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상실, 그끝에서 얻은 작은 꿈 하나

[서울둘레길13] 청계산 동서로 가로지르기, 옛골~이수봉~청계사~대공원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3/01/22 [14:14]

탐욕·상실, 그끝에서 얻은 작은 꿈 하나

[서울둘레길13] 청계산 동서로 가로지르기, 옛골~이수봉~청계사~대공원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3/01/22 [14:14]

계사년 첫 서울둘레길 여행입니다. 겁 없는 여행자들이 겨울산을 걸었습니다. 은둔의 땅, 청계산을 동서로 가로지른 것이지요. 고요할 줄 알았던 눈 속 하얀 육봉(肉峰)들은 탐욕의 발걸음으로 뒤덮였고, 여행자는 ‘상실감’에 아팠습니다. 그 끝에 얻은 작은 꿈 하나, 여행협동조합.

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새해가 되면 대게 시산제(始山祭)나 설제(雪祭)를 지냅니다. 관례나 전통이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저 한해 무사 산행을 기원하려는 것이지요. 산을 깔보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이지요. 땅의 주인에게 경외감을 갖자는 것이고요.

둘레길 여행자들은 산을 오르는 것만은 아니니, 구태여 따지면 시보제(始步祭)가 맞겠지만 그 예가 없어, 그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딜쿠샤’(둘레길모임 별명)의 새해 첫 행보이니 여느 때와는 좀 다른 자세가 필요했을 테지만, 게으른 여행자는 그리 못했습니다.

▲ 포기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미련도 버려야 하지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뿐입니다. 아쉬움에 미련에, 쓸데없는 잔상만 춤을 춥니다.     © 최방식

 
여행협동조합 창립대회를 예정해놓고 있어 좀 일찍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사당동 행사장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지를 찾다보니 청계산을 꼽았고요. 여느 때보다 1시간 이른 10시 양재역 10번 출구. 시간을 당겨선지 정초 딴 일들이 있어선지, 4명만 모였습니다.

약탈·도둑심보 가득한 청계산

‘옛골’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데, 늘어선 이가 60여명. 5~10분마다 50~60여명을 퍼 나르니, 몰려 들어가는 셈입니다. 등산로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입니다. ‘웰빙’ 바람 때문인지. 자본사회 최고 미덕이 소비라더니, 정말 산을 소비하려는 것인가요. 오지와 원시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

자연 속 산·들·강을 찾고 즐기는 걸 나무랄 수야 없겠죠. 제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일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산이 좋아 찾아오는 이들, 솔직히 삽 들고 덤벼드는 이들보다야 낫겠지요. 하지만, 자연자원을 벗하려는 이들보다 딴 욕심을 채우려는 이들이 대부분이니 좀 ‘거시기’합니다.

제가 싫어하는 것 하나, 분재입니다. 자연 속에서 억압받지 않고 자라야할 나무. 제 안방에 가두는 것도 모자라 꽁꽁 동여매 자라지 못하게 하니, 이런 폭력이 또 어디 있으리까. 50년 묵은 사과나무를 책상 한 귀퉁이에 올려놓고 혼자 즐기려는 ‘도둑 심보’죠.

집에 화분 몇 개가 있는데, 그 또한 억압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제 가족을 위해 집안에 가둔 셈이니까요. 말라버리면 그만두려고 맘먹고 있는데, 그도 뜻대로 안 되네요. 열대어 한 마리가 남아 몇 년을 그냥 뒀던 어항도 치웠습니다. 약탈 좀 그만두려고요.
 
자연자원을 제 것이라고 우기는 인간. 자신과 가족, 때로 사회를 위해 돈 좀 벌어보겠다고 공공재를 제 맘대로 파괴하면서 미안해하지 않는 파렴치한. 돌, 나무를 도둑질하고는 취미라거나 ‘자연의 선물’이라 우기는 자칭 만물의 영장(?). 착각이지요. 자가당착입니다.
 
▲ 한반도 남쪽 한가운데 속리산서 칠장산을 거쳐 문수산으로 뻗어 오른 한남정맥. 광교산에서 검단으로, 관악으로 부챗살처럼 퍼진 한수이남 지맥의 한 가운데 자리한 청계산(淸溪山 618m). 동서남북으로 서울, 성남, 의왕, 과천을 가르는 산입니다.     © 최방식


여행자들이 정초 첫 여정 청계산은 오래 전 은둔의 땅이었습니다. 망경대, 국사봉이 그 징표지요. 고려말 조선건국을 둘러싼 일대 회오리가 일 때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가당찮다고 여긴 이들이 여기 숨어 지냈으니까요.

능선길에 들른 청계사. ‘신라 때 창건, 고려 충렬왕 때 조인규의 노력으로 중건했다’는 글귀가 보입니다. 조인규의 손자 조윤이 숨어 조선건국을 거부하고 수도 ‘개경’을 바라봤다는 ‘망경대’(望京臺), 스러져가는 고려왕조를 안타까워했다는 ‘국사봉’(國思峰).

