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연재] 홍매지숙명-하망연(何茫然)(41-1) "하룻밤 몸정도 정인데"

이슬비 | 기사입력 2022/02/03 [10:23]

[무협연재] 홍매지숙명-하망연(何茫然)(41-1) "하룻밤 몸정도 정인데"

이슬비 | 입력 : 2022/02/03 [10:23]

<지난 글에 이어서>

술에 취해 치른 간밤의 일은 마치 꿈과 같았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통증과 귓가에 와 닿는 적연의 거친 숨, 그리고 온몸 구석구석에 지긋이 내려앉는 입술의 감촉이 이것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일깨워주었지만 동시에 온몸으로 번져나가는 열락이 이것이 꿈은 아닐까 하는 환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유흔. 유흔. 유흔.”

 

서란은 자꾸만 유흔을 불렀다. 서란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을 적연은 한동안 모른 채했다. 그러나 관계가 절정에 달하고 나서도 다른 사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는 모른 채 할 수 없었는지 적연의 손이 부드럽게 서란의 입술을 눌렀다.

 

적연입니다.”

 

…….”

 

유흔이 아니라 적연입니다.”

 

…….”

 

그분이 아가씨의 보호자이며 지지자이며 정혼자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잠자리에서마저 그분의 이름을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

 

하룻밤 인연도 인연이요, 하룻밤의 몸정도 정이니까요.”

 

…….”

 

그러니 제 이름을 불러주십시오.”

 

적연이 한 번 더 몸 안 깊은 곳을 파고들어 왔을 때부터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란은 그저 적연의 등을 더욱 더 꼭 끌어안으며 달뜬 신음을 토할 뿐이었다.

 

주무십시오.”

 

몇 번을 더 서란과 함께 절정을 맞이하고서야 적연은 서란을 놓아주었다. 까무룩 잠이 드는 서란의 귓가에 다정한 목소리를 들려주며 적연은 노래를 불렀다.

 

뜻이 맞아 두 허리 맞대고

다정스레 두 다리 들었다오

요리조리 흔드는 건 내가 할 테니,

깊게 얕게는 당신 마음대로요

 

난설헌의 시잖아. 노래는 그만 부르고 자자. 나 피곤해.”

 

서란은 마치 유흔에게 하듯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마치 유흔의 품을 파고들듯이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서란을 적연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다음날 아침, 서란은 다실에서 눈을 떴다.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을 끌어안고 잠이 든 적연의 알몸을 보는 순간,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일단은 빨리 나가야겠다.’

 

서란은 조용히 적연의 품에서 빠져나와 옷을 찾았다. 그러나 곧 적연의 팔이 서란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이불 속으로 끌어당겼다.

 

벌써 가시려고요?”

 

. 가야 돼.”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하룻밤 인연도 인연이고, 몸정도 정이라고요. 그런데 어찌 이리 야속하게 저만 버려두고 가십니까.”

 

적연의 입술이 서란의 입술에 와 닿았다. 서란은 자신의 입술을 삼키고 호흡마저 삼켜버리는 적연의 속도를 따라가느라 미처 코로 숨을 내쉴 여유조차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서야 적연에게서 풀려난 서란은 호흡을 정돈하며 적연을 흘겨보았다.

 

많은 것을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딱 어젯밤처럼만 있어주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아침부터 나를 안겠다고?”

 

,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까?”

 

당연히 그렇지.”

 

서란은 가볍게 대꾸하고 옷을 주워 입었다. 적연이 흠, 하는 콧소리와 함께 서란의 옷을 단정히 여며주었다.

 

아무리 노류장화(路柳墻花)라도 한 번 손에 넣으면 쉬이 놓지 않는 것이 사람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이가 하룻밤 인연을 맺은 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지요.”

