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80일, 시골 잔잔한 호수같은 날들

[동남아일기28-태국] 3달여의 그 모습 그대로 마무리돼고...

윤경효 | 기사입력 2010/03/08 [19:32]

태국80일, 시골 잔잔한 호수같은 날들

[동남아일기28-태국] 3달여의 그 모습 그대로 마무리돼고...

윤경효 | 입력 : 2010/03/08 [19:32]
▲ 인간정주연합 활동가들과 전국빈민조직연대 사람들이 직접 만든 음식으로 송별회를 해주다. ^.^ 말이 안통해도 끊임없이 말을 걸며 관심을 기울여 준 빈민조직연대 사람들과 삼시 세끼 꼬박 꼬박 엄마처럼 챙겨준 피 또이(Toi), 그리고 최선을 다해 동시통역의 수고를 해준 제프에게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     © 윤경효
태국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그래서인가.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떴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마당으로 나오니, 이른 아침부터 콘깬(Khon Kaen)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전에 주민조직개발센터(CODI, Community Organization Development Institute-시민사회를 지원하는 정부 산하 조직)와 회의가 있어 밤새 달려 왔단다. 콘깬 마을 주택재건축사업을 위해 CODI로부터 사업비를 지원받았는데, 그 사업 경과보고를 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빨래를 하고, 짐들을 정리하고 나오니, 그새 북적이던 마당이 고요해졌다. 오늘따라 짤랑 짤랑 처마 끝 풍경(風磬)소리가 사무실 온 구석구석을 가득 채웠다. 너무나 평화로운 이 풍경(風景)이, 너무나 일상처럼 느껴져, 내가 내일 이 곳을 떠나는 것이 맞나 싶다. 혹시 날짜를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비행기 티켓 날짜도 확인하고, 달력도 체크해 본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물 흐르듯 나를 맞이하던 그 모습 그대로, 어제 송별회도 떠들썩하지 않게, 여느 때처럼 그렇게 보냈다. 인간정주연합 친구들과 함께 보낸 지난 8주의 시간이, 시골 마을의 잔잔한 호수를 바라보는 그 마음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날, 자명종 울리기도 전 눈떠
 
12월 17일 목요일 오전 9시. 전국빈민조직연대의 방콕 주민 500여 명이 민주화기념탑 앞에 모였다. 총리령으로 정해진 빈민을 위한 국공유지임대법을 방콕시가 이행하지 않아, 이를 촉구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엄마 손잡고 나온 3~4살 어린 아이부터 허리 굽은 할머니까지, 지난 밤 인간정주연합 활동가들이 만든 피켓을 들고 거리에 섰다.

 
▲ 전국빈민조직연대의 방콕 빈민촌 사람들이 종이와 천으로 만든 피켓을 들고 민주화기념탑 앞에서부터 방콕시청까지 약 1km 정도를 걸으며 평화시위를 했다. 시위대 뒤로 보이는 민주화기념탑이 의미심장하다.(사진 아래 왼쪽) 어린 아이들을 들쳐 업고 어르고 달래며 걷는 부모들을 보니, 그들에게 삶이 얼마나 투쟁적인지 느껴질 것 같다.     © 윤경효


한국의 강남처럼 방콕의 번화가인 수쿰빗(Schumvit)거리가 있는 곳에 빈민촌이 있는데, 마을 옆으로 대형 콘도미니엄 개발공사가 진행되면서 업주가 미관상의 이유로 방콕시에 빈민촌 철거요청을 한 후, 방콕시가 마을 주민들에게 이사 가라고 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동안 방콕시장이 관련법 준수 및 시행을 거부해, 빈민조직 사람들과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방콕시청 입구에 자리를 깔고 앉은 지 2시간. 빈민조직대표와 방콕시장간 면담이 이루어졌다. 면담을 시작한 지 1시간쯤 지나자 빈민대표들이 방콕 부시장 및 시장 정책보좌관과 함께 나왔다. 이야기가 잘 되어 앞으로 법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시장으로부터 받아냈고, 부시장과 보좌관이 대신 나와 농성 중인 사람들에게 직접 사과와 함께 약속을 다짐하였다.

