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샘골’ 가면 ‘평화·사랑의 꽃’ 꽂으세요

[북한산둘레길②] ‘흰구름길’·‘솔샘길’ 6.2km 걷기·놀기·수다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2/09/27 [01:14]

‘솔샘골’ 가면 ‘평화·사랑의 꽃’ 꽂으세요

[북한산둘레길②] ‘흰구름길’·‘솔샘길’ 6.2km 걷기·놀기·수다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2/09/27 [01:14]
북한산둘레길 두 번째 여행은 명상과 사색의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전문가 도움을 얻어 ‘맛보기’ 해보려던 ‘명상 강연’은 무산됐지만, 서울 어디에서 다시 보랴 싶은 비밀의 숲에서 제멋대로 명상과 사색을 즐겼습니다. 찍어 누르는 그 무엇인가를 내려놓고 더 이상 애쓰지 않으니, 긴장과 불안을 털어낼 수 있습니다. 서두를 일도, 탐낼 것도 없으니 평온하고. 또, 비우니 새 걸 가득 채울 수 있고요.

첫 번째 여행 때 일행은 선물 하나를 예고했습니다. 명상을 배워온 한 분이 수유리 어느 술집에서 뒤풀이에 참여했는데, 다음여행 때 그 맛보기를 보여주기로 했으니까요. 기대가 커서 그랬나요? 바람이 쉽게 이뤄지지 않더이다. 그 분은 다음 기회에 하자고 했고요.

실망이 컸지만 어찌하오리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도리가 없습니다. 금강산으로 달려가다 낙오자가 되고만 울산바위 딱 그 신세입니다. 서둘러 달려가 ‘일만이천봉’에 끼었더라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설악산 풍광이 형편없을 뻔 했으니까요.

▲ 통일교육원 담장을 따라 3코스 ‘흰구름길’에 올랐습니다. 길 이름이 좀 독특하다 싶었죠. 조금 가보니 알겠습니다. 지리산 종주길이 딱 그랬습니다. 구름 속을 걷는 듯한.     © 최방식

▲ 벌개미취가 예쁜 꽃을 피웠습니다. 여행자를 유혹하는 것이지요. 지친 몸을 쉬어 가라고. 고통과 상처를 내려놓으라고. 아름다운 생명의 나래를 어서 펴보라고...     © 김근례


느림보 여행을 하며 기자에게 습관 하나가 생겼습니다. 느리게 가는 데 늦지 않는 다는 것이죠. 출근 길 지하철을 탈 때도 마찬가지죠. 늦으면 허둥대고, 지갑이나 휴대폰 빼놓고 집 나서기 일쑤... 천천히 가니 허둥댈 일 없고, 실수가 줄어드는 거죠. 조금만 일찍 나서니.

‘일만이천봉’ 낙오하니 ‘울산바위’

22일 산행도 그렇게 시작했습니다. 수유역에 도착하니 10시. 다른 이들이 오면 같이 가려고 20여분을 빈둥빈둥 기다렸습니다. 일행 한 분이 나타나 버스를 타려고 달려가는 걸 말려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 더 기다리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커피를 사준다며 일어서네요. 느리니 맛난 것까지 얻어먹습니다.

열한명이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 정류장에 모였습니다. 새 얼굴이 셋이나 늘었습니다. 늘 그렇듯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통일교육원 담장을 따라 3코스 ‘흰구름길’에 올랐습니다. 길 이름이 좀 독특하다 싶었죠. 조금 가보니 알겠습니다. 지리산 종주길이 딱 그랬습니다. 구름 속을 걷는 듯한.

울창한 숲과 아담한 오솔길을 걷다 마주친 구름전망대. 북한산, 도봉산, 수락산, 불암산, 아차산 등 서울 도심 병풍 산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경관입니다. 구름길 경치에 도취해 배고픈 줄 모르던 여행자들. 어느새 황홀경에서 깨어났는지 시장기를 느낍니다.

3층 구름전망대의 1층 자리가 비어있어 둘러앉아 점심을 들었습니다. 떡이며 고구마, 토스트와 김밥 등 싸온 음식들을 모두 모아놓고 ‘소풍 점심’ 맛을 즐겼습니다. 막걸리는 언제 쯤 먹느냐는 분, 밤새 술 절어 음주산행 중이라는 분의 질타를 굳건히 버텨내면서요.

