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1979년 있었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관계자들에게 무죄가 내려졌다. 지난 11월 15일 오전 11시 30분, 서울고등법원 403호 법정에서 40년 전인 1979년 11월 24일 일어났던 YWCA 위장 결혼 사건에 대한 재심에서 재판부(재판장 조용헌 부장판사)는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이 사건은 특히 2014년 당시 피고인들이 재심을 청구했는데, 5년이 지난 2019년 11월 15일 받아들여졌고, 받아들인 당일 무죄판결을 내린 이례적인 재판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전국계엄은 아니었지만 엄연히 서울은 계엄지역, 따라서 계엄사가 장악한 행정권하에서 허가를 얻어 집회를 여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에 민청협은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 저지 민주화 촉구대회’를 열기로 했다.
이 사건 주도자 중 1명인 김정택 목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민청협 회장인 이우회(현 출판인), 조성우(초대 민청협 회장), 홍성엽(당시 신랑), 강구철(사망), 양관수(현 오사카 경법대 교수) 등이 주축이었다.
신랑은 홍성엽 신부는 가상인물인 윤정민(보안사는 이를 거꾸로 하여 민정윤으로 해석, 윤보선의 민정을 추진하려 했다고 작명했음을 김정택 목사는 회고), 일시는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장소는 서울 명동 YWCA 1층 강당, 대회장 함석헌, 주례 박종태(전 공화당 국회의원) 등...
이렇게 철저하고 확실하게 위장한 결혼식의 신랑을 자임한 홍성엽 씨는 어머니를 설득 신랑 어머니 복장을 하게 했으며, 홍 씨의 여동생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장 결혼식은 당시 사회를 봤던 김 목사의 시작인사가 끝나자마자 경찰들이 난입, 난장판이 되었다고 김 목사는 회고했다.
이에 대해 그는 “신랑 홍성엽군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결혼식을 선포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대회 취지문이 낭독되었다. 취지문 낭독까지는 완료되었다. 이제 내가 구호를 선창할 차례다. 통대선거 저지한다. 거국내각 구성하라 하자 문이 부숴지는 소리, 책상이 부숴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소리로 장내는 곧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후 이들은 종로경찰서를 거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몽둥이로 개패듯 했으며 주먹과 구둣발로 분풀이를 하고는 취조실로 끌고 가서도 조사는 하지도 않고 서로 돌아가며 구둣발질, 주먹질, 여러 고문기구를 사용, 사정없이 온몸을 부숴뜨릴 것처럼 고문을 했다는 회고들을 당시 당사자들은 지금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같은 고문취조가 끝난 뒤 이들은 모두 군법회의에 기소되어 징역형 등 유죄를 선고 받고 영어의 몸이 되었다. 즉 이 사건으로 140명이 연행되어 양순직·박종태·백기완·임채정·이우회·최열·양관수·최민화·강구철·홍성엽·김정택·이상익·권진관·김윤환 등 14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윤보선·함석헌·김병걸·박종렬 등은 불구속 입건됐다. 이후 40년, 이들 중 사망한 사람도 있으며 운동권을 떠나 조용히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이 사건 주모자이자 애초 결혼식 사회를 자임했던 현 오사카 경법대 양관수 교수는 민주화운동 산 증인으로서 서울대에 입학한 지 36년 만인 2007년 2월 26일 서울대를 정식으로 졸업하게 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의 이 기록은 입학에서 졸업까지 서울대 사상 최장 기록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3번이나 제적되었다가 졸업하는 최초의 인사이기도 하다.
1971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복지학과에 입학, 그해 10월 박정희 정권의 위수령 선포에 맞선 반독재투쟁 교련반대투쟁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차 제적돼 강제징집 당했으며, 1974년 전역 후 복학했다가 1976년 10월 유신헌법 철폐, 유신독재 타도교내 집회 주동 혐의로 2차 제적됐다.
그리고 제적 중이던 시절인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을 주도해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적 학생 일률 복학 때 복적되어 학생신분은 회복했으나 감옥에서 석방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시 5.18 광주항쟁 후 그해 7월 3번째 제적 통지서가 감옥으로 날아 왔다고 한다. 사람은 감옥에 가둬두고 자기들끼리 학생신분을 만들었다가 다시 빼앗는 웃기는 일들까지 자행한 것이다.
1981년 3월 특사로 석방된 양 교수는 1982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까 시립대학에서 경제학 박사과정까지 수료, 일본 오사카 경법대학, 고려대, 성공회대 등에서 객원교수로 강단에 서기도 했으며 지금도 오사까 경법대 교수로 있다.
이 과정에서 양 교수는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선정돼 명예회복이 돼 서울대에 복학할 기회가 주어지자 2006년 50대의 나이에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해 마침내 졸업에까지 이른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졸업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이제는 다 돌아가셨지만 민주화운동 한다고 심려를 많이 끼쳐드린 부모님 묘소에 늦게나마라도 졸업장을 바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 중 이상익 복지관장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정리한 내용을 남겨 그 전문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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