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포크 음악의 창시자 우디 거스리

음악산책 "대공황기 하층민의 고단한 삶 읊조린 '이 땅은 너..."

유요비 | 기사입력 2007/09/14 [12:46]

저항·포크 음악의 창시자 우디 거스리

음악산책 "대공황기 하층민의 고단한 삶 읊조린 '이 땅은 너..."

유요비 | 입력 : 2007/09/14 [12:46]
이 땅은 너의 땅
 
이 땅은 너의 땅, 이 땅은 나의 땅
뉴욕의 스테이튼 섬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멕시코만에서부터 붉은나무 숲까지
이 땅 너와 나를 위해 생겨난 땅이라네

 
내가 고속도로를 따라 걸을 때
내 위에 끝없이 펼쳐진 고속도로를 보았을 때도
내 아래 펼쳐진 계곡들을 보았을 때도
나는 말했네 이 땅은 너와 나를 위해 생겨난 땅이라고.

 
나는 발길 닫는대로 정처없이 걷고 방랑했네
다이아몬드 사막의 번쩍이는 모래까지
그리고 나를 온통 감싼 목소리를 들었네
이 땅은 너와 나를 위해 생겨난 땅이라는

 
높은 벽이 나를 가로 막고 있네
색칠된 표지판에는 "사유재산'이라고 쓰여있었지만
뒷면에는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았네
이 땅은 너와 나를 위해 생겨난 땅이라네

 
태양이 빛날 때 나는 산책하고 있었네
먼지 구름 속 물결치는 밀밭 속을
안개가 피어오르면서 한 목소리가 노래했네
이 땅은 너와 나를 위해 생겨났다고

 
햇빛이 빛나는 아침이 오고 구호소 뾰족탑 그늘 아래에서
나는 사람들을 보았네
배고픔에 길게 줄을 서 있있네 나도 끼어 줄을 섰다네.
이 땅이 너와 나를 위해 생겨났는지 의문이 드네
(유요비 역)

 
▲ 미국의 전설적인 포크음악인 우디 거스리. 

 
"가장 전통적인 미국 가락"
 
2004년 7월,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을 패러디한 한 편의 패러디 동영상물이 인터넷을 타고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면서, 선거전까지 무려 1억 명에 가까운 미국인들이 이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민주당의 존 케리 후보와 공화당의 부시 후보간에 승부를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이 땅은 네 땅, 이 땅은 내 땅”이란 제목의 이 동영상물은 두 후보의 목소리까지 비슷하게 흉내내면서 양측의 폭로, 비방, 흑색선전을 풍자했다.
 
이라크전쟁을 위대한 십자군 원정대를 자처하는 부시는 케리에게 “괴물같이 생겼고”, “정책에 대한 말을 자꾸 바꿀 뿐 아니라 유엔의 충직한 개”라고 폄하하면, 케리는 “핵(nuclear)이라는 발음도 제대로 못하면서 위험한 핵을 갖고 놀지 말라”고 부시의 무식함을 조롱하며 “내가 명예훈장을 세 개나 받을 때 넌 뭐하고 있었냐”고 받아친다. 그러나 서로 “이 땅(미국)은 나를 선택할 것이다”라고 큰소리치던 두 후보는 마지막에 어깨동무를 하고 "이 땅은 너와 나의 것"이라면서 사이좋게 마무리한다. 국민들의 일상과는 유리된 정치의 후진성을 아주 신랄하게 비판한 이 패러디물은 전세계적으로 수 억 명이 본 것으로 추측된다.
 
이 패러디 동영상물의 원작(原作)이 바로 “가장 전통적인 미국의 가락”으로 칭송되는 우디 거스리(Woody Gurthrie)의 노래 ‘이 땅은 너의 땅’(This land is your land)이다. 이 노래는 구전민요를 바탕으로 작사·작곡·노래한 그의 대표곡으로, 대공황기 미국 하층민의 열악한 삶을 표현한 곡이다.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을 몰아내고 이주민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아메리카합중국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이 노래는 이걸 묻고 있다. 우디 거스리의 노래들은 대부분 미국의 하층계급의 열악한 사회, 경제적 처지를 고발하고, 소수의 기득권층을 공격하는데, 미국은 기득권을 가진 소수 백인만의 나라가 아니라 미국의 건국에 땀과 피를 흘린 모든 사람들의 나라라고 선언한다.
 
이는 우디가 어려서 겪은 오클라호마로부터 캘리포니아까지의 기나긴 이주여행을 통해서, 또 의학박사이자 민요채집가인 로맥스, 가수 피트 시거 등과의 민요채집여행을 통해서 체득한 그의 철학이었다.
 
"미합중국의 주인은 과연 누구?"
 
▲ 노래하는 우디 거스리.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디 거스리는 포크음악을 하나의 장르로 정립한 인물로, 또 포크음악을 가진 자들의 놀이가 아닌, 못 가진 자들의 놀이문화로 발전시킨 인물로, 나아가 포크음악에 내재되어 있던 정치, 사회적 ‘저항성’이란 에너지를 밖으로 끌어낸 인물로 대중음악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포크음악은 민요, 즉 오랜 동안 구전되어오거나,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져 입에서 입으로 전해내려 오는 음악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국의 포크음악은 미국을 개척한 이민자들이 그들의 모국으로부터 가져온 민요와 이민생활 중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새로운 노래를 모태로 하고 있다.
 