이미 법으로 정한 것을, 그리고 시위 시작 3시간 여만에 오케이 할 것을 그동안 무슨 뚝심으로 나 몰라라 한 것인지 도무지 방콕시장을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사람들이 모여 한목소리를 냄으로써, 구렁이 담 넘어가듯 잇속을 차리려던 시장의 행보를 제지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다. 너무나 당연히 지켜질 것 같은, 그리고 지켜져야 하는 법도, 이렇게 사람들이 끊임없이 주장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거나, 되레 안 지켜질 수도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으면서... 헐~
 
시장 불법행정, 3시간 시위에 ‘시정 약속’
 
피 뚜이(Tui)와 덩(Dung)은 오늘 오후 2시 기차를 타고 치앙마이로 떠났다. 치앙마이에서 전국노숙자연대 연말 총회가 12월 23일(수)~24일(목)까지 열리기 때문이다. 현재 노숙자연대의 최대 현안은 치앙마이와 방콕의 모칫(Mochit)에 노숙자센터를 짓는 것.
 
▲ 방콕시청 앞에 집결한 빈민촌 사람들(사진 위 왼쪽). 아예 천막을 치고 앉았다. 시장이 대화에 임할 때까지 철수하지 않을 예정이라 간식거리를 챙겨왔다.(사진 위 오른쪽), 방콕 빈민조직연대 대표들이 방콕시에 법시행을 촉구하고 있다.(사진 아래 왼쪽) 시장 면담 뒤 부시장과 시장의 정책보좌관이 시민들에게 나와 시정 약속을 다짐하고 있다.(사진 아래 오른쪽, 오른쪽 맨 끝 여성이 방콕 부시장, 옆의 넥타이를 맨 사람이 정책보좌관)     © 윤경효


그들은 아마도 이번 회의에서 이 얘기를 집중적으로 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더불어,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어 하는 노숙자들을 위해, 전국의 사찰과 연대하여 이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일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눌 예정이라고.

일기를 쓰는 와중에 사무실에 10대 청소년 친구들이 들이닥쳤다. 바람소리만 그득하던 곳이 아이들의 활기찬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최근 누이(Nuy)가 방콕 빈민촌의 아이들을 조직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오늘 인간정주연합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기로 한 모양이다. 활동초기라 아직 서로들 서먹해 보이지만, 밥도 같이 해먹고 천연 바셀린 만들기도 함께 하면서 조금씩 무르익겠지.

원래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간정주연합과 함께 하는 동안 마음속에 뿌옇게 자리 잡고 있던 어떤 궁금증이 조금씩 밝혀지는 것 같다. 비록 그 숙제가 더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는 것이었지만. 헐~ 최소한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위안 삼으며, 이제는 그 질문의 답을 찾는 일만 남은 건가.
 
“어떤 궁금증이 조금씩 밝혀지는 듯해...”
 
내일 버마로 떠나 10여일을 돌아볼 예정이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시민운동가를 만나기는 힘들어, 여느 관광객들처럼 주요 관광지를 다니며, 사람들의 생활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버마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이나 교민들을 만나 좀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가능하다면. 헐~ 버마에 대한 별 정보도 없이, 10여 년 전 아웅산 수지 여사가 쓴 ‘버마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Burma, 1996, 펭귄북스)에 기대어 버마 여행 준비를 한다.
 
