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씨가에서 ‘그’의 존재는 철저한 금기였다

[연재]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푸른 늑대의 후손(2)

이슬비 | 기사입력 2017/02/21 [09:45]

한씨가에서 ‘그’의 존재는 철저한 금기였다

[연재] 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 피다' 푸른 늑대의 후손(2)

이슬비 | 입력 : 2017/02/21 [09:45]

제2장 푸른 늑대의 후손(2)

 

<지난호에 이어>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유흔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서란은 단순히 자신이 어떻게 태났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 서란은 자신의 두 근원 중 하나인 근원, 자신의 또다른 근원,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너의 아버지…… 화야의 아버지…….“

 

유흔은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서란이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한없이 낮추고 또 낮추는 그의 입에서는 예의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kyrie, kyrie, kyrie,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kyrie, eleison. christe, eleison,

 

kyrie, elei, kyrie, kyrie, eleison

 

유흔은 지금 부르는 이 노래를 평소에도 매우 즐겨 불렀다. 길을 걸을 때에도, 차를 마시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고즈넉한 정자에 앉아 홀로 서도(書道)를 즐기거나 회화(繪畫)를 즐길 때에도 유흔은 항상 이 노래를 불렀고, 이따금 서란에게 들려주며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유흔은 자신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말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유흔 한 사람만이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비밀이었다.

 

“플러티나 블론드…….”

 

흠칫. 자신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와 버린 혼잣말에, 유흔은 서둘러 입을 닫아버렸다. 한씨가에서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의 생김새, 하다 못해, 머리카락 색 하나, 눈동자 색 하나조차도 한씨가에서는 말할 수 없었다. 그만큼 한씨가에서 ‘그’의 존재는 철저한 금기였다.

 

 

우리는 키야트 아이누의 후손이다.

 

한씨가 가주의 즉위식 날에는 가장 먼저, 식전에 가주가 저택의 한가운데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 뒤를 따라 무녀가 향과 꽃을 받쳐 들고 들어오는 것으로 액막이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액막이가 끝나면 무녀는 가주에게 술잔을 건네고, 가주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허공에서 두어 번 돌리다, 하늘을 향해 술을 뿌리고, 술잔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것으로, 자신이 가주로 즉위하게 되었음을 카무이 신과 달의 신 레아나, 해의 신 사라타, 바다의 신 레피아, 어로(漁撈)의 신 샤쿠샤인, 수렵의 신 호웨타나, 불의 신 비란, 철의 신 루한주, 의약(醫藥)의 신 사네타, 무녀들의 수호신 타레주에게 고하고, 가주의 직을 승계 받는 것을 신들에게 최종적으로 허락받았다.

 

식전의 의식이 모두 끝나면, 가주는 신들의 형상을 본떠 만든 신여(神輿) 여러 대가 줄지어 사당으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다, 신여의 맨 마지막 끝에 나가는 훌란의 신여를 타고 사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무녀의 가마가 뒤따르며 가주의 행렬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렇게 장관을 이루며 도착한 사당 앞에 도착한 행렬은 가장 먼저, 제화족의 시조신인 푸른 늑대 치노와 하얀 암사슴 보르테, 그리고 키야트 아이누의 시조신인 미녀 알란과 알란의 남편 제베에게 예를 표하며, 갓 잡은 신선한 짐승의 피와 간과 심장을 바치고, 술 세 잔을 따라 제단 위에 부었다.

 

제화족의 시조신들과, 키야트 아이누의 시조신들에게 가주의 직을 승계 받았음을 고하는 의식을 마치고 나면, 그 다음은 한씨가의 시조신이며, 1대 가주인 훌란과 그녀의 남편 무칼리의 차례였다. 훌란, 한정. 무칼리, 도륜. 두 시조신의 이름이 제화족의 언어와 삼백족의 언어로 한 번씩 불려지면, 가주는 새로 두들겨 만든 제화족의 단도, 마키리를 품 속에서 꺼내 바치며 키야트 아이누의 마지막 연맹주, 샤쿠샤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가주는 마키리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근처에 있는 남성들 중 한 사람을 고르고, 그의 앞으로 가서 그를 단도로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는 한씨가의 시조신이며, 1대 가주인 훌란이 키야트 아이누의 연맹주 샤쿠샤인을 죽이고, 7년 전쟁을 이끌었던 역사를 재현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는데, 이때, 무녀는 다시 한 번 예의 그 말을 외쳤다.