▲ ‘빨래터’에서 잠시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몇은 신발을 벗고 ‘발 빨래’를 시작했습니다. 계곡 물이 맑고 양이 많아 ‘무너미’라 불린 수유동. 궁궐의 무수리들이 왕실 은밀한 빨랫감이 쌓이면 가져와 빨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곳입니다.     © 최방식

▲ 여행자들은 사색과 명상을 즐겼습니다. 이성적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집착을 버리고, 지긋이 내면을 바라보는. 생각을 비우면서 더 깊은 생각에 빠지는...     © 최방식


점심 수다 중 김정란 선생이 재밌는 이야기를 합니다. 학생시절 음악 라디오방송을 듣다 흘러나오는 ‘녹턴’(Nocturne)에 감동해 음반가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녹턴’ 내놓으라고 했다고. 쥔장이 “야상곡 9번, 15번... 만 있다”고 했다는데도, 그는 “야상곡 말고 녹턴”이라고 우기고 또 우겼다고 했죠.

누군들 그런 기억 하나 없겠습니까? 학생시절 라디오에서 좋은 음악 나오면 뭔지 궁금해 이리저리 물어보고, 팝송 제목과 내용을 말도 안 되는 발음으로 우기고 따라 부르던 시절, 남들도 다 그랬죠. 왜, 거기 구름전망대에서 그런 과거를 기억해냈는지 알길 없지만.

구름 속에 있는 듯한 곳이라서 그랬나요? 왜, 영어에 'on the cloud nine'이란 표현이 있죠. 황홀경을 뜻하는. 그러고 보니 미국의 음악평론가 헨리 핀크가 쇼팽의 녹턴을 이렇게 찬탄했다죠. “멘델스존은 ‘한 여름 밤의 꿈’에서 우리를 꿈나라로 잠시 데려갈 뿐이지만, 쇼팽의 녹턴은 마약을 먹은 것 보다 더 달콤한 꿈의 세계로 완전하게 빠져들게 한다.”

“‘야상곡’ 말고 ‘녹턴’을 달라고요”


▲ 화계사 앞마당엔 많은 이들로 북적입니다. 그저 오가는 나그네부터 템플스테이에 참여하거나 불공을 드리려는 이들이 찾아오는 것이죠. 욕심을 버     ©최방식

여행자는 구름에서 계곡으로 내려왔습니다. ‘빨래터’에서 잠시 자리 잡고 앉았죠. 몇은 신발을 벗고 ‘발 빨래’를 시작했습니다. 계곡 물이 맑고 양이 많아 ‘무너미’라 불린 수유동. 궁궐의 무수리들이 왕실 은밀한 빨랫감이 쌓이면 가져와 빨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곳입니다.

다리 밑에서 주저 앉아 한참을 놀며 여행자들은 사색과 명상을 즐겼습니다. 명상 체험은 못했지만, 그렇다고 명상이나 사색을 모르는 건 아니니까요. 이성적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집착을 버리고, 지긋이 내면을 바라보는. 생각을 비우면서 더 깊은 생각에 빠지는...

거기 마주한 개울가 물봉선을 보고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여행자의 지친 피로를 풀어주는 생명수가 반가운, 탐욕으로 이제는 물이 거의 말라버린 동천(洞天)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데 여행자 한 분이 “발을 씻었더니 정말 시원한다”고 자랑합니다. 넋 놓고 있던 기자는 그제야 후회했고.

여행은 4코스 ‘솔샘길’로 이어집니다. 북한산생태숲에서 출발해 정릉주차장까지 2.1km(1시간 소요) 구간. 소나무가 무성하고 맑은 샘이 있어 솔샘이라 불렸다는 곳이죠. 성북구의 대표적 도시공원인기도 한데 작은 꽃길 따라 야생화가 곱습니다.

작은 연못가 여행자들이 둘러앉았습니다. 물 한 잔씩 마시고 행사를 벌였죠. 탁주 한잔씩 따라놓고 둘러앉을 때 들으면 좋을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 시낭송이 시작됐습니다. 언제쯤 걷기를 마치고 막걸리를 마실 수 있느냐고 징징대던 분, 목이 더 마려웠을 겁니다.

“남 들은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게는 밥이나 마찬가지다/ 막걸리를 마시면/ 배가 불러지니 말이다/ 막걸리는 술이 아니다/ 쌀로 만드는 막걸리는/ 영양분이 많다/ 그러니 어찌 술이랴!/ 나는 막걸리를 조금씩만 마시니/ 취한다는 건 모른다/ 거저 배만 든든하고/ 기분만 좋은 것이다.”

▲ 축원문과 소원지가 줄줄이 매달렸습니다. 때가되면 모아서 부처님께 축원드리겠다며 거기 묶어놓으라 했군요. 저기 전쟁과 분열, 그리고 다툼 없는 사회를 기원하는 글도 들어있겠죠?     ©김근례


여행자 한 분이 어린 시절 살았던 기억이 있는 곳이라네요. 그 시절 삶을 얘기 좀 해달라니 글쎄 이럽니다. “저 아래 아파트 있던 자리가 예전엔 판자촌이었고요. 둘레길이 있는 여기는 그 뒷산이고요...” 그럼 그렇지, 어차피 욕심내지 않기로 했으니 혀를 찰 일도 없습니다.

