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제25장 폐월수화(閉月羞花)(4)-1
마침내 남자가 고개를 들어 유흔을 바라보았을 때, 유흔은 속으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유흔이 아는 ‘그’였기 때문이었다.
개와 원숭이의 사이. 세간에서는 사이가 유달리 좋지 않은 두 사람을 가리켜, 개와 원숭이 같은 사이라고 불렀다. 개와 원숭이 같은 사이. 견원지간(犬 猿 之 間).
같은 곳에 놔두면 원숭이는 허공으로 날아다니며 개를 발로 차고, 다리로 목을 감으며 괴롭히고, 개는 그런 원숭이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짖다가 끝내는 물어뜯는다고 하였다.
하여, 세인들 중 누구도 개와 원숭이를 한 집에서 키우지 않았고, 어느새 세간에서는 사이가 유달리 안 좋은 두 사람을 가리켜 ‘마치 개와 원숭이 같다’는 의미의 견원지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란은 세인들의 말에 아주 잘 들어맞는 두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이야말로 개와 원숭이가 아니면 달리 비유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
피에드르를 경제학 스승으로 삼은 뒤부터, 서란은 매 수업시간마다 유흔과 피에드르의 신경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이가 나쁠 이유가 그다지 없어 보였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항상 서로를 향래 날 선 시선과 거친 말을 일삼았고, 그때마다 좌불안석인 것은 서란이었다.
이쪽을 진정시키면 저쪽에서 싸움을 걸고, 저쪽을 진정시키면 이쪽에서 싸움을 거니 이것이야말로 바늘방석에 앉은 꼴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참다못한 서란이 지필묵을 들고 자리를 뜨려 하면 두 사람의 신경전이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또다른 신경전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서란은 도대체 자신이 이곳에 배우러 온 것인지, 아니면 싸움구경을 하러 온 것인지 헷갈리기만 했다.
수업시간 내내 유흔은 수업과 관련 없는 질문을 하거나, 수업과 관련이 있으되 대답하기 곤혹스러운 질문들을 던져서 피에드르를 당황하게 했고, 그때마다 피에드르는 유흔의 무례한 태도를 지적하며 조용히 화를 냈다.
그러던 것이 얼마 전부터는 유흔이 아무리 곤혹스러운 질문을 해도 피에드르가 대답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으로 바뀌었으니 유흔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날만도 하였다.
이제 피에드르는 유흔을 없는 사람 취급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무시를 참다못한 유흔은 수업이 시작되자마자 이제껏 한 질문들보다 더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피에드르의 이번 수업은 서란마저 그에게 날을 세우게 할 정도로 뼈가 있는 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
“앉아요, 앉아.”
수업공간으로 쓰이는 서양식 살롱에 앉자, 미리 시켜둔 것인지 차 세 잔이 나왔다. 그러나 평소와 다르게 두 잔은 유리 다기에 담겨 나온 것을 보니, 서양의 차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서란과 유흔을 배려한 것 같았다.
피에드르는 아주 익숙한 동작으로 도자기 다관에 담긴 차를 넓은 접시 위에 부었다. 접시 위에 차를 부어 마시면, 자연스레 입으로 차를 빨아 마시게 되니 “후루룩” 하는 큰소리가 나게 마련이었는데, 서란은 이런 광경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내 참, 이게 뭐하자는 거야. 지금 차를 마시자는 거야, 아니면 누가 더 야만적인가 내기를 하자는 거야? 세상에 어떤 미친놈들이 차를 접시에 부어 마시냐고. 찻잔이 없다면 몰라. 멀쩡한 찻잔 놔두고 왜 저런 짓을 하는 걸까? 에이, 미친놈들.’
차를 접시에 부어 마시는 서양에서는 “후루룩” 하며 큰소리를 내는 것이 예의여서인지, 피에드르가 내는 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서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롱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서양인이라, 여기저기서 “후루룩” 하는 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정말 더러워죽겠네.’
부상국에서는 차를 마시는 예절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가문마다 차에 대한 예법이 다르다고는 하나, 차를 마실 때에는 최대한 공손하고 정갈한 자세로 마시는 것이 예의인 까닭에, 뜨거운 차를 식히려 입김을 불기만 해도 ‘예의도 모르는 후레자식’ 소리를 듣는 부상국에서 이러한 방법으로 차를 마신다면 그는 아마 평생 동안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할 것이었다.
“오늘은 불과 한 세기 전까지 지속되었던 ‘십자군전쟁’에 대해 공부해보겠어요. 레이디 서란, 내가 전에 당신에게 서양에는 교황이 존재한다 했죠? 그리고 한때 교황의 권위는 신과 맞먹을 정도였다고요.”
“…….”
“자, 그런데 그런 교황이 대체 무엇이 아쉬워서 무리하게 전쟁을 일으켰을까요? 단순히 이교도들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서? 성지를 탈환해서 신의 위대함을 만천하게 알리기 위해서?”
풉.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전쟁이란, 자고로 천하의 모든 힘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하여도, 전쟁으로 인한 손해를 모두 이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이 걸리는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물론, 지금의 부상국은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지만.’
수많은 독립영주들이 저마다 놀이하듯 가볍게 전쟁을 일으키고, 그 손해며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고. 이러한 일들이 상식이요, 일상이 되어버린 곳이 부상국이 아니던가.
물론, 서란 자신은 그렇지 않을 것이냐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였다. ‘나도 그럴 것이다.’ 어쨌든 부상국은 힘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니까.
짧은 상념을 끝내고 마주 본 피에드르의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아련해 보이기까지 했다. 서란이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보려는 찰나, 피에드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이번 수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십자군전쟁의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전쟁과 교역의 상관관계에 대한 예로 이만큼 좋은 선례가 없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았던 비잔티움제국이 멸망하면서, 동서양의 모든 문물이 모여드는 무역항 콘스탄티노플은 이름마저 이스탄불로 바뀌어 오스만제국의 소유가 되었고, 그로 인해 유럽인들은 중개무역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을 잃게 된 것이지요.”
“…….”
“이로 인해 각국의 교구와 영주들, 왕들이 보내는 헌금으로 재정을 유지해오던 교황청의 살림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고, 따라서 교황청으로서는 반드시 콘스탄티노플을 유럽인의 땅으로, 기독교인들의 땅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했던 것이지요.”
“그렇군요.”
사란은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손가락으로 쓸며 생각에 잠겼다. 교역로 하나를 두고 무려 300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종교의 이름으로 싸워야만 했던 이유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 때문이었다니. 어딘지 모르게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가주가 되어야 하듯이, 누군가에게는 살아남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돈을 위해 싸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명분은 성지탈환, 그러나 목적은 돈. 그렇다면 피에드르 당신은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보십니까?”
“예……?”
“모든 권위는 결국, 돈 위에 세워지는 것이지요. 그러니 재정이 부족해진 교황청은 과거의 권위를 되찾을 수 없었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교황은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무리한 전쟁을 획책하였다, 이 말이 아닙니까.”
그동안 피에드르와의 수업에서 그를 향해 날을 세워본 적이 없었던 서란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오늘만은 피에드르에게 날이 서 있는 서란의 모습에, 유흔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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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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