신대륙으로 건너온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계 이민자들은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 근처에, 프랑스계 이민자들은 중부의 루이지애나에, 북유럽계와 독일계 이민자들은 중북부에, 스페인계 이민자들은 남서부에 각각 정착하면서 새롭게 자신들의 민요를 만들어 불렀으며,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계의 흑인들도 영가와 블루스를 포함한 자신들의 음악을 만들어 불렀다. 이렇듯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미국의 민요들을 채집하고 정리하여 포크라는 현대적 음악형식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우디 거스리였다.
 
다양하고 풍부한 음악적 자산, 그리고 우디 거스리라는 특출한 음악가가 있었기에 미국의 포크음악은 민족음악의 성격이 강한 각 나라들의 포크음악에 비해 상대적으로 세계성과 보편성, 그리고 대중성에서 경쟁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디 거스리는 1912년 오클라호마의 한 작은 도시 오키마(Okemah)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누나 클라라(Clara)를 잃고 어머니마저 염색체 이상으로 발생하는 유전적 정신병인 헌팅턴 무도병(Huntington's Chorea)이 발병하여 정신병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등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
 
이러한 환경 때문에 우디 거스리는 16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면서 싸움패가 되어 거리를 배회하곤 했는데, 이 때 거리에서 하모니카와 기타, 그리고 하층민들의 노래와 민요들을 배웠다. 잠깐 그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 삼촌인 제프 거스리의 유랑 쇼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서 돌아가시고 대공황의 여파로 아버지의 사업과 고향 오키마마저 폐허로 몰락하자 1931년 텍사스로 이주한다.
 
1933년 동료 음악인인 매트 제닝스(Mat Jennings)의 여동생 메리(Marry)와 결혼하여 알로(Alro), 노라(Nora) 등 3남매를 낳았으나 1935년 텍사스를 휩쓸고 간 ‘대 황사 폭풍’(the Great Dust Strom)으로 생활의 기반을 잃고,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2년간의 고단하고 긴 이주여행의 길을 떠나게 된다.
 
오키스(Okies)라고 불리는 이주행렬 속에서 우디 거스리는 민요와 노래들을 채집하면서 자신의 철학과 음악적 스타일을 확립하였는데, 후에 이 때 채집한 노래들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This land is your land>를 비롯하여 <I ain't got no home>, <Goin' down the road feeling bad>, <Talking dust bowl blues>, <Tom Jod and hard travelling> 등을 작곡했다.
 
1940년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으로 건너간 우디 거스리는 노동자들을 위한 콘서트와 방송출연, 작곡, 레코딩 등의 음악활동 외에 <Daily worker nyc>, <People's world on west coast>, <common bound> 등의 좌파 매체에 정치적 칼럼을 쓰기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미국 포크음악의 선구자 주의 한 사람인 피트 시거(Pete Seger)를 만난 것도 이때이고, 후일의 위버스(The Weavers)로 이어지는 좌파 밴드 앨머닉 싱어스(The Almana singers)를 결성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왕성한 활동과 음악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디 거스리는 로맥스, 피트시거 등과 미국 전역을 돌며 민요채집을 나서는가 하면, 미 정부의 요청으로 잠시 그랜드 쿠리댐(The Grand Coulee Dam) 건설 현장에 머물면서 댐건설을 노래 모음집인 <The Columbia River Songs>를 발표한다. 1943년에는 눈을 밖으로 돌려 북아프리카, 시칠리, 영국 등지를 여행하며 각국의 민속악기와 민요를 수집하는 한편,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황사폭풍 이주' 속 민요 채집
 
▲ 우디 거스리의 68년 앨범 '푸어 보이'(Poor Boy).     ©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우디 거스리는 군에 입대하여 육군과 해군에서 복무하면서, 파시즘을 반대하는 음악을 만들기도 했으며 동요모음집인 <Songs to grow on>을 발표하여 언론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우디 거스리는 뉴욕 브룩클린의 코니아일랜드에 가족과 함께 정착하여 작곡과 집필활동에 전념했다. 이러한 그의 노력으로 1950년대에 들어서서 포크음악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지만, 정작 우디 거스리는 이 때부터 유전으로 내려오던 헌팅턴 무도병(Huntington's Chorea)이 발병하여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약해지기 시작한다.
 
결국 1954년 우디 거스리는 활동을 접고, 스스로 그레이스톤(Greystone)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그리고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시달리다가 1967년 뉴욕 퀸스의 크리드무어Creedmoore) 정신병원에서 사망한다.
 
우디 거스리는 미국의 대중음악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포크음악과 청년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서유석과 양병집의 초기 노래들 대부분이 우디 거스리나 피트 시거의 번안곡들이고, 그 노래들을 숙주로 해서 기성체제에 도전하는 한국의 청년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다.
 
우디 거스리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로, 1천곡이 넘는 포크음악을 작곡한 뛰어난 음악가이자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닌 위대한 음유시인으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20세기 최고의 음악인으로 추앙받는다.
 
미국 최고의 20세기 음유시인
 
우디 거스리의 사후 1976년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 <Bound for Glory>(우디 거스리의 작품 제목을 그대로 사용했음)가 만들어졌고, 1998년에는 포크의 정신을 계승한 영국출신의 펑크록 가수 빌리 브랙(Billy Bragg)이 우디 거스리의 미발표 글 중에서 노랫말을 발췌하여 <Mermaid Avinue>(머메이드 아비뉴는 우디 거스리가 살았던 거리 이름)라는 앨범을 제작했다.
 
그리고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 우디 거스리의 <This land is your land>는 ‘미국인들이 뽑은 20세기의 명곡’ 가운데 한 곡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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