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7-2) "칼은 곧 마음"

이슬비 | 기사입력 2019/09/25 [10:39]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7-2) "칼은 곧 마음"

이슬비 | 입력 : 2019/09/25 [10:39]

<지난 글에 이어서>

무슨 짓이냐!”

 

너희들은 제화족이 아닌 것인가?”

 

그것은 어찌 묻는 것이냐.”

 

싸움으로 답을 묻고, 싸움으로 답을 구한다. 하니, 다툼과 겨룸, 전쟁, 그리고 대련이야말로 사람의 진심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이게 우리 제화족의 방식이니까.”

 

……?”

 

아무튼 나는 이미 우리 제화족의 방식대로 너희들에게 나의 진심을 증명했다. 내가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었다면, 아니, 약조를 지키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진즉 너희들을 죽였겠지. 굳이 익숙지 않은 발도술의 자세를 써가면서까지 너희들의 목숨을 해하지 않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나를 믿지 못한다는 것은 나의 불찰. 그러니 나는 삼백족 무사들의 방식대로 너희들에게 나의 진심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어느덧 은빛 달이 서쪽에서 떠올라 반짝이며 숲을 물들였다. 쏟아져 내려온 달빛에 검날이 반짝, 하고 빛났다. 서란은 검으로 귀 옆을 그었다. 귀고리에 매달린 홍옥참새가 발 치로 떨어져 내렸다.

 

칼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 가는 곳에 칼이 있고, 칼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나니. 하니, 무사의 마음이란 곧 칼이요, 무사의 칼이란 곧 마음이다.”

 

……!”

 

그러니 무사의 마음을 알고 싶거든 반드시 그와 검을 맞대보아라. 그러면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니.”

 

……!”

 

검을 잡은 손아귀의 힘, 그리고 검을 든 그의 눈빛과 숨소리, 검을 들고 움직이는 그의 걸음걸이, 검을 휘두르는 손가락과 손, 손목, 팔꿈치와 어깨, 검격을 따라 움직이는 온몸, 맞댄 검을 통해 전해져오는 떨림과 울음.’. 그 모든 칼의 울음.’”

 

……!”

 

그것이 바로 그의 마음일지니.”

 

여자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일순간, 여자의 고개가 푹 떨구어졌다. 그러나 여자는 곧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사가 아니다.”

 

어째서 너희들은 스스로 무사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지? 대체 무사라는 게 무엇이기에? 부모를 잘 만나 무가의 일원이 되어야만 무사인 것인가? 정말 그러한가?”

 

한서란!”

 

그래, 내 이름은 서란이다. 그리고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새벽의 광명이기도 하다.”

 

…….”

 

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너도 그것을 잘 알지 않나. 그래서 검을 잡은 것이지 않나. 그런데 어찌 스스로 무사가 아니라 하는가.”

 

여자의 눈빛이 조금 전보다 더 크게 흔들리는 것을 서란은 보았다. 이제 흔들리다 못해 일렁이는 눈동자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과 회한이 깃들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이윽고,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여자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나를 무사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그대가 오랜만이다.”

 

그런가? 그러면 무사를 무사라 부르지 무어라 부른다고.”

 

그대의 진심은 잘 보았다. 그러나 나 혼자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잠시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이 아이들과 의논해보겠다.”

 

그들이 서란에게서 등을 돌려 작은 소리로 웅성거리는 동안, 서란은 손에 쥔 검을 내려놓지 않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을 향해 휘둘러졌던 검의 손잡이를 꼭 쥔 서란의 손등에 불뚝, 퍼런 힘줄이 솟았다.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낮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숲의 공기와 하늘과 한데 뒤섞여 마치 별들이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다. 마치 별들의 속삭임에 대답하기라도 하듯이.

 

사랑했던 그대가 떠나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면

흩날리던 그 꽃잎 향기도

바래져가는구나

 

별빛이 하늘에 수놓이면

저 멀리서도 보일까

그리워 밤새워 불러보면

그대가 들을 수 있을까

 

꿈에서도 잊어본 적 없건만

평생을 간직할 그 약속을

수백 번을 헤어진다고 해도

그대 돌아온다고 꼭 돌아온다고

 

바람아 불어라

꽃잎 흔들어라

그 향기로 가득히 물들면

그리운 그대 내게 오는 길

또 찾아올 수 있게

 

노래를 부르는 서란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다. 마치 자신이 노래 속의 여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서란의 눈동자에 차오른 슬픔이 방울 져 뚝뚝 흘러내렸다. 서란은 문득, 유흔을 떠올렸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를, 박박 밀다시피 해서 삐죽삐죽한 밤톨 같은 짧은 머리를, 갸름한 눈매와 작은 눈동자를, 코 밑이며 턱이며 입가에 덥수룩하게 자란 까칠한 수염을, 그리고 자신을 화야라고 부르는 입술을.

 

한서란.”

 

서란을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만든 것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결정을 내린 것인지 여자가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새벽의 광명.”

 

그래, 내 이름은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다.”

 

여자가 서란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왔다. 서란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서란을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비화다. 제화족인지, 삼백족인지 나는 내 출신을 모른다. 내가 속했던 곳에는 그렇게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

 

어찌되었든 그대와 함께하게 된다면 나 또한 제화족이 되겠지. 그렇지 않은가?”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가 서란의 손을 밀어내 검을 치우게 했다. 서란이 검을 검집에 꽂자, 여자가 제화족 식으로 서란의 한 손을 끌어당겨 잡고 세차게 여러 번 흔들었다.

 

우리가 그대를 따르기로 하는 것은, 그대와 동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하는 것이지, 그대를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

 

또한 우리는 그대의 벗이 되어 생을 향한 그대의 여정에 함께 하겠다는 것이지, 그대를 주군으로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다.”

 

……!”

 

그러니 우리가 그대를 주인으로 모실 수 있도록, 주군으로 섬길 수 있도록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에게 보여주도록. 그리하여 우리가 그대를 사랑하게 되는 날, 우리는 그대를 주인으로 모시고, 주군으로 섬기며, 그대의 운명에 동참할 것이다.”

 

비화의 말에 서란은 손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흔과 보현 이외에 한씨가 내에서 만든 자신의 편이 생긴 것이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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