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덩케르크', 생존전쟁사 휴먼스토리

[임두만 영화평] 40년 5월 사흘, 철수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도피

임두만 | 기사입력 2017/08/03 [15:44]

영화 '덩케르크', 생존전쟁사 휴먼스토리

[임두만 영화평] 40년 5월 사흘, 철수가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도피

임두만 | 입력 : 2017/08/03 [15:44]

[신문고뉴스] 임두만 편집위원장 = 2차 대전 초반인 1940년 5월, 독일군의 기만전략에 완전히 말려든 40만 명 대군인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순식간에 독일군의 거대한 포위망에 갇혀 버리게 된다. 결국 이 거대한 영불 연합군은 프랑스 북부 소도시 덩케르크에 집결하여 도버해협 너머 영국으로의 탈출을 꾀한다. 영화 덩케르크의 소재가 된 2차 대전 영불연합군 최대 패전 이야기다.

    

당시 만약에 히틀러의 독일군이 덩케르크에 갇힌 영불연합군 40만 명을 몰살 시켰다면 2차대전의 역사가 바뀌었을 수 있다는 역사와 전쟁 전문가들의 예측은 지금도 현실적으로 유효하다.

 

▲ 1940년 실제 전쟁 당시 덩케르크의 모습     © 자료사진

 

그런데 왠일인지 질풍노도와 같이 영불 연합군을 덩케르크로 몰아 넣은 히틀러의 독일군은 영불 연합군 도버해협 철수 작전이 시작된 5월 26일, 공격의 기세를 덩케르크 외곽 20km에서 멈춘다. 히틀러의 “진격 중지! 현위치에서 대기.” 명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히틀러의 진격중지 명령의 이유는 아직도 전쟁사의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있다. 영국에게 명예로운 항복의 명분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설, 공군력이 월등하다고 믿고 공중포격으로만도 이들을 섬멸할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라는 설, 혹시 연합군의 함정이 아닌가 하는 히틀러의 의심설 등이 제시되지만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떻든 당시 전차군단 독일 지상군은 히틀러의 명령에 대기해야만 했다. 이후 5월 28일 히틀러는 다시 진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 일대에 철수작전 엄호를 위한 전열을 정비한 후였다. 그리고 연합군은 상당한 희생을 치렀지만 6월 4일까지 무려 30만 명 이상의 영국, 프랑스 장병들이 도버 해협을 건너게 하는데 성공한다.

    

작전 초기 영국이 추산한 구출 가능 병력은 4만5천명이었다고 한다. 놀란의 영화 ‘덩케르크에서는 최종 생존인원을 3만 정도로 추산한다.

    

나는 2015년 <역사는 승자가 바꾼다>라는 책을 현직 내과의사인 김양수 원장과 공동으로 펴냈다. 인류 역사에서 있었던 기록적 전쟁에서의 승패와 당시 지휘관들의 판단, 그리고 그에 따른 현실정치인들의 행보를 비교한 책이다. 그 책의 한 꼭지에 이 덩케르크의 미스테리가 기록되어 있다. 내용 일부는 앞에 인용한 것과 비숫하다.

 

그리고 나는 당시 히틀러의 진격중지 명령이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몰락을 가져온 하나의 계기가 되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즉 전쟁 지휘관의 판단미스는 전쟁의 패배는 물론 본인의 멸망도 초래한다는 결론으로 이 전쟁사를 끌어다 쓴 것이다.

    

당시 나는 만약 히틀러가 독일군에게 ‘닥치고 덩케르크로 진격!’이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과연 영국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라고 묻고, 전쟁의 양상은 지금 우리가 아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전쟁의 승패는 타이밍이기도 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어 “1940년 5월 도버해협을 건넌 30만 명의 연합군은 4년 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유럽 대륙으로 돌아왔으며, 이들의 압박에 의해 1945년 4월 히틀러는 자신의 지하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기록했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덩케르크 전투 당시 자신이 내렸던 진격중지 명령이란 덩케르크의 실수를 뼈저리게 후회하진 않았을까?“라고 자문했다.

    

▲ 덩케르크 영화 속, 구축함을 기다리는 영국군     © 위키트리

 

그런데 어제 내가 본 영화 덩케르크를 만든 놀란 감독의 당시 전쟁을 보는 눈은 나와 달랐다.