역성혁명 반대자 ‘은둔의 땅’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꾸짖던 여말 학자들이 뒤늦게 하나 둘 정계에 진출하며 형성한 사림(士林). 건국공신세력에 맞서다 화를 당한 사화(士禍). 그 시작인 무오사화(연산군) 때 여기 숨어 사사(賜死)를 면했다는 정여창 선생의 이야기로 남은 이수봉(貳壽峰, 두 목숨 봉우리).

태백에서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한반도 남쪽 한가운데서 칠장산을 거쳐 문수산으로 뻗어 오른 한남정맥. 광교산에서 검단으로, 관악으로 부챗살처럼 퍼진 한수이남 지맥의 한 가운데 자리한 청계산(淸溪山 618m). 동서남북 서울, 성남, 의왕, 과천을 가르는 산입니다.

시작부터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자 여행자들, 푸념부터 늘어놓습니다. 옛골을 벗어나 ‘깔딱고개’를 오르는데 송선민씨가 눈길이 미끄러워 못가겠답니다. 망우산 능선길에 등산화가 더 미끄럽다며 부츠를 신고 온 그 분이죠. 고급 아이젠을 사놓고 그냥 온 여행자입니다.

둘레길 여행에 세 번째 참여했는데, 이번에는 멋진 등산화를 신고 왔습니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께 등산 다닌다고 했던 모양인데, 부친께서 1백여만원을 보내고 “얘, 등산화 등 좋은 거 사 신고 다녀라”고 하셨다네요. 판매원이 ‘안 미끄러지는 좋은 제품’이라 해 아이젠은 두고 등산화만 신고 왔다며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 시키들 거짓말 했잖아.”
 
▲ 산을 좋아하는 이들은 새해가 되면 시산제(始山祭)나 설제(雪祭)를 지냅니다. 한해 무사를 기원하는 것이지요. 깔보지 않고 사랑하겠다는 다짐. 이 땅 주인에게 경외감을 갖자는 것이지요.     © 최방식


여행자들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는 이수봉을 그냥 지나쳐 청계사로 갑니다. “깔딱고개만 넘으며 평탄한 능선길”이라 달랬는데, 가파른 계단길이 계속됩니다. 민선씨, 무릎 아파 못가겠답니다. 조금만 가면 된다고 얼러도 푸념이 거듭됩니다. “이건, 둘레길이 아니잖아요.”

엄살로 나주사투리로 배꼽을 잡게 하는 민선씨. “어릴 적부터 제가 툭하면 넘어지곤 했어요. 건들건들 걷다 그런 거지요. 그 때마다 아버지가 그랬어요. 생기다 말아서 그렇다고. 그리곤 나랑 공동묘지에 가자고 그랬어요. 고장난거 바꿔오게...”

대공원 계곡의 좌청룡 능선을 휘감아 도는 길. 절고개를 지나는데 배고프다며 점심을 하잡니다. 앉을 만한 곳을 찾다 여의치 않아 등산로 옆 자그마한 바위에 쪼그리고 앉았습니다. 약밥, 유부초밥으로 배를 채우고, 수다로 지쳐갈 때쯤 다시 출발했습니다.

“공동묘지 가, 고장난 거 바꾸자”

그런데 웬일이래요. 점심할 데를 찾다 포기했는데, 50여 미터를 더 오니 의자가 6~7개나 비어있습니다. 서두르면 안보이니 느리게 가자고 했는데... 여전히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으니, 이거 참. 여행자들, 건성은 언제 그치려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우고 버리고 멈추자 해놓고, 늘 머리 따로 가슴 따로입니다. 잊은 나, 잃은 이웃, 함께 사는 마을로 가는 ‘길’은 언제 찾나요? 이런 얼렁뚱땅 여행으로 그런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나 있을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40여분을 내려왔을 겁니다. 대공원 호수가 저만치 보입니다. 헬리포트를 지나 능선길에 상인 한 명이 비닐 천막에서 라면을 파는데, 곁에 눈사람을 만들어놨습니다. 앞서가던 여행자가 한마디씩 합니다. “야, 눈사람 희한하게 만들어 놨다.”


▲ 정초 첫 여정은 은둔의 땅이었습니다. 고려말 조선건국 회오리가 불어칠 때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가당찮다고 여긴 이들이 여기 숨어 지냈으니까요     ©최방식

본능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 하늘이 깜깜해져 옵니다. 점심 먹으며 둘러앉은 길가 작은 나뭇가지에 카메라를 걸어 놓은 게 그제야 생각났으니까요. 배낭만 둘러매고 그냥 온 것이었습니다. 가볍더라니...

하늘이 노랗습니다. 30여분 내려온 등산로를 뛰어 올랐습니다. 마치 달리기 선수라도 된 양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르는데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습니다. 빨리 가 카메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달리고 달렸건만, 그 나뭇가지는 휑뎅그렁합니다.