“막걸리를 술이라지만 내겐 밥이다”

여정 어디선가 여행자 한 분 머리에 꽃이 꽂혀있습니다. 곁에 있던 분이 장난삼아(?) 그리 한 것이었죠. 일행 모두 “너무 멋집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될터인데 입이 근질거린 한 여행자가 그랬습니다. “‘머리 빙빙’ 아니고 진짜요.”

그분은 정릉 골 뒤풀이 식당에 들어설 때도 꽃을 꽂은 채였습니다. 영화 ‘동막골’에서 꽃을 꽂고 해맑게 연기한 강혜정을 언급했나요? 또 한쪽에선 68반전운동이 가장 격렬했던 샌프란시스코의 노래 하나를 들먹였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그 히피찬가를 부른 스콧 맥켄지(Scott McKenzie)가 지난달 13일 세상을 떴네요. 포크 그룹 ‘마마스 앤드 파파스’의 존 필립스가 작곡해 준 노래를 경쾌하게 불러댔던 스콧. 60년대 후반 반전·인권운동에 앞장섰던 히피의 별명이 ‘꽃의 아이들’이었으니, 머리에 꽃을 꽂으라는 건 히피문화에 동참하라는 호소였죠. 자본주의 소비·전쟁을 거부하는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를 위해. 그 곳 지명도 ‘무소유의 자연공동체 삶을 보여준 성 프란체스코에서 유래했고.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온유(젠틀)한 사람들을 만날 거예요/ 샌프란시스코에 모인 사람들을 위해/ 여름엔 사람의 집회가 열릴 거예요/ 샌프란시스코 거리에선/ 온유한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고 있어요/ 온 나라가 그런 분위기에 휩싸이고/ ... 새 생각을 가진 건전한 세대가 살고...”
 
▲ 작은 연못가 여행자들이 둘러앉았습니다. 물 한 잔씩 마시고 작은 행사를 시작했습니다. 탁주 한잔씩 따라놓고 둘러앉을 때 들으면 좋을 천상병 시인의 ‘막걸리’ 시낭송을 한 것입니다.     © 최방식
▲ 학생시절 음악방송을 듣다 흘러나오는 ‘녹턴’(Nocturne)에 감동해 음반가게로 달려가 다짜고짜 ‘녹턴’ 내놓으라고 했다는 분. 쥔장이 “야상곡 9번, 15번... 만 있다”는데, “야상곡 말고 녹턴”이라 우기고 또 우겼다고...     © 최방식


뒤풀이 때가 돼서야 막걸리 몇 잔을 마시더니 입을 연 여행자도 있습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최광신 선생. 강동시민연대 회원이라고 했습니다. 유기농과 음식이야기를 하던 중 아픈 과거사를 들려줬습니다. 한국 농업의 쇠락사를 듣는 듯 해 맘이 짠했습니다.

“제가 천안에서 농고를 졸업했습니다. 청년 시절인데 어느 날 친구 하나가 ‘무쏘’(자동차)를 타고 나타났더라고요. 농협에서 저리로 수천만원을 빌려 샀다면서요. 빌린 돈이야 곧 갚으면 된다더군요. 우리 세대에 농업이 흥한 적이 있나요? 그 빚에 쪼들리던 친구는 어느 날 농약 한 병 입에 털어 넣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친구놈, 농약 한병 털어 넣고 가벼려”

그는 농업을 배웠지만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농촌이 싫고 무서워 도시로 올라왔다고 했죠. 이어진 도시 변두리의 삶. 지금도 성남 어딘가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민사회운동에 일찍부터 참여해 아픔을 딛고 그럭저럭 살고 있다고 했죠.

이날 처음 온 또 한 분, 정말 기가 막힙니다. 길음시장 어딘가에서 ‘2차’를 하는데, 그 때까지 한 마디 없더니 거기서 말문이 트였습니다. 여행 내내 “생태해설가가 안와 안타깝다”며 잘 모르는 꽃·나무 이야기를 여럿이 늘어놓곤 했는데, 그제야 자기가 숲해설 교육을 받았다 네요. “술시가 되니, 술이 깨고, 술이 땡긴다”며 3차는 자기가 “쏘겠다”고 따르랍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 도배방지 이미지

북산산둘레길, 수유리 흰구름길 솔샘길 정릉 여행생협 관련기사목록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