▲ 지난 12월 12일(토)~13일(일) 태국 중부의 나콘사완(Nakhon Sawan)에 다녀왔다. 전국빈민조직연대의 연간 총회가 열렸는데, 약 50여 명이 모였다. 편안한 워크숍처럼 진행된 이번 회의에서는 지난 1년간의 활동내용과 현안 등을 마을조직별로 정리해 발표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사진 위 좌, 우) 점심 먹은 뒤 몇몇 아줌마들이 지갑을 챙겨들고 나가 길래 쫓아갔더니, 지역 농산물 쇼핑을 한다. 헐~(사진 아래 왼쪽) 행사를 마치고 방콕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아줌마들의 댄스경연이 한바탕 벌어졌는데, 놀랍게도 버스 천장에 나이트클럽에나 있을 컬러조명이 달려있다!(사진 아래 오른쪽) 관광버스 문화는 한국만의 것은 아닌 듯... ㅎㅎ     © 윤경효

누이는 지금 전화통화 중이고, 써(Seo)는 기타 치며 노래 부르고, 눔(Num)은 잠시 외출했다. 렉(Lek) 할아버지는 방에서 TV를 보고 계시며, 피 또이(Toi)는 서류정리에 한창이다. 탄(Tan)은 아마도 화장실 타일바닥 위에 널브러져 자고 있을게다. 8주 동안 봐왔던 그 모습 그대로 오늘, 태국에서의 생활이 마무리 되고 있다.

 

 <빈민운동 활동가들>
 
▲뚜이.
△뚜이(Tui)=
현 인간정주연합 사무국장. 1992년부터 인간정주연합과 함께 20~30대를 보냈다. 평소엔 수줍음 많고 조용하지만, 정부대표들과 만나 이야기할 때는 강경하다. 개인의 자율과 자립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그녀이기에, 활동가들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고 있다. 처음엔 사무실 분위기가 상당히 느슨한 줄 알았는데, 주말도, 밤낮도 가리지 않고 활동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율’이라는 게 더 강력한 규율임을 깨달았다.

▲또이.
△또이(Toi)=
인간정주연합의 안살림 책임자. 뚜이와 함께 인간정주연합을 평온하고 따뜻한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피 또이가 없는 인간정주연합은 ‘팥소 없는 찐빵’. 헐~


 
 
▲엔.

△엔(En)=
치앙마이에서 노숙자모임을 지원하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덩. 

△덩(Dung)=
방콕노이(Bangkoknoi)를 중심으로 방콕 서쪽지역 노숙자모임과 조직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올해 서른인 덩은 예술적 재주가 많은 열정적인 활동가. 대학시절 빈민문제연구동아리를 통해 만난 인간정주연합 활동가의 권유로 2001년에 들어와 올해로 벌써 9년차인 베테랑이다. ‘하하하’, 항상 크고 시원하게 웃으며, 인간정주연합의 청량제 역할을 하는 덩. 미뤄두었던 대학 졸업장을 조만간 손에 쥘 수 있기를.

▲누이. 

△누이(Nuy)=
모칫(Mochit)을 중심으로 방콕의 중북부 지역의 노숙자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덩과 동갑내기 대학 동창으로 2002년 인간정주연합의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10년을 봐온 제프(Jeff) 말에 따르면, 그동안 한 번도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고요한’ 친구. 도대체 화낼 때가 있냐고 물었더니, 정당하지 못한 일이나 사람들이 말귀를 못 알아들을 때라고.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것으로... 헐~

▲왼쪽부터 눔, 써, 제이.   
△왼쪽부터 눔(Num), 써(Seo), 제이(Jay)=
눔과 써는 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일하고 있지만, 인간정주연합 사무실에서 누이, 덩과 함께 사는 관계로 거의 인간정주연합의 활동가로 보일 정도. 헐~ ^.^; 제이는 시민행동(COPA: Community Organization for People’s Action)의 활동가로, 칫롬 및 수쿰빗 지역 빈민촌의 주민조직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이번에 15일간 스님이 되는 경험을 했는데, 어떻게 변했을 지 자못 궁금하네. 훗.
이 셋은 누이, 덩과 함께 람깜행(Ramkhamhaeng)대학 빈민문제연구동아리 동기들로, 제이를 빼고 네 명은 매일 저녁 술상을 차려 내가 단체이름을 인간정주연합이 아니라 ‘인간알코올연합’이라고 바꿔야겠다고 핀잔까지 줬더랬다. ㅍㅍ 그래도 술에 취해 해롱대는 사람 없고, 매일 아침 일찍(나보다 더) 일어나 사무실 청소하고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헐~

