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7-1) '지잉' 현이 울다

이슬비 | 기사입력 2019/09/09 [10:40]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7-1) '지잉' 현이 울다

이슬비 | 입력 : 2019/09/09 [10:40]

<지난 글에 이어서>

지잉 지잉. 현이 울었다. 질긴 명주실로 된 류트의 현은 서란이 뜯고, 튕기고, 누르고, 비틀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로 화답하며 울었고, 서란은 허공에 공명하는 현들의 울음소리를 따라 다음 소리를 찾아 현 위를 바삐 뛰어놀았다.

 

하아.”

 

지금 그녀가 있는 곳은 깊은 숲 속이었다. 겨울이 길고 혹독한 북해도답게, 잎이 가늘고 촘촘한 침엽수들이 가득 들어차 있는 이곳은 해가 기운지 오래였고, 이제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도, 들짐승들의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현들의 울음소리뿐. 서란은 한동안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현의 울음소리에 집중했다.

 

이모부가 자신을 죽이려 마음먹은 날이 오늘임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는 추을은 충분히 그럴 사람이었고, 후계경쟁이 본격화된 만큼 자신의 존재에 위협을 느낄 것이었다. 더구나 윤희가 오래 전에 죽어나자빠진 상황에서 남은 딸마저 잃을 수 없기에 더욱 더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리라.

 

서란은 현을 뜯는 내내 주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은 사위가 잠잠한 것이 큰 움직임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공기 중의 파장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서란은 눈치 채고 있었다.

 

아직이야.’

 

그들이 다가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파장의 떨림으로 보건대, 그들의 숫자는 열 명 남짓이었다. 아니, 열 명이라고 보기에는 뭔가가 이상했다. 공기 중의 파장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것으로 볼 때 이제 남는 숫자는 대여섯이라고 해야 하려나.

 

유흔이 그리 무서운가.’

 

한씨가의 후계라 하나 이름뿐인 후계일 뿐. 가주의 직계도 아닌 방계, 그것도 후계의 작위마저 빼앗긴 광인의 딸 따위를 죽이는 일 치고는 많은 금액을 제시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겁을 먹고 빠져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유흔을 두려워해서이리라.

 

서란은 류트의 울림통을 톡톡 두드렸다. 담요 위에 가만히 앉아서 류트나 뜯으며 그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의 고통과 괴로움에 봉성을 나와

푸른 버들이 우거진 연화루 아래에서

술잔을 앞에 놓고 이별가를 불러보지만

지금은 남남, 다시 만나기는 틀렸네……

꿈을 잘 꾸어 찾아뵈려 하나

그런 꿈을 꾸기도 어려우니

지금의 이 심정 그 뉘가 있어 알리

침상 앞에서 울다보니 창 밖에 비가 내리는데

창을 두드리며 빗방울과 눈물방울이 새벽까지 이어지네

 

구하의 북송의 여시인 섭승경이 지은 자고천별정을 부르며 서란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제 슬슬 그들이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왔구나.’

 

이제 슬슬 손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서란은 류트를 내려놓고 검을 들었다. 오늘의 목표는 그들을 죽이는 것이 아닌 만큼, 각오를 단단히 할 필요가 있었다. 아직 서란에게는 살리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어려웠다.

 

서란은 검을 뒤로 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간 삼백족 무사들과 교류하며 배운 발도술의 자세였다. 대여섯 자루의 검이 서란을 향해 다가들었다. 서란은 검집에서 검날을 빼며 칼등으로 그것들을 받아내었다.

 

, 그냥 본국검을 쓸 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이미 그 검법으로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어서 말이야.”

 

작년부터 자여의 시종장 레이라가 걸핏하면 자신을 죽이려 드는 통에 이제는 살인이라는 개념마저 희미해진 터였다. 서란은 검들을 올려치며 오른 발을 축으로 삼아 원을 그리면서 한 바퀴 돌았다. 이제 다시 본국검법을 사용할 때였다. 물론, 지금 검을 맞대고 있는 자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조금 전보다 몇 배의 노력을 들여야 할 테지만.

 

서란은 방금 전의 자세를 본국검법의 내략처럼 사용해 검세를 금계독립세로 전환했다. 받아낸 검들을 밀어내며 뒤를 향하여 왼 무릎이 직각이 되게 한 후, 검을 오른쪽 어깨에 가져다대며 앞의 한 명의 몸통을 아래에서 위로 길게 그었다.

 

한 명.’

