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6-2), "회자 정리..."

이슬비 | 기사입력 2019/08/30 [10:08]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6-2), "회자 정리..."

이슬비 | 입력 : 2019/08/30 [10:08]

<지난 글에 이어서>    

 

다음날 아침, 살롱에는 피에드르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약속을 지키려는 것인지, 한눈에 보기에도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보여지는 그의 모습을 보자 서란은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져 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군요.”

 

서란이 알은 채를 하며 다가가자 피에드르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다리겠다 했으니까요.”

 

언제부터 나와 있었던 건가요?”

 

얼마 안 되었어요. 한 시진쯤?”

 

이제는 시진이라는 개념에도 익숙해져버린 그의 모습은 원래부터 부상국 사람이었다 해도 좋을 만큼 부상국에 동화되어 있었다. 서양의 셔츠와 더블린보다 삼백족의 좁은 포나 제화족의 넓은 포가 잘 어울릴 것 같은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서란은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다시 찾은 것 같은 기시감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떠나는 것이 섭섭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한데요.”

 

서란의 말에 피에드르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회자는 정리하고, 거자는 필반한다며 대승의 연기설을 이야기하는 그는 서양인답지 않게 불교에도 조예가 깊은 듯했다.

 

회자는 정리하고, 거자는 필반한다라. 한 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지기 마련이고, 떠난 자는 다시 돌아오기 마련이니 당신과의 이별을 너무 슬퍼하지 말라는 뜻이겠군요.”

 

피에드르가 테이블에 기대 세워두었던 무언가를 서란에게 내밀었다. 비단 보자기로 소중히 감싸여진 그것은 모양으로 보면 삼현금 같기도 했고, 당비파 같기도 하였다.

 

……?”

 

풀어보시지요.”

 

보자기를 풀자 안에서 현악기 하나가 나왔다. 얼핏 보면 삼현금과 닮았으나 현의 수가 더 많은 것이 삼현금은 아니었고, 또 어찌 보면 당비파와 닮았으나 현을 감은 곳이 뒤로 구부러져 있는 것이 당비파는 아니었다.

 

류트라는 악기입니다.”

 

피에드르가 악기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서란은 악기의 이름을 되물었다.

 

류트요?”

 

, 본래 아랍의 악기였으나, 콘스탄티노플을 통해 유럽에도 전해져 큰 인기를 끌고 있지요.”

 

서란은 악기의 현 하나를 튕겨보았다. , 하고 맑고도 울림이 좋은 소리가 났다.

 

주법을 가르쳐드리고 싶지만 제가 떠나야 해서 가르쳐드릴 시간이 없는 점을 이해해주십시오.”

 

이 악기의 주법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습니까?”

 

이곳에는 상인들의 향수(鄕 愁)를 달래기 위한 유랑악사들이 와 있습니다. 그들은 만돌린이나 류트를 기본으로 다룰 줄 아니, 그들을 수소문해보시면 주법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피에드르가 떠나고, 서란은 류트의 주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뭇크리를 익히는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고, 다음해가 다가올 때쯤 서란은 류트를 익숙하게 켤 수 있게 되었다.

 

사랑했던 그대가 떠나고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면

흩날리던 그 꽃잎 향기도

바래져가는구나

 

별빛이 하늘에 수놓이면

저 멀리서도 보일까

그리워 밤새워 불러보면

그대가 들을 수 있을까

 

꿈에서도 잊어본 적 없었던

평생을 간직할 그 약속을

수백 번을 헤어진다고 해도

그대 돌아온다고 꼭 돌아온다고

 

세월이 흘러, 서란은 어느덧 열네 살이 되었다. 그리고 자여는 열두 살이 되었고, 이제 서란과 자여의 후계 경쟁도 본격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란은 벌써 며칠째 방 안에 틀어박혀 사랑노래를 완성할 뿐이었고, 어찌 된 일인지 유흔 또한 그런 서란을 그저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여 쪽 동향은?”

 

유흔이 자여 쪽에 심어둔 시종들과 시녀들, 그리고 시위들과 노예들이 서란에게 자여의 일거수일투족을 전해왔다. 서란은 자여가 가문 내의 사람들과 다과를 함께 하고, 다른 무가의 후계들에게도 다과를 함께 하자며 초청장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태연히 류트만 켤 뿐이었다.

 

아가씨는 걱정도 되지 않으십니까?”

 

보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지만 서란은 글쎄하는 애매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서란이 또다시 류트에 빠져 며칠이 더 지나자, 유흔마저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류트는 그만 켜고 사람들을 만날 생각부터 하라고 잔소리를 해댔고, 서란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유흔, 기억하지?”

 

?”

 

내 찻잔에 독을 넣었던 춘심이라는 시녀의 배후에 있었던 사람이 그 멍청한 추을이었다는 거.”

 

서란의 말에 유흔은 깜짝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도자기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고, 찻물이 탁자에 덮인 비단보와 자신의 포 자락을 적셨지만 유흔은 시종을 불러 그것들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란의 입가를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그 표정은? 유흔, 유흔은 지금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서란의 가는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 가늘기는 하나, 검과 현을 잡아 여기저기 굳은살과 못이 박인 손에는 군데군데 진물이 흐른 흔적도 남아 있었다.

 

, 설마…….”

 

그래, 나는 추을이 나를 죽이려 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가 내게 칼이나 독을 쓰는 순간, 나는 모든 정황을 모아 그를 압박할 거야. 아무리 방계라 하나 한씨가의 2후계인 자를 해하려 하였으니 금족령 정도는 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그때 나는 공가에 손을 내밀 거야. 바로 상씨가에.”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서란의 손가락을 꼭 끌어당겨 뺨 위에 가져다대었다. 이제는 자신과 부상국을 둘러싼 정세와 그에 얽힌 권모술수들을 파악할 정도까지 성장한 서란이 대견하다 못해 자랑스러웠다.

 

도박이야, 화야. 너도 알지?”

 

이 세상에 도박 아닌 권모술수가 어디 있다고.”

 

걱정스럽게 던진 말에도 서란은 그저 가볍게 대꾸할 뿐이었다. 유흔은 서란을 품 안에 감싸 안으려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작년 겨울에 초경을 흘리고 성숙하기 시작한 서란을 품에 안으려니 어딘지 모르게 어떠한 이질감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유흔, 내가 이번 도박에 성공하고 나면 꼭 가락지 사줘야해. 알겠지?”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힘을 잃었다 하나, 공가의 권위는 아직도 무가보다 높았고, 그런 만큼 공가가 지지하는 후계는 무가가 지지하는 후계보다 더 많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한 일련의 상황을 감안하여 이번 수를 생각해낸 서란이 유흔은 몹시 자랑스러웠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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