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꽃잎 하나가 유흔의 눈 위로 떨어졌다"

[연재 무협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꽃이 시들어도'(9-1)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6/11 [11:40]

"툭, 꽃잎 하나가 유흔의 눈 위로 떨어졌다"

[연재 무협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꽃이 시들어도'(9-1)

이슬비 | 입력 : 2017/06/11 [11:40]

제9장 꽃이 시들어도(9-1)

 

<지난 글 8장에 이어> 유흔이 한씨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무렵에는 저택 안에 기괴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때는 이른 저녁이었건만, 이른 저녁의 평온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침묵은, 흡사 무덤 안에라도 들어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살랑.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유흔은 고개를 돌렸다. 붉은 꽃잎들이 서서히 유흔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유흔은 문득, 꽃잎들이 날아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 꽃잎 하나가 유흔의 눈 위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살랑, 하고 불어오던 바람도 뚝, 멎었다.
 
봄도 아니련만 웬 꽃잎들이 이리 떨어질까…….”
 
눈 위에 떨어진 꽃잎을 떼어내다 말고, 유흔은 고개를 들어 누각 위를 바라보았다. 유흔의 어머니인 36대 가주 하윤이 세운 누각 위에는, 하얀 옷을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창백한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너는 유란이가 아니냐? 대체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것이야.”
 
초가을이라 그런지,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날씨였다. 그런데 유란은 대체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것인지, 파래진 입술을 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조금씩 떨고 있었다.
 
쯧쯧쯧. 대체 언제부터 나와 있었냐는대도. 얼마나 서 있었기에 그리 다리를…….”
 
말을 하다 말고, 유흔은 심상치 않은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서란을 해하려 하고 유폐되었던 그날 이후로, 유란은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도 않았고, 일부러 자신의 눈에 띄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따금 먼발치에서 자신과 서란을 바라볼 뿐.
 
그런데 그런 유란이 지금 일부러 자신의 눈에 띄는 곳에서,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흔은 눈을 감고, 다시 한 번 저택에 내려앉은 침묵에 귀를 기울였다.


저택 안에 내려앉은 침묵은 마치 수도인 고도가 있는 구주섬에서 소멸되지 않은 태풍이, 이곳 북해도에 상륙하기 며칠 전에 느껴지는 적막과도 같았다.
 
아가씨, 이제 그만 처소로 돌아가셔야지요.”
 
유란의 뒤에 선 시종이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유란은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시종의 손을 떼어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 있기에 저택이 이리 조용한 것이야.”


그것이…….”


오라버니.”
 
오랜만이었다, 유란이 유흔의 앞에서 입을 연 것은. 시종의 말을 자른 유란이 다시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


.”


……?”


가서 말려.”


……?”


가서 말려. 언니든 서란이든 가서 말려. 오라버니는 할 수 있잖아.”
 
그제야 유흔은 유란이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유란이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가주의 집무실이었다.
 

 
가주의 집무실 안에는 두 여인이 마주 앉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한 여인과 한 계집아이가 마주 앉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여인을 모시던 시종들과 호위들, 그리고 계집아이를 모시던 시종들과 호위들은 모두 일찌감치 장지문 밖으로 물러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계집아이와 방 안에 마주 앉은 여인의 손에 들린 찻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인의 손가락은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계집아이는 여인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듯이, 여인의 입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여인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옷에 달고 있는 노리개를 매만졌다. 제화족의 복식과는 달리, 백금으로 만든 장식줄과 단추로 앞자락을 여미게 되어 있는 아이의 포에는 역시, 제화족의 복식에는 어울리지 않는 은장도가 장식줄로 허리에 묶여 있었고, 앞자락을 여민 백금 단추에는 진주노리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마를 입고 있구나.”
 
경멸이 섞인 가주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서란은 이런 반응쯤이야 미리 예상했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잡고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예쁘지요?”
 
마치 새 옷을 자랑하는 어린아이처럼 보이려는 그 모습에 정옥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 하고 웃고 말았다. 동생인 유란이 삼백족의 복식을 즐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딸은 삼백족도 아닌, 구하의 소수민족 중 하나라는 먀오족의 복식을 즐기다니. 정옥은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시종들을 닦달할 뿐이었다.
 
거기 밖에서 엿듣고 있는 연놈들! 네놈들이 그러고도 한씨가의 시종이라 할 수 있더냐? 어찌 시종이라는 것들이 문 밖에서 고개만 조아리고 있어! 어서 일어나지 못할까! 호위들은 무얼 하느냐! 즉시 일어나지 않고 꾸물거리고 있는 것들의 무릎을 자르지 않고!”

기쁘시지요?”
 
가주의 진노 사이로, 서란의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정옥은 퍼뜩 놀라, 서란을 돌아보았다. 마치 정옥의 의중을 모두 읽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이, 서란의 얼굴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제가 먀오족의 문화에 빠져들었다 생각하니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시겠지요?”


이년이……!’
 
정옥은 밑으로 손을 내려 검은 포 자락을 꽉 말아 쥐었다. 자신의 의중을 읽힌 것에 대한 낭패감과, 고작 저런 계집아이가 자신의 의중을 읽을 때까지 방심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분로로 정옥의 손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제 어머니가 그랬었지요? 후계혈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삼백족의 풍습에 빠져들어 삼백족의 옷을 입고, 머리를 하였지요.”


그래. 그것이 무어 어쨌다는 것이냐?”


그 덕이 아닙니까.”


무엇이 말이냐?”


제 어머니가 삼백족의 옷을 입고, 머리를 하였던 일 때문에 지금, 이모님께서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이모님께서 가주의 자리에 오르고, 저의 양어머니가 되신 것은, 따지고 보면 모두 제 어머니의 덕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란은 백금 장식단추에 달린 노리개를 만지작거렸다. 백금으로 만든 초승달 장식의 한가운데에 커다란 진주알이 박힌 노리개는 유흔이 사다 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여 또한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자여. 서란의 입에서 불린 이름에 정옥은 자신도 모르게 찻잔을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 바람에 찻잔이 부서지고, 정옥의 하얀 손에는 찻잔 조각이 박혀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네 지금 뭐라 하였느냐? 자여?”


, 그렇습니다만.”
 
짜악!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과 함께, 서란의 오른쪽 뺨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서란은 붉어진 뺨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서란은 시종을 불러 바닥에 떨어진 머리장식을 줍게 하였다. 은으로 만든 매화비녀와, 진주뒤꽂이, 그리고 청옥으로 만든 나비 뒤꽂이 또한 모두 유흔이 사다 준 것이었다. 서란은 장식들을 머리에 하나하나 꽂으며 정옥을 바라보았다.
 
제가 자여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싫으시겠지요. 하나, 제가 자여보다 언니인데, 자여에게 공주님, 공주님 하며 공대를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었다. 정옥은 서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음을 인정하며,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다음 글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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