잠시 주춤거리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수봉에 등산객들이 많았는데, 거기 가면 카메라를 가진 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 20여분을 더 뛰어 오르다, 그만 멈추었습니다. 한 생각이 들었죠.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왜 이렇게 허둥지둥 달려가지?”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터덜터덜, 50여분 내려왔나 봅니다. 하얗던 머릿속에 별의별 생각이 스쳐갑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어깨도 한 번 때려보고. 술 취해 뭔가 잃었을 때도 떠올려보고. “왜 그리 퍼마셨지”라는 후회 따위는 없는데, 이 허탈과 분노는 뭐지? 뭐에 홀린 것인가. 맨 정신에 바보. 한심함에 울화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70년대 이상을 잃고 가상세계에 빠져든 일본 ‘허구의 시대’를 떠올린 건 왠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적 풍요 뒤에 찾아온 정신적 황폐화. 연합적군의 괴멸과 신좌파들의 내분(우치게바). 마침내 꿈 잃은 ‘상실의 시대’. 이상이 사라진 허탈에, 실현 불가능한 가상의 신기루를 만들고 그에 빠져든 ‘오타쿠’.

좌절시대, 여행협동조합 창립

깨달음은 그렇게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포기는 욕망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미련도 버려야 하지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 그뿐입니다. 다시 구입하거나 그만두거나. 아쉬움이나 미련에, 쓸데없는 잔상만 춤을 춥니다. 머리는 지끈지끈 아파오고요.

여행자들의 걱정에, 호들갑을 나무라며 1시간여를 말없이 걸었습니다. 대공원역까지 내려왔습니다. 여행협동조합 창립대회에 가려고 일부러 서둘렀는데. 대형 사고를 치고 되레 더 늦고 말았으니. 뭔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행길은 또 왜 그토록 길었는지, 참.

행사장에 20여명이 모였습니다. 들어서자마자, 쏟아지는 위안과 걱정. 근심 끼친 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공황상태에 빠졌던 나를 추슬렀습니다. 20여명이 ‘협동조합 여행생활’을 결성했습니다. 김일섭 추진 대표를 이사장으로 선출했죠. 8명의 이사, 2명의 감사도 뽑았습니다.

뒤풀이는 사당역 주변 식당 ‘사월의 보리밥’. 처음 마주한 이들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발기인 여성 한 분이 귀를 솔깃하게 합니다. “모든 일을 접고, 적어도 6개월은 나를 위해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이게 뭔 소리래요. 무슨 일 있냐는 질문을 부릅니다.

딸들 이야기입니다. 해외 유학중인데 현지 남자(서양인)와 사랑에 빠졌다네요. 일행은, 아니 그게 무슨 걱정거리냐고 했고, 그 분은 “결혼하겠다는데 걱정 안 되겠냐”며 반문합니다. 그리곤 이어진 소리. “엄마는 엄마인생, 딸은 딸 인생.”
 
▲ 실의에 빠졌다 막 벗어난 여행자. 술과 수다 덕에 상실감을 떨쳤죠. 어두침침한 나락에서 얻은 작은 꿈 하나. 여행협동조합 ‘여행생활’을 창립했습니다.     © 최방식

“내려놓으라, 포기하라”는 성화에, 그분은 “어떻게 그러냐”며 쉽지 않답니다. 걱정에 잠도 못 이룰 정도라고. 그래서 잠시 가족걱정 내려놓고 마음수련을 하려는 것이랍니다. 카메라 잃고 허탈감에 빠졌던 기자. 창피해, 조용히 막걸리 잔을 들었습니다.

청계산 여행자 셋이 먼저 일어납니다. 협동조합 창립대회장으로 올 때 날 위로해주던 둘레길 동행자들입니다. “행사장에 가지 말까요? 우리가 맛난 술 사줄게요.” 위문(?) 공연을 하겠다는 것이었지요. 이분들께, 걱정과 안타까움을 끼쳐 죄송할 뿐입니다.

갈 사람들 먼저 가고, 그 자리에서 이어진 좀 희한한 2차. 이사장으로 뽑힌 김일섭 상임대표. 씁쓸한 유머 하나 작렬합니다. “이사장님, 이사장님” 호칭에, “나 부동산업 대표고, 김 사장이에요”. ‘대표’, ‘선배’, ‘이사장’. 부르는 이 맘대로 호칭을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엄마는 엄마인생, 딸은 딸인생

느닷없는 분실장애. 술도 취하지 않습니다. 강동 쪽으로 가던 4명이 검표기를 통과했다가 맘을 바꿔 다시 둘러앉은 술자리. “한 잔 더” 유혹이 절절했거든요. 은둔의 땅에서 카메라 잃고 실의에 빠졌다 막 헤어난 여행자는 술과 수다 덕에 상실감을 떨칠 수 있었죠. 그리고 어두침침한 나락에서 얻은 작은 꿈 하나. 여행협동조합 ‘여행생활’을 마침내 창립했습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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