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3-2) '천하패권'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5/18 [10:25]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백화요란(百花燎亂(33-2) '천하패권'

이슬비 | 입력 : 2020/05/18 [10:25]

<지난 글에 이어서>

그런데 쓸모없다, 혹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대체 누가 정하지?”

 

……!”

 

무엇보다 쓸모가 없으면 배제되어도 좋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으면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대체 누가 정하는 거지?”

 

유흔은 다시 한 번 서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서란의 눈동자에서 새어나오는 이채는 마치 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삼는 일은 없어져야 합니다.”

 

……!”

 

전쟁포로라 해도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사람다운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서양인거주구역에 다다라 있었다. 유흔은 서란을 데리고 살롱 안으로 들어섰다. 살롱 안에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쓴 부인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내 진짜 납채물 중 하나는 이거야, 화야.”

 

유흔이 그 중 한 부인을 가리켜보였다.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으로 드레스를 잡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비비안나 헤스티아 카스티야 데 바옌이라고 합니다.”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서란입니다.”

 

앞으로 부상국에 오래 계실 예정이야. 사업감각이 매우 특출하신 분이니 잘 사귀어두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거야.”

 

데 바옌 부인이 자신은 그저 남편이 죽어도 아이들과 함께 먹고 살 돈을 모으기 위해 남편의 이름을 빌려 사업을 할 뿐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반짝이는 검은 눈을 가진 젊은 부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구김살이 없어보였다.

 

이곳에서도 아름다운 도자기가 많이 생산된다면 좋을 텐데요. 우리 유럽인들은 동양의 도자기를 정말 좋아한답니다. 모두들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동양 특유의 아름다움에 반해 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부상국에서는 좋은 백토나 청자토를 찾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나 만약 찾기만 한다면 중국으로 가던 무역선들이 이곳 부상국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부상국의 부가 더욱 증대되겠지요.”

 

그리하여 이 부상국이 얻는 이득이, 아니, 제가 얻는 이득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천하의 패권.”

 

……!”

 

천하의 주도권.”

 

……!”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좋군요.”

 

서란은 데 바옌 부인이 내미는 손을 마주잡았다. 백토와 청자토. 아니, 백토만 확보되어도 어디인가. 그러나 백토를 찾고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진 이들은 부상국 땅에 많지 않았다. 그러니 그는 결국…….

 

역시 천하의 역사는 전쟁으로 쓰여진다는 걸까.’

 

자신에게 부상국을 일통하고 사비국을 부상국의 영토나 속국으로 편입하라는 것이 아닌가. 서란은 유흔을 향해 한 번 해맑게 웃어 보였다. 유흔은 지금 그녀에게 부상국 주재 서양 상인들의 지지라는 납채물을 건네고 있었다.

 

 

데 바옌 부인과의 만남은 화기애애하게 끝이 났다. 데 바옌 부인은 아낌없이 돈주머니를 열어 차와 과자를 사며 서란과 유흔을 대접했고, 서란에게는 벨벳으로 만든 드레스 한 벌과 향수 한 병을 혼인선물로 주었다.

 

저는 당분간 부상국에 머무를 예정입니다. 저를 만나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이 구역 13번지에 있는 집을 찾아주십시오. 하녀에게 레이디 서란이라고 언질을 주신다면 언제나 성심성의껏 대접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 하지요, 마담 데 바옌.”

 

서란이 유럽식 호칭으로 데 바옌 부인을 불렀다. 부인이 어머, 하고 탄성을 터뜨리며 깃털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저희 식 호칭을 아시는군요.”

 

, 전에 서양인 스승님을 모시고 경제학을 공부한 적이 있어서요.”

 

호호. 어쩐지 우리는 이야기가 잘 통한다 싶었습니다. 저는 수학과 철학을 공부한 적이 있으니 저희 집에 오시면 그와 관련된 책들을 빌려드리지요.”

 

살롱을 나와 서란은 유흔의 손을 잡고 걸었다. 유흔이 서란에게 물었다.

 

어때? 이만하면 납채물로 최고지?”

 

.”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야.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까 앞으로 더 기대해도 좋아.”

 

유흔, 정말 나랑 혼인할 거야?”

 

? 우리 화야, 나랑 혼인하기 싫어?”

 

아니. 나는 유흔이 좋아.”

 

서란이 자신은 유흔이 좋다 말했다. 유흔은 그런 서란의 머리에 아까 저잣거리에서 산 뒤꽂이를 꽂아주었다. 길게 내려온 보요장식에 서란이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화야.”

 

?”

 

만약 네가 서른 살까지 다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때 나랑 혼인해줄래?”

 

우리 이미 혼인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래도 네가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나는 너를 아프게 할 테니까.’

 

그러나 유흔은 차마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유흔은 서란의 손을 잡았다. 서란이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유흔. 나는 유흔이 좋아.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유흔만을 좋아할 거야.”

 

화야.”

 

?”

 

언젠가 말이야, 내가 지금처럼 너를 향해 웃고 있지 않아도…….”

 

유흔?”

 

그 때도 나를 좋아해줄 거야?”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차오르려는 눈물을 헛기침과 함께 뱉어냈다. 서란이 유흔의 등을 꼭 끌어안았다. 서란은 마치 자신이 어릴 적 유흔이 그러했던 것처럼 유흔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쇠퇴해가는 마을에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어. 그 농부는 어느 날 누군가가 새를 잡기 위해 만들어둔 올가미에 학 한 마리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그 학을 구해주었어. 올가미에서 풀려난 학은 곧장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고, 그해의 어느 겨울날 흰 옷을 입은 한 여자가 농부의 집에 찾아와 눈을 피해가기를 청했지.”

 

…….”

 

하지만 여자는 눈이 그쳐도 갈 줄을 몰랐어. 여자는 사실 갈 곳이 없다며 남자의 아내가 되기를 원했고,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는 그녀와 혼례를 올렸어.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어. 이듬해 여름, 남자는 병에 걸려 쓰러졌고, 가난한 살림살이에 남자의 병을 고칠 약을 살 수 없었던 여자는 자신의 날개털을 뽑아 밤이고 낮이고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베를 짰어.”

 

…….”

 

그렇게 가을이 지나 여자는 남자의 약을 살 돈을 마련했어. 그러나 이미 남자의 병은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학의 생명력이 담긴 날개를 잃은 여자는 이미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어. 여자는 이제 사실을 밝혀야 함을 알았지만 차마 남자에게 말을 할 수 없어 이렇게 물었어. “제가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저를 사랑해주시렵니까?”“

 

화야.”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지.”“

 

마치 확답을 내리는 듯한 어조였다. 서란이 유흔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대왔다. 유흔은 그런 서란을 마주 끌어안았다.

 

 

내 대답도 같아. 당연하지. 나중에 유흔이 나를 향해 웃고 있지 않아도 나는 당연히 유흔을 사랑해줄 거야. 그러니까 나랑 혼인하자.”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슬비 오컬트무협소설 연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