 그간 숨겨온 분열된 주체를 더해서 말이다.

 

“30년을 해보니 예술이 종교와 다르지 않음을 알겠더라고요. 그간 마음 고통이 커 다스리려고 별걸 다 해봤습니다. 화두 선(禪)도 그 중 하나죠. 죄성과 카르마를 드러내야 영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죠. 반쪽 예술이 비로소 균형과 조화를 이뤄가는 과정이죠. 선악이 하나고, 유무와 음양이 둘이 아니었던 것이죠.”

 

김 작가의 이야기는 170여 년 전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쉰 살 남짓 살다 간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떠올리게 한다. 죽기 3년 전 작곡한 ‘대지의 노래’는 이승과 저승을 잇는 음악. 고대 중국의 시를 읽고 교향곡(9번)으로 만든 것이었다. 백미는 6악장 ‘고별’. 왕유와 맹호연 시를 재해석한 작품. 이렇게 노래한다. “봄이 오면 사랑하는 대지는 꽃이 피고 초록이 되리라. 푸른 지평선은 눈부시도록 영원히 빛나리라. 영원히. 영원히.”

 

김 작가는 그림을 어떻게 시작했을까? 정치(충남예산 무소속 국회의원 출마 실패) 하다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 따라 어려서 서울로 이주했다. 손재주 좋은 아버지, 그림 잘 그리는 형을 보며 자신도 만화를 곧잘 그렸다. 어쩌다 한양공고 공예과로 진학한 게 미술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고2 때 동양화를 전공한 교사가 미대 진학을 권했어요. 학원에 다닐 수 없어(가정형편) 명동 헌책방을 뒤져 일본 소묘책을 구해 혼자 석고소묘 공부를 했죠. 시험을 앞두고는 유명 미술학원에 반달(한달치 돈 없어)만 등록해 수강했어요. 홍익대 미대 동양화과에 입학했죠.”

 

감춰둔 죄성 드러내 반쪽뿐인 예술 완성

 

대학 4년은 학비를 버느라 알바에 매달렸다. 우연히 이종상 교수(서울대, 5만원권 신사임당 영정 그림) 회화이론 강의(사설)를 듣고 이후 문인화를 2달간 배웠다. 제대 뒤 막막해 이 교수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홍익대 학생이 서울대 교수에게 배우는 게 말썽이 됐다. 그렇게 유학길에 오른 것이다.

 

▲ 한 때 화단의 관심을 끌어던 김 화백의 포스트모던 벽화.  © 최방식

 

그가 양평에 터를 잡은 건 대학 선배인 화가 류민자(하인두 화가가 남편)씨 때문. 예술마을을 조성하려고 땅을 사둔 게 있다며 1호로 권한 것이었다. 돈이 없어 거절했지만 1년 뒤 다시 권해 ‘외상’(2년 뒤 지불)으로 1994년 땅을 구했다. 자신과 동네 청년 한명 그리고 용접(고용)전문가가 3달간 작업해 작업실을 완성했다.

 

한동안 가천대 전임교수 일도 했다. 양평에서 출퇴근 했고 서울 도봉동에 있는 본가에는 일주일에 한번 다녔다. 이젠 본가를 하남으로 옮겼고, 주말에 한번 다녀오고 대부분의 시간은 양평 작업실에서 보낸다. 그는 부인과 사이에 미술을 공부한 두 아들을 뒀다.

 

한 때 뉴욕 전시회를 추진하려다 그만 뒀다. 서방의 자유분방한 작가들과 교류하고 싶어서였다. 기회가 된다면 뉴욕이나 런던·베를린(뮌헨) 전시회를 가져보고 싶다. 또 누군가 도움을 준다면 ‘살아있는 그림 그리기’ 사업도 해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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