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의 작용, 형체가 없고 신비로와"

[김계유의 주역 속으로 10-3] 피보나치수열과 주역·도의 원리

김계유 | 기사입력 2008/07/30 [01:04]

"음양의 작용, 형체가 없고 신비로와"

[김계유의 주역 속으로 10-3] 피보나치수열과 주역·도의 원리

김계유 | 입력 : 2008/07/30 [01:04]
[전편에서 계속] 그렇다면 상수나 의리를 가리지 않고 이들 개념이 동양적인 도와 결부시켜 볼 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가. 먼저 우리가 주역을 동양적인 사유로 이해하기 위해 우선 고전적인 의미에서 통용되어 오던 도에 대한 정의를 논리적으로 정리해보자.

첫째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것처럼 우주 만물의 근원 혹은 근본 원리를 나타내는 개념의 용어가 도다.

둘째 그와 같은 만물의 근본 원리에 따라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뜻하는 말이다.
 
셋째 역시 앞에서 말한 만물의 근본 도리를 수행자적인 차원에서 깊이 자각한 인간 내면의 안목을 상징한다.

그 밖에 어떤 기예나 무술 등에서도 그 방법을 나타낼 때 도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도에 대해서는 그 개념이 포괄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소에 도를 어떻게 생각해 오고 있었을까. ‘도’라고 하면 턱 밑에 수염을 허옇게 기르고 깊은 산속에서 축지법이라도 익혀 터득했음직한 기인의 모습을 으레 떠올리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도는 만물의 근원 혹은 그 원리"
 
불교에서는 더욱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어떤 선승에게 제자는 도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 선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자네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면 거기에 대해 말해 주겠다.”

제자가 다시 말했다. “저는 이미 서강의 물을 한 모금 마셨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이렇게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자네의 질문에 답변했네.”

모호하게 느껴질 것이다. 이는 도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낙처를 설명해 보자면 중용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그 뜻이 가깝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사람이 도를 잠시도 떠날 수가 없다면 그 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시경에서 말하듯 도끼 자루를 쥐고서 도끼 자루를 찍어내되 대중하여 보면서 오히려 멀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앞의 선문답은 우회적으로 살피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노자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인 어법으로 설명해 가르쳐준다. “도는 형체가 없고 분명하지 않다. 도는 드러나지 않으며 신비롭고 그윽하다. 하지만 도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이렇듯 노자가 말하는 도의 실상이란 실제에 있어서 주역의 음과 양이다. 곧 도가 막연한 의미의 형이상학적 이치에 가깝다면 주역은 음과 양의 작용으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는 구체적인 개념이다. 

"이미 자네의 질문에 대답했네"

이를 계사전에서는 “한 번 음으로 작용하고 한번 양으로 작용함을 일컫는다(一陰一陽之謂道)”고 말한다.

계사전에서는 또 말한다. 한번 음으로 작용하고 양으로 작용하는 것이 도지만 그 작용에 대해 살펴보면 도무지 오묘하여 예측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신(神)(陰陽不測之謂神)이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이는 곧 ‘도는 형체가 없고 분명하지 않아서 드러나지 않으며 신비롭고 그윽하다’는 노자의 설명 그대로다.

음양의 작용은 도가 도로서 성립하는 구체적인 형식이면서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어떤 정해진 형체가 없어 신비롭다. 그래서 계사전 앞 절에서는 신에는 일정한 방소가 없고 특별하게 정해진 본체가 없다는 신무방이역무체(神无方而易无體)를 말한다.

이렇듯 도에 대한 동양적인 사유는 역의 개념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또 그 점은 앞의 예에서 볼 수 있었듯이 불교도 마찬가지다. 혹 범주상의 차이로 인한 시비가 사람에 따라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좋은 예로 한때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제목으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도올 김용옥의 도덕경 강의에 대한 이경숙의 시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제기한 이경숙은 도덕경 본문 중의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에서 옳을 가(可)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서 그 논란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노자를 웃긴 남자' 시비 가려라
 
먼저 이 구절에 대한 도올의 해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이를 두고 이경숙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도는 도라고 해도 좋지만, 이름이 항상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도올이 도의 개념에 대한 기술에 있어서 언어 문자의 비실제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자 한다면, 이경숙은 도 자체의 실재성을 더욱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경숙이 제기하는 해석상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 그녀가 문제 삼는 옳을 가(可)의 자전적인 뜻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可’의 뜻은 “옳다, 가하다, 쯤, 정도” 등의 의미로 이해된다.

그녀가 말하듯이 옳을 가(可)를 ‘무엇을 할 수 있다’, ‘해도 좋다’, ‘가하다’는 뜻으로 보아 ‘도가도’(道可道)를 도를 해석하더라도 꼭 그녀의 말처럼 도를 도라고 해석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뜻이라고 만 못 박아야 할 까닭은 없다.

김용옥처럼 ‘도를 도라고 말하면’이라고 보더라도 그 맥락은 조금도 노자 본래의 취지에서 어긋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다음 문장의 해석 내용은 구태여 시빗거리가 더더욱 되어질 까닭이 없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다만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경숙이 제기하는 해석상의 문제를 빌미로 이 구절에서 노자는 도의 실재적인 의미를 강조했겠는지 아니면 문자의 비실재성을 주목해서 엮었을 것인지를 한 번쯤 깊이 숙고해볼 여지는 남는다 하겠다. <연재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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