    

놀란은 덩케르크의 3일을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 군상의 ‘삶’에 대한 절절한 의지에 카메라 앵글을 맞췄다. 즉 이 영화를 ‘생존’에 맞춘 휴먼스토리로 만들어 낸 것이다. 전쟁영화를 전투에서의 승리와 패배가 아닌, 그 승리와 패배가 가져 온 역사의 결과물이 아닌 "생존"의 이야기로 바꾸어 냈다.

 

뒤에서 거대한 적군이 몰려 오고, 앞에는 거대한 바다로서 넘실거리는 물만 가득하고, 하늘에서는 수시로 적기의 기총소사가 쏟아지는 현실, 기다리는 구축함은 제 때 오지 못하고, 징발된 소형 배들이  오긴 하지만 소수의 몇명만 탈 수 있는 상황...구축함에 오르기 위해 만든 가교가 적의 포격으로 맥없이 파괴되면서 가교위에 있는 군인들이 하염없이 바다로 수장되는 현실...

 

40만 영불 연합군들은 발길에 채이는 동료들의 시신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그려야 하는 생존에 대한 욕구...놀란 감독은 이 절절한 이야기를 출연 배우들의 눈빛으로 구현했다.

    

배를 징발당한 민간인이지만 죽음과 싸우는 군인들을 살려내려는 절절한 휴먼스토리...그 와중에 뜬금없이 죽어가는 소년의 눈빛, 즉 독일 공군과 맞서면서 철수군대를 엄호하다 바다에 추락한 조종사를 살리고 그 때문에 죽어간 소년의 눈빛에서 놀란은 인간의 삶과 죽음의 교차를 말했다.

    

아들 친구가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추락한 조종사를 구하려고 총탄이 빗발치는 바다를 떠나지 않으며 사투를 벌이는 선장, 소년이 죽었느냐고 묻는 질문에 죽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선장의 아들...그들의 전쟁과 무관한 인간애를 놀란은 배우들의 눈빛으로 매우 섬세하게 그렸다. 특히 프랑스 사병 ‘깁스’를 두고 그린 삶과 죽음에 대한 놀란의 연출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좌초한 배 안에 갇혀 만조가 되기만을 기다리던 영국군들이 배가 뜰 수 있도록 만조가 되었으나 독일 공군의 기총소사에 배가 뚫려 배 안으로 물이 쏟아진다. 무거워진 배의 중량을 줄이려면 누군가는 배에서 나가야 한다. 이 극한 상황에서 희생자로 지목된 이가 ‘깁스’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영국군이 아니라는 이유다. 그러면서 군중은 그를 독일군 간첩으로 몰아간다.

 

영국군들은 깁스가 배 안에 갇혀있는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며 독일군 간첩으로 몬다. 영국군 깁스의 명찰이 달린 옷을 입었지만 말을 하지 않은 그를 영국군들은 그가 영어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그래서 그가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고 공격한다.

    

이에 ‘깁스’는 결국 자신이 프랑스 군인임을 고백한다. 그럼에도 영국군들은 그를 배에서 내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옹호하는 또 다른 일부는 프랑스군은 연합군이라며 옹호한다.

 

이런 가운데 자기의 목숨을 두고 싸우는 양측을 바라보는 그 ‘깁스’의 눈망울은 인간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생존’이라는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절절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 외에도 놀란은 이 영화에서 생존의 방식을 다양하게 그려냈다. 그가 그려 낸 생존의 이야기 속에는 거짓과 배신, 치명적 실수와 그것을 끌어안는 관용이 넘실거렸으며 소년의 희생과 조종사의 생존 등에서 삶과 죽음의 넘나듬이 가감없이 그려졌다.

    

좌초한 배가 물위로 떠오를 즈음 기총소사로 배에 구멍이 나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그 배의 총앙 구멍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건 희생정신을 발휘한 사람이 있는 반면, 배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면서 영국군이 아닌 ‘깁스’의 희생을 강요한 또다른 군상들의 심리...

    

총알 구멍을 막다가 마지막으로 탈출을 시도했을 때 이미 늦어 끝내 잡지 못한 사다리 장면과 검고 푸른 물의 이미지...놀란의 연출은 나를 이 영상에 지금도 가둬두고 있다. 나는 놀란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전쟁의 승패만을 관조하는 그냥 폴리널리스트일 뿐인가? 영화를 보고난 지 만 하루가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나는 놀란의 ‘휴먼스토리’ 덩케르크를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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