 

“우리는 키야트 아이누의 후손이다!”

 

무녀의 외침을 끝으로, 모든 의식 또한 끝이 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씨가는 물론, 가라고루성과 가유 전체에서 가장 큰 축제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한,씨가의 여성 사병들과 무희들, 그리고 가희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동안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이제 절정은 가주의 춤으로 이어졌다. 무녀들의 수호신인 타레주 신으로 분장한 가주는 타레주 신의 상징인 청동거울을 목에 걸고, 은으로 만든 칼을 들고, 금방울을 들고 춤을 추며 가유에 축복을 내렸고, 이 모든 일들이 끝나면, 가주의 혼인이 정식으로 발표되고, 한씨가 가주의 부군이 될 이가 공표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선통황제에서 제명여제로 이어지는 삼 년의 시간 동안, 한씨가에서는 예의 그 말이 세 번 울렸고, 세 명의 가주가 바뀌었고, 세 번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세간에서는 양소막부가 선통황제에게 패하고, 선통황제가 다시 권력을 잡아 황제가 중심이 되는 중앙집권정치를 펴려다 실각하고, 목협막부가 정권을 잡게 된 삼 년의 시간을 막부의 이름을 따서 양소 – 목협 교체기라고 부르거나, 황제들의 연호를 따서 선통 – 제명 교체기라고 불렀고, 혹은, 실권을 잡았던 세력들의 이름을 따서 양소막부 – 선통황제 – 목협막부 교체기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씨가에서 만은 그 삼 년의 시간을 달리 불렀는데, 그 시간 동안 교체되었던 가주들의 이름을 따서 그 명칭을 련 – 단야 – 정화 교체기라고 하였다.

 

무엇보다 그 삼 년의 시간은 한씨가에게 있어서 가장 뼈저린 교훈을 느끼게 해준 시기였다. 그 시기는 권문세가에서 유력 후계를 살려둘 경우,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 시기로, 후계 자격을 박탈당한 후계가 정당한 자격을 가지고 있는 다른 후계를 공격하거나, 차기 가주로 확정된 후계가 다른 자매들은 물론이고, 그 지지자들까지 모두 제거하거나, 분쟁을 일으킬 의사가 전혀 없었던 후계가 지지자들의 준동에 휘말려 쓸데없는 분쟁을 벌이는 일 등이 그 삼 년 동안에 모두 한꺼번에 일어났던 것이었다. 이에 한씨가는 가문의 존립에 대한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최종적으로 살아남아 가주의 자리에 오른 정화는 가문 내의 요구에 힘입어 시급히 ‘후계 혈전’을 도입했다.

 

‘후계 혈전’이라는 것은 후계라고 불리는 가주의 딸들 중, 가장 뛰어난 한 사람만을 남기고, 나머지 후계들을 모두 죽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후계 혈전’ 전의 후계들끼리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거나 파벌을 형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규칙들을 제정해 놓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후계 혈전’ 전의 후계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란의 어머니인, 한씨가의 37대 가주 정옥의 언니, 유란 또한 한씨가의 36대 가주 하윤의 딸로서 후계 혈전에 참여하였다.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오라버니.”

 

후계 혈전을 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았던 어느 가을날,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유란이 한밤중에 자신의 처소를 찾아왔던 것을 유흔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쯧쯧쯧.”

 

“왜 그래, 오라버니?”

 

“후계 혈전 전의 후계는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느냐, 이 철없는 것아.”

 

유흔의 핀잔에 유란은 그저 입을 삐죽 내밀고 흥, 하며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유흔은 으이구, 하며 손에 들고 있던 찻잔으로 유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라버니, 내가 그렇게 싫어? 왜 비싼 차를 내 머리에 끼얹고 그래?”

 

“이것아, 이게 어디 차가 든 찻잔이냐. 빈 찻잔이지.”

 

“그래도…….”

 

유란은 애써 꾸민 머리가 망가진다며 화를 냈고, 유흔은 평소의 유란 답지 않게 삼백족 식으로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여러 화려한 장식을 꽂은 모습을 보며 잠시 넋을 잃은 듯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예뻐?”

 

“…….”

 

“어? 왜 아무 말이 없어? 오라버니, 설마 예쁜 여자 처음 봐?”