 

기생에게 하룻밤 따위는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던가. 기생과 하룻밤을 보내고 그 이후에도 그와 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으나 그것은 그저 희망사항일 뿐. 기생들은 하룻밤을 보낸 인연 따위 돌아보지 않았고, 자신에게 구애하는 수많은 이들 중 가장 나은 조건을 제시하는 이에게 또다시 하룻밤을 허락할 뿐이었다. , 개중에는 하룻밤을 보내고도 그 인연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권력, 지위가 욕심나서일 뿐 그 관계에 사랑이니 정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물론, 저 같은 기생에게 있어 아가씨의 권력이나 지위는 매력적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아가씨께서는 아직 확정후계도 아니시지 않습니까. 더구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방계 출신의 제2후계이시고요.”

 

적연의 말에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하다못해 기생마저 자신의 처지를 되새기게 해주는구나 싶어 서란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 아가씨의 권력이나 지위는 현재 사상누각이나 마찬가지인 것이지요. 그런 권력이나 지위가 기생인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나와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건데?”

 

인연을 이어가겠다 말씀드린 적은 없을 텐데요.”

 

……?”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좋은 친구가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그렇게 해보고 싶다 그것뿐이니까요.”

 

서란은 적연의 설득에 못 이겨 그와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말린 연어를 넣고 끓인 맑은 국과 밀가루전병을 먹으며 서란은 말했다.

 

제화족 음식을 잘 먹는구나.”

 

절반은 제화족이니까요.”

 

절반은 제화족이라고?”

 

아버지는 제화족 출신의 기방 노예, 어머니는 삼백족 출신의 기방 시종. 그러니 제가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어떻게 해서든지 기생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깨너머로 재예(才藝)를 익히고, 평범한 이와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하는 동기(童妓)들을 제 손으로 잡아다 바치고 더러는 직접 죽이며 그 자리를 차지했지요.”

 

…….”

 

마치 후계혈전이 있는 가문의 별 볼일 없는 후계가 제 형제자매를 죽여가면서 확정후계의 자리에 오르는 것처럼요.”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은 높이 올라간다는 것. 아니, 살아남는다는 것은 높이 올라간다는 것. 아니, 높이 올라간다는 것은 곧 살아남는다는 것. 자신과 눈앞의 기생의 삶이 별반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 산다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은 칼 위에서 춤추고,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생각하면서도 차마 죽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언제나 그런 것이지요.”

 

…….”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 산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이 칼 위에서 춤추지 않는다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생각하면서도 차마 죽지 못하고 사는 이들이 없다면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그렇기에 삶은 가장 잔혹한 투쟁이고 위태로운 외줄타기이나 그로 인해 그 의미를 갖는 것이지요.”

 

아침을 먹고 서란은 적연의 안내를 받아 신씨가의 별관으로 향했다. 신씨가의 귀한 손님들을 위한 곳이라는 설명을 뒤로 하고 서란은 별관을 중심으로 마치 분지처럼 조성된 정원을 눈으로 한 번 둘러보았다. 세 개의 인공 산이 가운데에 있는 별관을 둘러싼 가운데 산봉우리마다 인공폭포수가 흘러내려 하나의 커다란 연못을 이루고 있었다.

 

가시지요.”

 

언제 준비해온 것인지 적연이 붉은 양산을 펼쳤다. 햇볕이 그렇게 뜨겁지도 않은데 굳이 양산까지는 필요 없다며 자꾸만 양산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서란을 붙잡으며 적연은 후후, 하고 웃었다.

 

이 정원을 보고 느껴지는 것이 없으십니까?”

 

?”

 

이 정원은 오래 전에 사라진 해이안교 시대의 양식입니다. 지금은 황궁에나 가야 볼 수 있지요.”

 

그런데?”

 

해이안교의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는 아가씨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남녀 간의 상열지사가 그 어떤 것보다 으뜸으로 취급받았던 시대였지요. 그러니 해이안교 시대의 양식으로 조성된 정원에 남녀가 단 둘이 왔다면 나란히 걸으며 나들이하는 흉내를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서란은 웃으며 적연의 손을 잡고 연못 위에 놓인 나무다리를 건넜다. 정원의 입구에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여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가면 나오는 인공섬에 있는 건물이 별관인 모양이었다. 서란은 연못 위를 장식한 등들을 바라보았다. 적연은 밤이 되면 저 수많은 등들을 일제히 밝혀 연못 일대가 별천지처럼 장관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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