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2-2) "늑대어미"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4/29 [10:42]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2-2) "늑대어미"

이슬비 | 입력 : 2020/04/29 [10:42]

<지난 글에 이어서>

 

가주님을 뵙습니다.”

 

정옥의 앞에 선 그녀는 가주에 대한 예를 갖추고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정옥의 두 눈동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그녀는 애써 모른 채했다.

 

신수가 훤해졌구나.”

 

그 말씀 칭찬으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리 듣고 싶다면 그리 듣거라.”

 

두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시종들이 다과상을 들여오고, 정옥은 찻잔을 쥔 채로 입을 열었다.

 

너는 네 딸이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냐?”

 

살아남지 못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한씨가는 오직 직계에서 직계로 이어져온 유서 깊은 가문이다. 한데, 방계의 여식 따위가 감히 차기 가주의 자리를 넘보다니. 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너무 주제넘지 않으냐?”

 

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뼈가 있는 말에 유란은 그저 한 번 웃어보였다. 감히 자신에게 패배해서 후계 작위조차 박탈당하고 방계로 떨어진 광인의 딸이 자신의 딸이 차지해야 할 자리를 노린다는 것인가. 유란은 목에 걸린 비익조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었다.

 

하지만 직계에서 직계로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직계 후계들은 물론, 방계 여식들의 피가 흘렀지요.”

 

해서?”

 

그냥 그렇다는 것입니다.”

 

유란은 찻물로 입을 축였다. 후계혈전에서 사촌언니 하연이 죽는 것을 눈앞에서 본 뒤로, 친언니인 정옥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삼백족 속담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해내야만 할 것이었다. 유란은 두려움을 애써 감추며 천진한 목소리를 꾸며내어 말했다.

 

“‘마누라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 한다고요.”

 

……!”

 

벌써부터 이렇게 선물공세라니, 역시 옛말이 틀리지 않나 봅니다.”

 

정옥은 유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유란은 다시 한 번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지금쯤이면 언니도 자신의 도발을 눈치 챘을 것이었다.

 

후계혈전 전에는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잘 알지요. 그러니 후계혈전이 끝난 후에 서란이 유흔 오라버니와 혼인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유란은 만면에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정옥의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지금 자여가 불리한 입장에 서 있음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아참, 가주님께서도 어서 사위를 보셔야지요? 후계혈전이 시작되려면 적어도 4년이 남았으니 그 안에는 정혼만 하고 서신이며 초상화, 선물 따위만 주고받는 형태이겠지만, 그래도 사위에게서 예물은 받으실 수 있을 것이 아닙니까.”

 

천박하구나. 네가 삼백족 풍습에 물들더니 이제는 딸을 팔아 재물을 얻는 그들의 추한 행태까지 그대로 빼닮은 것이냐?”

 

가주님께서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그들은 혼인할 때에 여자가 지참금을 마련해 갑니다. 여자를 재산이나 물건처럼 여겨, 여자는 독립적인 재산을 보장받을 수 없었던 과거에는 친정에서 가져간 지참금만이 이혼 시, 여자의 재산이 될 수 있었지요. 해서, 그때의 풍습이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이지요. 반면에, 우리 키야트 아이누에서는 남자가 지참금을 가져오지 않습니까. 남자의 이혼 시, 독립적인 재산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참금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해서, 같은 이유로 지금까지 그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고요.”

 

어디 하나 반박할 데가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정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 번 유란을 공격했다.

 

하나, 너는 딸을 파는 것이 맞지 않느냐. 네가 지금 진심으로 네 딸이 살아남기를 원한다 할 수 있느냐? 너는 한때 네 딸을 죽이려 하지 않았느냐. 한데 지금 와서 네 딸이 살아남기를 원한다? 나는 그저 네 딸이 가주가 되면 너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찾아 기웃거리는 것 같다만.”

 

그러는 가주님께서는 진심으로 자여가 살아남기를 바란다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어?”

 

한씨가의 제1후계란 오직 가주의 의지에 달린 것. 대내외적으로 한씨가의 후계들은 능력의 뛰어남에 따라 계승서열이 정해진다 알려져 있지만, 결국 능력의 뛰어남이 정해지는 기준은 가주의 의지뿐. 해서, 선대 가주들께서는 가장 마음에 드는 딸을 제1후계로 올려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였지요.”

 

한데?”

 

제가 제 딸을 학대했던 것은 가주님의 딸들의 손에 죽는 것을 보느니 제 손으로 죽이고 저도 함께 목숨을 끊기 위함이었습니다. 한데, 가주님께서는 두 딸 중에 하나를 마음에 드는 정도에 따라 취사선택하실 수 있을 때는 두 딸을 끊임없이 저울질하셨고, 윤희가 죽어 선택지가 없어지자 이제 서야 자여를 온전히 사랑하는 척 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

 

제화족 사이에서는 부모가 돌볼 수 없는 아이를 죽이고 자신도 따라서 목숨을 끊는 행위를 늑대어미의 사랑이라고 부르지요. 그렇다면 전통이라는 이름하에, 가주로서의 의무라는 이름하에 한 자식은 죽이고, 한 자식은 살리려다, 그것이 불가능해지니 나는 자식을 온전히 사랑한다 스스로를 기만하는 가주님의 행태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입니까?”

 

……!”

 

말씀해보십시오, 가주님. 만약 윤희가 살아 있었다면 지금처럼 자여를 사랑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늑대어미의 사랑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정옥은 더 이상 유란을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늑대어미의 사랑이라는 말은 제화족에게 있어 가장 아프고 슬프며 절대적인, 그리하여 신성불가침해진 말이기 때문이었다.

 

늑대어미의 사랑이라…….’

 

무리가 멸족할 위기에 처하면 어미늑대는 새끼들을 정성들여 핥은 다음, 마지막으로 젖을 물린다. 그리고 배가 부른 새끼들이 잠에 빠져들면 그때 새끼들을 물어 죽인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부짖다 굴 밖으로 나가 최후까지 싸우다 숨이 끊어진다. 이것은 푸른 늑대의 후손인 아이누에게는 가장 절대적인 사랑. 그렇기에 정옥에게는 그 절대적인 사랑을 입에 올리는 유란에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이제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인가.”

 

넷째 날이 되어 유흔은 붉은색 각궁과 좋은 화살을 예물로 보냈다. 사냥과 생존에 있어 필수인 활과 화살은 곧, 서로에 대한 신뢰를 뜻하기도 하는 예물이었다. 예부터 활과 화살을 소지하고 누군가의 삼십 보 이내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사를 손에 쥘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에게 그를 허락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그 사람에게 신뢰받고 있다는 뜻이니, 유흔이 활과 화살을 선물함은 이제 유란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오라버니.”

 

활시위에 화살을 재어보는 것이 몇 년 만이던가. 활시위에 화살을 재어 허공을 향해 겨누어 보이다 말고 유란은 문득, 자신의 눈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느꼈다.

 

활을 참 잘 쏘는군요.”

 

참 태양 같은 사람이었지. 언제 어디서나 밝고 환하게 빛나고.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유란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도 못할 사람 따위 그리워해봐야 무엇하랴. 이제 다시는 볼 수도 없는 사람을 떠올려 무엇하랴. 무엇보다 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아니던가.

 

저와 함께 사냥이라도 나가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가 했던 말들이 그녀의 가슴속을 파고들어 지워지지 않았다. 유란은 그대로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고개를 푹 떨구었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잊어. 내 딸의 몸 안에 당신 피가 흐르고 있는데.”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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