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9-1) "유란의 눈물이"

이슬비 | 기사입력 2019/11/22 [10:23]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9-1) "유란의 눈물이"

이슬비 | 입력 : 2019/11/22 [10:23]

<지난 글에 이어서> 에메랄드와 터키석으로 만든 새 장식. 반쪽 새의 반쪽을 나누어 머리는 터키석으로, 몸통은 에메랄드로 만든 그 새는 비익조였다. 비익조(比 翼 鳥). 날개와 눈,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암수가 서로 짝을 이루지 않으면 날 수 없다는 그 새는 삼백족 사이에서는 사랑의 신으로 섬겨지고 있었다. 해서, 삼백족 사이에서는 부부의 사랑을 기원하며 혼례 전에 비익조 장식을 단 귀고리나 목걸이, 팔찌를 서로 교환하는 것이 예법이라 했다.

 

아무리 미쳐 있었다 하나, 한창 사랑에 대한 꿈을 꾸던 소녀였던 시절에 들은 이야기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유란은 유흔의 시종이 보냈다는 목걸이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목걸이는 서유흔한유흔이 되어 서씨가를 떠나올 때 유일하게 품에 지니고 올 수 있었던 그의 어머니의 유품 중 하나였다.

 

 

서씨에서 한씨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서씨도, 삼백족도 아니라는 뜻이었고, 동시에 이제 삼백족 서유흔은 죽고, 제화족 한유흔만 남아 있다는 뜻이어서, 유흔은 서씨가에서 입었던 옷가지 하나, 버선 한 짝 가지고 올 수 없었다고 했다.

 

그나마 그의 어머니가 된 하윤이 그런 유흔을 불쌍히 여겨 어머니의 유품 하나만은 가지고 올 수 있도록 허락했고, 유흔은 어머니의 혼인예물함을 챙겨 한씨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에 올랐다고 했다.

 

마차가 한씨가 저택에 당도한 순간부터 유흔은 한유흔이되, 한유흔이지 못했다. 한씨가순혈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타 가문 출신 양자나 양녀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심한 이곳에서 유흔은 다른 가문에 팔아넘길 수 있는유일한 남자 후계임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하지 못했다. 한씨가 아닌 자를 다른 가문과 연을 맺는데 사용할 가주나 차기 가주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하지만 유란은 유흔이 좋았다. 그저 오라버니가 있다는 것이 좋았고, 정옥 언니나 하연 언니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오라버니가 있어서 하루하루가 신이 났다. 물론, 후계혈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유란에게 있어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유흔 오라버니는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이었으므로.

 

오라버니.”

 

매일매일 오라버니를 따라다니며 함께 검술을 단련하고, 서책을 펴놓고 토론을 하고, 삼백족의 문화와 풍습,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삼백족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어느 날, 비익조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유란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나도 나중에 혼인할 때 산랑에게 비익조 줄래.”

 

유란아.”

 

? 너무 낭만적이잖아. 암수가 서로 짝을 이뤄야 날 수 있는 새. 그렇기에 서로를 애타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비익조처럼, 우리도 한평생 애태우며 사랑하자. 이 얼마나 멋진 일이야.”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유흔의 표정은 한없이 슬프기만 했다. 혼례 전에 서로 비익조를 주고받으며 영원한 사랑을 기원했던 부부. 정략혼으로 맺어졌으나 서로 사랑하게 되었던 부부. 서씨가의 24대 가주 서비랑과 그의 정실부인 섭녕아. 남편은 동생에게 살해당하고, 아내는 남편을 죽인 시동생의 강압에 못 이겨 칼로 제 목을 그어 남편을 따라가고. 자신의 아비어미였던 부부를 떠올리던 유흔은 슬픔을 이기지 못 하고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오라버니를 울린 것은 아닐까 당황해서 울지 말라 말하는 유란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유흔은 뭔가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 패물들은 모두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혼인예물로 준 것이라며 유흔은 패물 하나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한참을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비익조 장식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유란에게 유흔은 말했다. 그렇게 마음에 든다면 나중에 네 혼인선물로 주겠다고.

 

그러니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혼인도 하고, 이 목걸이도 받지.”

 

그러나 유란은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아니, 목숨은 살아남았으되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한 신세가 되어 마음만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삶을 살기를 햇수로 몇 년째이던가. 이쯤 되면 유란은 살아남지 못한 것이라 보아도 되지 않을까.

 

. 목걸이에 유란의 눈물이 떨어졌다.

 

오라버니…….”