 

유란의 말에 유흔은 그저 말없이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유흔은 유란의 머리 위에 꽂힌 비녀며, 뒤꽂이, 빗치개, 노리개 같은 값비싼 장신구들과 하룻밤 사이에 길어져버린 그녀의 머리카락을 바라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유흔이 기억하기로는, 불과 어제 저녁까지만 하여도 유란의 머리는 턱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머리였다. 남녀 모두 머리를 짧게 자르는 풍습 탓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머리를 어깨선까지 길러보지 못하는 제화족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늘 짧게 자른 머리를 하고 있었던 유란이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이렇게 길어질 리 없다고 생각하던 유흔은 농담 반, 진담 반이라는 듯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머리가 어찌 이렇게 자란 게야? 어찌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글쎄, 왜일까?”

 

“혹시 하룻밤 새에 머리가 부쩍 자라나는 약이라도 먹은 게냐? 그렇지 않고서야…….”

 

“에이, 오라버니도 참. 당연히 가발이지.”

 

“가발이라고……?”

 

유란의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유란은 제 머리카락이 아니라, 마음대로 손가락에 감을 수도 없다면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응, 머리장식을 꽂으려면 머리를 올려야 하는데…… 나는 머리가 짧잖아…….”

 

“…….”

 

“나도 다른 삼백족 여자들처럼 예쁜 머리장식을 꽂고 그 사람 앞에 서보고 싶은데 나는 머리가 짧잖아…….”

 

“…….”

 

“삼백족 여자들은 좋겠다. 이렇게 예쁜 머리장식들도 꽂을 수 있고, 또…… 예쁜 옷들도 입을 수 있잖아.”

 

자신의 짧은 머리를 한탄하던 유란은 이제 자신이 늘 갖추고 있는 제화족의 복식에 대해서도 한탄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란의 말은 똑같은 포(袍)라도 제화족의 포보다 삼백족의 포가 더 예쁘고 화려하다는 말부터, 삼백족의 여자들은 작고 예쁜 신을 신어 걸음도 아장아장 예쁘게 걸을 수 있는데, 제화족인 자신은 가죽 한 장으로 다리를 감싸 만든 화(靴)를 신고 있어서 타박타박 걷게 된다는 말까지 온통 제화족의 풍습에 대한 한탄뿐이었다.

 

“…… 때문이냐?”

 

“……?”

 

“그 사람…… 때문이냐?”

 

유흔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유란은 자신의 언니이며, 어머니 하윤의 첫째 딸인 정옥 다음으로 지지받는 후계였다. 그런데 그런 유란이 하루아침에 제화족의 풍습을 한탄하게 된 데에는 오직 단 한 가지의 이유만이 작용했을 것이었다.

 

“나…… 그 사람이 좋아.”

 

“…….”

 

“단 한 번만이라도 예쁜 머리장식을 하고, 예쁜 옷에, 예쁜 신발을 신고 그 사람 앞에 서보고 싶어.”

 

“…….”

 

“그런 다음에는 단 둘이 나들이를 가자고 청할 거야. 색색의 꽃이 그려진 지우산을 쓰고, 함께 호류사의 찻집에 가서 하루 종일 차와 다식(茶 食)을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거야.”

 

“…….”

 

“그리고 이야기를 끝낼 즈음, 나는 그 사람에게 혼인을 청할 거야.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러니 나와 한 평생을 함께 하자고,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며 우리 아이들이 자라서 혼인하고 각자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자고.”

 

유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계 혈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지금, 한씨가 내부에서는 물론이고, 모든 무가와 공가, 그리고 황실에서 또한 혈전을 염두에 두고 하윤의 딸들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서 사랑타령을 한다……. 유흔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유란을 바라보았다.

 

“무가의 아들이냐?”

 

“아니.”

 

“그러면 공가(公 家)의 아들이냐?”

 

유란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한동안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속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유란이 별안간 입을 열어 한 사람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었다.

 

“상운한이야, 그 사람 이름.”

 

상운한……! 유란의 입에서 불린 이름에 유흔은 순간, 막 입으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유흔은 시종을 불러 떨어진 조각을 치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두 손을 떨며 거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상운한이라니……! 상씨가 가주 상아영의 아들이라니……! 무엇보다…… 상씨가라니! 상씨가는 본래, 부상국의 3대 황제인 묘종 신공제의 셋째 누이동생인 내친왕 조세령이, 오라버니인 신공제에게 상씨 성과 함께 식읍과 노예를 하사받으면서 창시한 가문으로, 황실의 지친(至 親) 가문이기에 공가 중 세력이 가장 강한 가문에 속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상씨가도 어떻게든 유력 무가와 연을 맺지 않으면 더 이상 그 세를 유지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따라서 상씨가의 현대 가주 상아영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운한을 한씨가에 약혼시켰고, 두 가문 사이에는 이미 차기 가주가 되는 후계가 운한을 측실로 들이기로 이야기가 된 상태였다.

