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25-2화, 폐월수화(閉月羞花)

이슬비 | 기사입력 2019/05/20 [10:59]

[무협]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25-2화, 폐월수화(閉月羞花)

이슬비 | 입력 : 2019/05/20 [10:59]

<지난 글에 이어서>

제25장 폐월수화(閉月羞花)(4)-2

 

인간의 공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옵니다.”

 

…….”

 

그리고 그렇게 기인한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은 생각으로든 행동으로든 어떻게든 움직이게 되지요.”

 

화야?”

 

잘 압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음을요. 그리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요. 하지만 권위가 없다 하여 살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제 서란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어 가고 있었다. 고작 권위를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고? 고작 권위를 위해?

 

그 뒤에 이어진 수업의 내용은 서란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살롱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또다시 어머니의 텅 빈 눈동자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가엾은 내 아가가엾은 내 딸아왜 살려달라고 빌지 않니? ? 아, 내 딸아.’

 

서란은 가슴을 부여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이제는 어머니가 울고 있던 모습까지 떠올라, 서란은 옆으로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미웠나요, 어머니?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그러나 정말 어머니가 자신을 미워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슬프지 않을까. 서란은 옆으로 늘어뜨린 고개를 두 무릎 사이에 파묻어버렸다.

 

당신 미쳤어?”

 

서란이 살롱을 뛰쳐나가고 유흔과 피에드르, 두 사람 사이에는 한동안 깊은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정적을 깬 것은 유흔이었고, 유흔은 정적을 깬 것으로도 모자라 한 손에는 피에드르의 셔츠 깃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

 

유흔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마치 그의 이름이 무슨 금기라도 되는 것처럼. 유흔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의 이름을 애써 삼켜버리며 말을 이었다.

 

서란이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지?”

 

유흔.”

 

서란이, 샤르휘나가 오늘 수업에서 제 처지를 다시 되새기라고 일부러 그런 거지?”

 

…….”

 

그래서 일부러 십자군전쟁 이야기를 꺼낸 거지, 그렇지?”

 

유흔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에드르가 투명한 눈으로 유흔을 바라보았다. 푸른 바다를 닮은 그의 눈동자는 마치 자신의 마음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여서, 유흔은 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유흔.”

 

피에드르가 유흔을 불렀다. 유흔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제가 왜 경제(經濟)인지 아십니까?”

 

……?”

 

경제란, 곧 경세제민(經世濟民)입니다. 천하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을 굽어 살피고. 먹고 사는 것을 위한 재화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일을 굽어 살핀다, 그것이 바로 경세제민이고, 경제인 것이지요. 하여, 그러한 일을 가르치는 학문인 경제학은 그녀에게 있어 꼭 필요한 학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접하는 그의 선문답이었다. 지금 그는 서란이 경제학 수업을 통해 그녀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고,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한씨가의 가주가 되고, 찬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지도자로 성장해가기를 바라는유흔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일부러 서란을 자극한 것이리라.

  

당신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유흔은 씁쓸한 표정으로 남은 차를 입에 머금었다. 모든 것이 그의 계획에 있는 것은,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번에는 유흔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피에드르는 애써 눈을 감았다. 그러나 유흔은 예의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리 당신의 계획이었다 해도 궁금하지 않아?”

 

…….”

 

유란이 말이야.”

 

말을 마치며, 유흔은 태양을 닮은 피에드르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불쌍한 유란. 대체 어찌하여 저자의 계획에

 

그러나 유흔은 그 말만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유란이 불쌍하다 하나, 그런 말을 한들 피에드르가 유란에게 가볼 수도 없는 일이었고, 설령, 가볼 수 있다 해도 그는 결코 유란에게 가지 않을 것이었다.

 

 

피에드르.”

 

한동안 피에드르를 찾아오지 않았던 서란이 다시 그의 수업을 듣기 시작한 것은 그날로부터 삼 일이 지난 직후였다. 새벽같이 서양 상인들의 거리를 찾은 서란은 아직 살롱이 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피에드르가 묵고 있는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차 한 잔 하시겠습니까, 서란.”

 

피에드르가 풍로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서란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했던 그 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러셨습니까?”

 

당신이 그랬지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돈이라고.”

 

…….”

 

맞아요. 사람도, 천하도 결국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지요. 그것이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이든, 명분이든. 그렇게 사람도, 천하도 모두 물질에 따라 움직이지요. 당신은 이것을 내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까?”

 

서란?”

 

물질의 흐름에 새로운 방식을 부여하는 것. 이것이 당신이 내게 가르칠 새로운 시대라 그리 생각이 들더이다. 하여, 이 한서란,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당신이 이제부터 내게 보여줄 새로운 세상을 접해볼까 합니다.”

 

그날부터 서란은 피에드르에게 서구의 국가들에서 열을 올리고 있는 신항로의 개척과, 신대륙의 발견, 그리고 그로 인해 유럽 대륙이 얻게 된 막대한 이익들과, 그로 인해 새로 일어나게 된 산업들과 중상주의 정책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다.

 

이전과 다름없는 수업이었지만, 그래도 이전에 비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서란이었다. 서란은 이제 수업시간에 종종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항상 울고 있었어요. 늘 텅 빈 눈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마음속으로 울고 있다는 걸.”

 

…….”

 

어머니는 날마다 나를 때렸어요.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지고, 몸에 상처가 생길 때까지 나를 때렸죠.”

 

다섯 살 어린 서란이 보기에도 알 수 있었던 어머니의 슬픔. 대체 무엇이 그리 슬프고, 억울해서일까. 그렇게 매일을 울고 또 울어야 했던 한 사람이 어찌해서 자신의 딸에게 독을 먹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 이유를 서란은 피에드르에게, 아니, 경제학이라는 학문에 묻고 있었다.

 

정말 모든 상황은 물질에 의해 좌우되나요? 사람이든, 시대이든?

 

물론, 사람도, 시대도, 그리고 천하도 물질에 의해서만 좌우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돈이든, 권력이든, 재화든 커다란 흐름을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그 흐름을 좌우하는 것은 언제나 사람일 테니까.

 

그러나 피에드르는 그 말을 애써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아무리 한씨가의 후계라 하나, 서란은 열한 살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또한 사람과, 시대와, 천하를 고민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의 삶과 운명을 고민해야할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너는 내 수업을 통해 사람을 읽는 것을 배워라, 인간의 딸이여.’

 

피에드르는 인간의 딸이라는 말을 자꾸만 마음 속으로 되뇌며 책을 펼쳤다. 이번에 배울 내용은 은행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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