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양녀로 맞고싶다고 받아들이면 됩니까"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그대를 잊은적 없다'(12-2)

이슬비 | 기사입력 2017/10/09 [08:14]

"저를 양녀로 맞고싶다고 받아들이면 됩니까"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그대를 잊은적 없다'(12-2)

이슬비 | 입력 : 2017/10/09 [08:14]

제12장 그대를 잊은 적 없다(2)

 

서란은 물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고, 목소리를 높였다.
 
들라 해라.” 

그러나 방문이 열리고 시종이 안으로 들어서자, 서란은 반가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다름 아닌, 서란이 고도의 노예경매시장에서 데려온 삼백족 소년 보현으로, 한씨가 내에서 유흔 외에 서란의 편인 사람이었다.

 

보현!”

 

서란은 제화족 식으로 보현의 한 손을 양손으로 잡고 세 번 흔든 다음, 두 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보현은 그런 서란을 더욱 더 꼭 끌어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쩐 일로 왔느냐고 안 물어보세요?”

 

보현은 자신의 허리에 감긴 서란의 두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 무릎을 살짝 굽혀 서란과 눈을 맞추었다. 아무리 한씨가의 시종과 아가씨의 관계라고 하나, 보현은 자신보다 세 살 어린 서란이 어딘지 모르게 동생처럼 느껴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보현은 내 거잖아. 그러니까 나한테 독 같은 거 가져왔을 리가 없잖아.”

 

아가씨…….”

 

보현은 유흔을 통해, 서란의 어머니 유란이 서란에게 독을 먹였던 일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또한 보현은 그로 인해, 어머니 유란에 대한 서란의 공포감이 극대화되었음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다.

 

아가씨.”

 

보현은 가만히 서란을 불렀다. 서란의 검은 눈에 보현이 오롯이 담겨 맑게 비치고 있었다. 보현은 다시 한 번 미소를 지으며, 서란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보현……?”

 

제가 아가씨께 독을 가져다 드릴 일은 없어요.”

 

…….”

 

만약에, 유란님께서 아가씨께 독을 보내신다면, 그 독, 제가 마실게요.”

 

보현……?”

 

아가씨께서 그러셨잖아요. 저는 아가씨의 것이라고. 하니, 아가씨는 저의 모든 것이기도 해요. 그런 아가씨께서 독을 드시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제가 그 독을 마시고 죽는 것이 백 번, 천 번 낫지 않겠어요.”

 

이야기가 지나치게 무거웠던 것일까. 어느덧, 방 안에는 침잠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침묵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어 보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보현이 품 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 서란에게 건네주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

 

서란은 네 글자로 적혀 있는 책제목을 쓰다듬었다. 금오신화. 사비국에서 최초로 쓰여진 소설집으로, 읽을거리라고는 양반들이 읽는 시집과 유교 경전이 전부인 사비국에서, 설공찬전과 더불어, 서민들의 읽을거리가 되어주는 얼마 없는 책이라고 하였다.

 

서란은 책 표지를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책에 실린 짧은 소설들을 하나하나 읽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란은 책의 첫 꼭지에 등장하는 만복사저포기(萬 福 寺 樗 蒲 記)’를 모두 읽고, 두 번째 꼭지에 등장하는 이생규장전(李 生 窺 墻 傳)’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때였다, 문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아가씨, 운한 마님께서 드셨습니다.”

 

서란은 책을 덮고, 침상에 쳐져 있는 연푸른색 휘장 뒤로 보현을 숨겼다.

자신이 열 살이 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던 이모부가 자신을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로 자신을 찾아온 걸까 생각하면서도, 서란은 면경을 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셨습니까, 이모부님.”

 

서란은 손을 양옆으로 늘어뜨리고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본래, 가주의 부군에게는 한쪽 무릎을 살짝 굽히며 허리를 숙여야 했지만, 운한 같은 첩실에게는 가문 내의 다른 손윗사람을 대할 때와 같은 방법으로 예를 표하면 될 뿐이었다.

 

서란은 숙였던 허리를 곧게 펴고 운한을 바라보았다. 그러한 서란을 살피는 운한의 눈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요즘 무엇을 공부하고 있느냐?”

 

어인 일로 저의 학업에 관한 것을 물으시는지요?”

 

. 도리어 돌아온 질문에 운한은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조카에게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이런 질문이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었다. 그러나 운한에게는 그러한 사실보다도, ‘감히, 후계 작위조차 박탈당한 광인의 여식 따위가 자신의 말에 순순히 대답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당혹감이 더 중요할 뿐이었다.

 

불손하구나. 너는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가주님의 정실부군이었다 하더라도 이리 불손하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

 

못 할 것은 또 무엇입니까.”

 

서란의 말에 운한은 다시 한 번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운한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유흔을 돌아보았다. 과연 이 아이를 양녀로 맞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겠느냐는 듯한 그 눈길을 서란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따라오고 있음을, 운한은 미처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모부님.”

 

서란이 운한을 불렀다. 운한과 유흔의 눈길이 일제히 서란의 입가로 향했다. 서란은 마치 가화전의 초옥이 죽음을 향해 갈 때와 같은 침잠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금 저의 학업에 대해 물으시는 것의 저의에 대해, 저를 양녀로 맞고 싶다 그리 받아들여도 되는 것입니까?”

 

 

서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의 공기는 급격하게 얼어붙었다. 싸늘하다 못해, 방 안에 흐르는 냉기가 고드름이 되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차가움에, 침상 뒤에 숨은 보현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서란을 따라 가유에 온 뒤로, 적어도 두세 번은 겪은 혹독한 겨울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았던 보현이었다. 그러나 이 방 안의 공기 속에 계속 있다가는 정말 얼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에, 보현은 침상 옆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 위에 가슴을 파묻었다.

 

유흔.”

 

서란이 유흔을 불렀다. 유흔을 부르는 서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딱딱하고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유흔이 대답해봐. 지금 이모부님께서 내 학업에 대해 물으시는 것에 대해, 나를 이모부님의 양녀로 맞이하고 싶다, 그렇게 해석해도 돼?”

 

그러나 서란은 유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서란은 유흔이 매달아준 은장도노리개를 풀어 손가락 끝으로 잡고, 허공에서 달랑달랑 흔들었다.

 

제가 유흔과 함께 고도에 갔을 때,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본 적이 있지요. 노예경매시장의 한 쪽에서 시종이나 유모, 보모가 되기 위해 나온 이들이 목에 나무 팻말을 걸고 서 있더이다. 그 팻말들에는 하나같이 자신이 좋은 시종이나 유모, 보모가 될 수 있는 이유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더군요.”

 

……?”

 

그런데 그것을 보고도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고 싶었는지, 읍루씨가의 여식 하나가 동기였던 이, 한 사람에게 가무를 선보이라 그리 말하더군요.”

 

……?”

 

아마 그이에게는 적지 않은 모멸감을 주는 언사였을 겁니다. 본래, 기생들은 자신이 춤 출 곳은 자신이 정하는 법이니까요.”

 

서란은 운한의 앞으로 한 발자국씩 다가갔다. 마침내 운한의 코앞까지 이른 서란은, 운한을 올려다보며 비소(誹笑)를 지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저는 이모부님의 양녀가 되지 않겠습니다. 제가 굳이, 읍루씨가의 여식에게 가무를 선보여야 했던 그이처럼, 저의 학업의 정도를 이모부님께 선보여 모멸감을 얻을 이유도,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 하겠으니까요.”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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