 

“유란.”

 

“응?”

 

“반드시 살아남아라. 반드시 살아남아…… 가주가 되어라.”

 

유흔이 유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저 ‘살아남아라’ 이 한 마디뿐이었다. 그것이 유란 자신을 위하는, 그리고 유란의 사랑을 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후계 혈전의 끝을 알리는 붉은 노을이 서산 너머로 지던 날, 유란은 후계 혈전에서 살아남았다.

 

 

서란은 정말 영특했다. 이제 겨우 일곱 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한 달 만에 가림토 문자를 떼더니, 이제는 가림토 문자로 된 두툼한 책 한 권을 줄줄 읽어 내려갈 줄 알았다.

 

유흔은 서란이 가림토 문자로 번역된 ‘열녀전(列 女 傳)’을 막힘없이 줄줄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띠었다. 사실, 여성을 남성보다 높이 여기는 제화족의 풍속 상, ‘가장 쓰레기 같은 저서’로 취급받는 서책을 굳이 서란에게 읽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유흔은 서란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정말 단순히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문장을 읽을 줄 아는 것인지’를 시험해보고 이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를 정하려는 것이 유흔의 목적이었다.

 

“유흔.”

 

“응?”

 

“이거 이상해.”

 

“어떤 게 이상한데?‘

 

“여기 이거 말야, 이거.”

 

서란은 방금 전 읽고 있던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유흔은 서란의 설명을 들으며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왕이 첩을 많이 두면 그만큼 인재를 고르는 눈이 높아진다는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야?”

 

“응?”

 

“측실을 들인다는 건 그만큼 내전(內 殿)에 암투가 많아진다는 뜻인데, 그렇게 집안 다스리기를 중시해서, 집안을 잘 다스려야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여기는 사람들이 왜 그런 간단한 사실은 무시하고 있을까?”

 

유흔은 서란을 품 안에 와락 끌어안았다. 서란은 지금 ‘문장을 읽고 있을’뿐만 아니라. 문장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읽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의 딸이 이 정도 영특하지도 않을까.’

 

유흔은 이제 서란에게 백수문(白 首 文)을 가르쳐야겠다며 서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표지에는 한자로 선명하게 ‘백수문(白 首 文)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천지현황(天 地 玄 黃).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하늘은 천이요, 땅은 지요, 검음은 현이요, 누름은 황이라 한다.”

 

자신의 설명에 따라 한자를 한 글자씩 적어가며 읽는 서란을 바라보다 말고 유흔은 문득, 먼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또다시 ‘그’가 생각난 까닭이었다.

 

 

지금 유흔이 서란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그’ 또한 유흔을 가르쳤다. ‘그’가 유흔에게 가장 먼저 가르친 것은 서양에서 쓰인다는 꼬부랑글자, ;알파벳‘이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날 ‘그’가 내민 공책에는 4개의 선들에 맞춰 알 수 없는 꼬부랑글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가 유흔의 반응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알파벳’이라는 것입니다.”

 

“알파벳이요……?”

 

“그렇습니다. 이것은 서양에서 쓰이는 글자로, 서양인들은 이 글자를 알파벳이라고 부르더군요.”

 

설명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그’는 유흔에게 동그란 공 모양의 물체를 내밀었다. 물체에는 여러 나라와 대륙의 땅덩어리가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지구의(地 球 儀)라고 하는 것입니다. 서양인들은 커다란 배를 만들어 세계 곳곳을 탐험하고, 정복하며, 새로운 과학 기술들을 개발하고 알리고 있지요. 앞으로 세계는 서양인들이 지배할 것입니다. 우리 동양은 서양의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될 것이고요. 그러니 우리가 앞으로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왜 저입니까……? 저는 한씨가의 가주도, 차기 가주도, 후계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한씨가 가주의 양자…….”

 

“아니요. 앞으로 내가 전할 가르침들은 오직 그대와 그대의 후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대가 나의 가르침을 받을 유일한 적임자이고요.”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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