 

서란은 다시 아까의 자세를 응용해 금계독립세 다음의 검세인 후일격세를 취했다. 들었던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고 오른발을 한 발 앞으로 내면서 뒤를 치는 자세와 함께 서란은 또다시 한 명의 목 옆부터 옆구리까지를 길게 베었다. 남은 이들이 주춤거리며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하긴, 제화족 무가인 한씨가의 후계가 사비국의 검법을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서란은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이제 본국검법의 연속세인 제6세부터 18세까지로 검세를 전환해야 할 때였다.

 

추을인가?”

 

서란은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가 재빨리 오른쪽 어깨에 검을 가져다댔다. 그 틈에 남은 검들이 서란의 배와 가슴을 노리고 다가왔으나 서란은 그 검들을 거둬내며 한 명의 손목을 베어 검을 떨어뜨리고, 또 한 명의 가슴팍을 베었다. 그리고 왼발을 들고 왼쪽으로 원을 그려 돌아, 앞을 향하는 자세로 남은 이들의 가슴과 복부를 가로로 베었다.

 

추을 맞지?”

 

서란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물었다. 유흔이 새로 지어준 옷인데 피가 튀었을지 모르겠다며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펴본 서란은 검을 손 안에서 휙힉 돌렸다.

 

너희들이나 나나 피차 추을 때문에 여기 오게 된 것 같은데, 우리 서로 얘기나 하지. , 다 알다시피 내 이름은 한서란이야. 너희들은 이름이 뭐지?”

 

…….”

 

대답이 없군. 그러면 추을에게서 얼마씩 받기로 한 거야? 보증금 한 사람당 은 열 냥에, 성공할 경우 한 사람 당 은 천 냥을 더 받기로 했나? 그렇지?”

 

서란의 말에, 가슴팍을 베인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마치 어떻게 알았냐고 묻는 듯한 그 태도에 서란은 하하, 하고 웃어버렸다.

 

너희들도 잘 알 텐데? 우리 한씨가에는 후계 혈전이라는 전통이 있다는 걸.”

 

그런데……?”

 

후계 혈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시종이나 시녀, 시위, 노예들을 자기 편으로 매수해놓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어. 나는 그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이고.”

 

서란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그들 앞에 내려놓았다.

 

, 여기에 각자 이름 적고 수인 찍어.”

 

이게 뭐지?”

 

계약서야. 내 시위가 되고, 나를 주인으로 따르겠다는 계약서.”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이 목젖까지 열어젖히고 큰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침엽수들이 빽빽이 들어찬 숲에는 한동안 여자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미친 자가 아닌가, 그 생각을 하고 있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자신을 죽이려던 이들을 시위로 삼아 곁에 두겠다니. 누가 보아도 자신이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건만, 서란은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어갔다.

 

보다시피 계약서는 내가 미리 준비해 왔으니 따로 계약서를 작성할 필요도 없잖아. 너희는 그저 이름만 적고 수인만 찍으면 돼.”

 

미쳤구나. 제대로 미쳤어. 어미나 딸이나 미친 것은 매한가지구나.”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서란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여자에게 다가가 먹통과 세필붓을 쥐어주었다.

 

계약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너희에게 나쁜 조건은 아니야. 너희가 나를 도와 추을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증명만 한다면, 나는 너희들은 물론, 너희들의 가족까지 보호해줄 거야.”

 

추을이 우리 가족들을 해하려 할 것이라는 말이냐?”

 

그야 빤한 일 아니겠어. 나를 죽이면 너희들은 용도가 다하는 거고, 그러면 당연히 그 다음 수순으로 너희들을 폐기했겠지. 그러나 너희가 나를 죽이지 못했으니 용도대로 쓰이지 못한 거고, 용도대로 쓰이지 못한 개새끼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잖아. 더구나 언제 자기 목덜미를 물어뜯을지 모르는 개새끼들을.”

 

그래, 그렇다고 치자. 너는 이 계약서에 우리와 우리 가족들의 신변에 대한 보호를 약속했다. 또한 음지에서 나와 양지에서 사는 길을 보장해줄 것 또한 약속했다.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람이란 본래,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문서로 약속해도 뒤통수를 치는 것이 사람이라는 족속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너를 믿을 수 있단 말이냐.”

 

서란은 검집에서 검을 빼내 자신을 향해 겨누었다. 순간, 그녀의 행동에 여자가 주춤하며 다시 검을 집어 들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슬비 오컬트무협소설 연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