▲엑.  
△엑(Ake)=
시민행동(COPA)의 사무국장. 올해 43세인 엑은 빈민운동진영에서 보기 드문 중산층의 수재출신. 태국의 명문사학인 타마삿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공무원이 되려다가 농촌봉사활동을 다녀온 후 진로를 180도 전환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빈민운동에 뛰어든 엑은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열정적인 공화주의자인 엑은 때론 불같은 성질 때문에 사람들과 불편한 관계를 갖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활동가이다.

▲제프. 
△제프(Jeff)=
올해 마흔 둘인 중국계 미국인 제프는 10년 전 박사과정 논문 때문에 태국에 왔다가, 박사과정을 포기하고 전국빈민조직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태국에 눌러 앉았다. 현재 전국빈민조직연대를 위해 해외 지원금 조달, 국내외 빈민운동에 대한 정보 제공 및 정책적 조언 등 자문위원 역할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민중이라 믿는 그는 오늘도 자신의 벽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내년엔 빈민촌으로 들어가 살아볼 작정이라고.


 
 
 
 <인간정주연합에서 만난 식구들>
 
▲왼쪽부터 미, 눈, 팡.     ©
△미(Mee), 눈(Noon), 팡(Fang)=
스리나까린 위롯(Srinakharin Wirot) 대학 사회학과 4학년 학생들. 학과 수업과목 중 사회단체 현장실습 프로그램을 통해 인간정주연합에서 3개월 간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아직 사회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은 없지만, 이번 인턴생활을 통해 사회의 어려움에 대해 조금은 접할 수 있었다고.
독서를 즐기는 내성적인 아가씨 미는 졸업 후 회사에 취업할 생각이고, 쾌활하고 끼가 넘치는 명랑소녀 눈은 좀 더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고 있다고. 조용한 것 같지만, 필요할 땐 자신의 생각을 똑 부러지게 말할 줄 아는 똑순이 팡은 졸업 후 영어공부에 전념한 뒤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 약자를 생각할 줄 아는 멋진 여성들이 되기를...

▲렉.  
△렉(Lek) 할아버지
=80대 나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너무나 건재하신 할아버지. 원래 집은 남쪽 지방 소도시인데, 람캄행대학에서 공부할 때 맺은 인연으로 인간정주연합에 자주 와 머물고 계심.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하다고. 헐~ 언제나 ‘허허허’ 큰 웃음을 웃으시는 렉 할아버지는 작년에 람캄행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셨다. 자식들에게 공부하라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 주로 TV를 보거나 독서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데, 가끔 피 또이 몰래 탄을 괴롭히기도 하는 악동 같은 모습을 보이는 즐거운 할아버지. 건강하셈~^.^

▲탄. 
△탄(Tan)=
원래 있던 개가 죽자 피 또이가 데리고 온 똥개출신. 그래서 이름도 ‘대체물’이라는 뜻의 탄이다. ㅋ 얼마나 잘 먹었는지, 몸이 너무 무거워 걸을 때 뒤뚱 뒤뚱거린다. 주로 하는 일은 널브러져 있기. 가끔 옆집 개가 대문 앞을 어슬렁거리면, 달려 나가 쫓아내기도 한다. 다만, 겁이 많아, 대문 안쪽에서만 그러지만... 헐~ 건강해라. ^.^

 
대초원에서 유라시아 환경보고서를 띄우던 경효. 인도네시아에서 시작해 말레이시아, 태국, 버마, 캄보디아로 1년여 장도의 동남아시아 자원봉사활동을 하며 기행문을 써온 제가 이번엔 영국 쉐필드에 왔습니다. 쉐필드대학 석사과정에서 공부하려고요. 이젠 유학일기로 관심을 좀 끌어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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