 

후계혈전에서 패한 후계는 가문 내의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 되어 딸을 다음 대 혈전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렇기에 가문 내에서 정해주는 사람 이외에 다른 누구와도 동침해서는 안 되었다. 하지만 유란 자신은 어떠했던가. 가문 내에서 정해준 사람이 아닌 ’, 라아나를 택하지 않았던가.

 

내가 미치지 않은 걸 알고 있었던 거야?”

 

후계혈전의 제물을 생산하는 종마가 되고 싶지 않아서, 딸을 죽이고 싶지 않아서 유란은 미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미치는 길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후계혈전에서 패한 이후에, 그리고 라아나가 떠난 이후에 언니가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렸다고 여기도록 철저하게 광인행세를 하고 있었음을 오라버니가 알고 있었다니.

 

혼인선물로 받기로 했잖아. 그런데 왜 이걸 지금 주는 거야. 나는 한 번도 혼인한 적이 없잖아.”

 

여기까지 말하다 말고, 유란은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모계사회인 제화족의 풍습에서 시작되어 부상국의 보편적인 풍습으로 자리 잡은 주혼’. 그래, ‘주혼이 있지 않은가. 남녀가 연인관계가 되면 그것 또한 혼인으로 여겨서 남편과 아내로 인정해주는 풍습. 그렇다.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라아나와 주혼을 맺었고, 라아나는 자신의 남편이었다.

 

들어가도 되겠소?’

 

그와 주혼을 맺던 날 밤, 그가 자신의 방 밖에서 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유란은 자꾸만 무너지려는 허리를 애써 일으켜 세웠다.

 

라아나가 자신을 두고 떠났다 하여 그를 원망했었는데. 하지만 그가 떠날 것임을 알고도 그를 따라나서지 않은 것은 어쩌면 자신의 선택이었으리라. 그리고 어쩌면 후계혈전 당일에 삼백족의 옷을 입고 나선 것도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

 

가엾은 내 딸. 서란이.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새벽의 광명.”

 

서란을 유산하지 않고 낳은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선택이 아니었던가. 유란은 목걸이를 꼭 움켜쥐었다. 이제 자신이 광인행세를 그만두는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다가왔음을 유흔이 말해주고 있었다.

 

*

 

서란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시위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내려다보았다. 시위장의 피가 묻은 검날을 잠시 털어내어 피와 살점을 어느 정도 제거했다. 사람에게 검을 쓰는 순간, 검날에는 혈관과 힘줄, 신경, 뼈와 살이 같이 파고들어 피와 살점, 기름을 남기고, 이를 그대로 두면 날이 녹슬어버리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었다.

 

보지 말고, 듣지 말고, 말하지 마라. 세인들은 이것을 황궁에서 살아남는 법 내지는 후궁들이 지켜야할 법도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것은 피비린내 나는 암투가 벌어지는 곳 어디에서나 당분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

 

더구나 우리 한씨가 같이 후계들끼리 대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피에 굶주린 곳이라면.”

 

…….”

 

보아봤자 무얼 하나. 들어봤자 무얼 하나. 말해봤자 무얼 하나. 제 명줄만 재촉할 뿐인 것을.”

 

한참을 중얼거리던 서란이 시위 한 명의 목을 베었다. 몸통에서 목이 떨어져나가 연무장 바닥에 데구르르 굴렀다.

 

명줄을 재촉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당분간만 살아 있기도 싫다면 답은 하나야. 금지된 일을 하는 도박. 보고, 듣고, 말하는 것.”

 

…….”

 

그러나 그것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보고, 듣고, 말하는지에 따라 도박은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지. 너희는 그걸 명심했어야 했어.”

 

서란이 또다시 시위 한 사람의 목을 베었다. 다른 시위들이 몸을 떨며 일제히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고 이마를 짓찧기 시작했다.

 

아니, 다 차치하고라도, 너희들, 왜 한씨가에 후계혈전이 생겼는지는 알고 있지?”

 

…….”

 

후계 자격을 상실한 후계가 정당한 자격을 가진 후계를 공격하거나, 분쟁의사가 없는 후계가 지지자들의 준동에 휘말려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거나, 한 후계가 죽고 그 후계의 지지자들이 모두 제거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지.”

 

이 대목에서 서란은 비죽 웃었다. 후계 자격을 상실한 후계라. 그래, 그 후계란 바로 자신의 어머니 같은 후계를 말하는 것일 것이었다. 서란은 검날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찰캉, 하는 마찰음이 평소보다 더 무겁게 들렸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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