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해, 나는 한씨가 가주의 딸이야"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작은 세상의 비망록(8-2)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5/31 [09:32]

"명심해, 나는 한씨가 가주의 딸이야"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작은 세상의 비망록(8-2)

이슬비 | 입력 : 2017/05/31 [09:32]

제8장 작은 세상의 비망록(3-2)

 

잠시 쉬었다 해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서란은 연무장의 모래바닥에 주저앉았다. 붕대도 갈고, 손에 약초도 붙여야할 상황이었다. 서란은 한 손을 높이 들어 근처에 있던 시종들을 불렀다.


시종들이 지혈제며, 약초, 붕대를 가지고 달려왔다. 시종 하나가 공단방석이 깔린 의자를 들고 와 서란의 앞에 내려놓았다.
 
유흔은?”
 
시종들은 서란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란의 손에 감긴 피 묻은 붕대를 벗겨낼 뿐. 시녀 하나가 더운 물이 담긴 나무대야를 가지고 나타나, 서란의 피 묻은 손을 씻겨주었다.
 
유흔은 어디 갔냐니까?”


…….”


오늘은 혼자 수련하라는 말만 하고 아침부터 나가버리더니, 하루 종일 돌아오지도 않고. 너희들, 정말 유흔이 어디 갔는지 몰라?”


저희가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아가씨.”


그래?”
 
일순간, 서란은 갑자기 싸늘한 눈으로 시종들을 노려보았다. 서란의 눈길에 시종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면 될 일이지, 왜 다들 입을 다물었던 거지?”


…….”


, 그래, ‘아가씨라서 그래도 된다는 것이겠지? 나는 공주님이 아니라 아가씨니까.”


, 그것이…….”


어쨌든 이것 하나만은 명심해두는 게 좋을 거야. 나는 한씨가 가주의 딸이야.”
 
한씨가 가주의 딸. 서란은 방금 자신이 한 말을 입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한씨가 가주의 딸이라. 그렇다. 서란 자신은 한씨가 가주의 딸이었다.


그러나 한씨가 가주의 딸이면 무엇 하는가. 권속들은 모두 서란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미쳐서 자기 자식까지 죽이려 날뛰다, 골방에 갇힌 광인의 자식으로 볼 뿐이었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말아 쥐었다. 또다시 뒤에서 몰래 자신을 비웃는 노예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너네 그거 아니? ’유란말이야, ’유란‘.'


''유란이요? 그게 누군데요?' '아, 너희는 팔려온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겠구나. 있어. 가주님의 동생인데, 후계 혈전에서 패하고, 2후계의 직위마저 박탈당했지.' '그런데요?'

 

'그런데 그 여자 미쳤다? 말 그대로 미친년이야. 자기 자식까지 죽이려고 날뛰다가, 골방에 갇혀서 폐인이 돼버렸지. 매일같이 머리는 길게 풀어헤치고, 하얀 옷까지 입고 멍하니 앉아 있는 꼴을 보면, 아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게 사는 거라니, 어디?'  


아무리 자신을 죽이려 했던 어머니라 해도 어머니는 어머니였다. 그때, 서란의 얼굴이 분노로 창백해지는 것을 보자마자, 유흔은 자신 소속의 시종장을 불러 크게 화를 냈다.
 
'도대체 너는 하는 일이 무엇이냐?'


'그, 그것이…….'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없는 일로, 상전들이 신경 쓰지 않게 하는 것이 네가 해야 할 일이 아니더냐.' '요, 용서해주십시오, 도련님.' ‘긴 말 필요 없다. 당장 가서 본보기로 저년들의 혀를 자르고, 살갗이 다 터져서 뼈가 하얗게 드러날 때까지 매우 쳐라. 고얀 것들. 감히 노예 주제에 상전을 비웃다니. 입버릇도 버릇이라 쉬이 고치지 못할 터이니, 이참에 저것들과 친하게 지냈던 노예들도 끌어내 팔아버려라.'
 
그날 저녁 내내, 유흔의 처소 안뜰에서는 혀가 잘린 세 노예의 몸을 찢는 채찍소리와, 강제로 옷이 벗겨지고 속옷 차림으로 굵은 오랏줄에 줄줄이 묶여 끌려가는 노예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잘못했습니다, 아가씨.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살려주십시오, 아가씨.'
 
유흔은 서란을 품에 안고 이부자리 위에 누웠다. 서란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유흔은 그런 서란의 등을 살살 쓰다듬었고, 서란은 유흔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금세 잠이 들었다.
 
유흔…….”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끝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이렇게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에는, 유흔의 품에 안겨 있어야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아가씨, 여기 차를 가져왔습니다.”
 
수련 중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때면, 항상 시녀들이 차를 내왔다. 보통은, 말차를 우릴 때 쓰는 다구가 담긴 팔각상자를 가져와, 눈앞에서 직접 우려 주고는 했지만, 말차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서란이나 유흔을 위해 이렇게 잎차를 우려 줄 때도 종종 있었다.


서란은 시녀가 받치고 있는 팔각소반에 놓인 찻잔과 받침을 집어 들었다. 사흘 내내 말차만 마신 탓인지, 서란은 잎차가 반갑기 그지없었다.


흐음. 서란은 찻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코로 들이마셨다. 우전을 우린 것인지 싱그러운 향기가 그윽하게 풍겨져 왔다.
 
향이 참 좋구나.”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려던 서란은 어, 하는 느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녀를 올려다보았다. 보통의 다도에서는, 차를 대접받는 사람이 차에 대에 이야기를 하면, 차를 내는 사람은 그에 대한 답으로 차에 대한 설명이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이었다. 하지만 서란에게 차를 내온 시녀는 그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란은 시녀를 위에서 아래로, 다시 아래에서 위로 훑어보았다. 문득, 시녀의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는 것이 서란의 눈에 들어왔다. 서란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춘심아.”


, 아가씨.”


참으로 차를 깊이 있게 우렸구나. 차의 색이며 향이며 무엇 하나 깊지 않은 것이 없구나. 한씨가에 들어오지만 않았더라도 세인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다인(茶 人)이 되었을 텐데 아깝구나.”


과찬이십니다. 이년이 어찌 감히 그런 경지에 다다르는 것을 꿈꿀 수 있겠습니까. 과찬을 거두어주십시오, 아가씨.”


한데 말이다, 춘심아, 너는 네가 우린 차의 첫맛이 어떠한지 알고 있느냐?”

춘심이 뭐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서란이 찻잔을 땅바닥에 내던져버린 것은. 놀란 춘심이 다시 뭐라 입을 열려는 찰나, 서란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년을 끌어다 손목을 자르고 노예로 팔아버려라. 가주님께는 내가 알아서 보고할 것이니,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하여는 철저히 함구하도록. 만약,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한 헛소리가 내 귀에 들어온다면 너희들도 이년 꼴이 될 것이다. 알겠느냐?”
 
말을 마친 서란은 검을 집어 들었다. 자신은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한씨가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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