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도구로 이용할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15장 임의침묵(15-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1/08 [09:47]

"정치적도구로 이용할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

[연재소설]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피다, 15장 임의침묵(15-1)

이슬비 | 입력 : 2018/01/08 [09:47]

제15장 임의 침묵(2-1)

 

<지난 글에 이어서>

신불의 아이의 죽음. 아직 일곱 살이 되지 않은 어린아이의 죽음이었기에, 슬퍼할 이유조차 없었던 죽음. 그저 정옥과 추을이 아이의 부모가 될 자격이 충분하지 못하다여긴 신불들께서 윤희를 데려갔기에, 한씨가의 가주 정옥과, 정옥의 정실남편 추을이 죄인의 신분으로 밤낮없이 신불들께 빌어야 하는 일.


여섯 살. 어린 윤희의 죽음은 그렇게 허무하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씨가의 제2후계로서의 윤희의 삶도, 한 인간으로서의 윤희의 삶도 허무하게 지워졌다.


한씨가의 38대 제2후계 한윤희, 그녀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모두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사라졌다.
 

 
자리공은 인가 주위나 밭두둑에서 흔히 자라는 식물로, 그 열매가 산머루와 비슷하여 아이들이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어른들이라 하여, 산머루 열매와 자리공 열매를 쉽게 구분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산머루를 취급하는 상인이라 하여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아가씨, 고도의 상인들이 곧, 가라고루성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입니다.”
 
고도 상인들의 입성 소식을 들고 온 보현의 말에,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무너지려는 어깨를 애써 일으켜 세웠다. 으득. 서란의 잇새로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밖에 있느냐?”


, 아가씨.”
 
서란은 시녀를 불러 머리를 빗기게 했다. 시녀가 서란의 긴 머리를 참빗으로 조심조심 빗기고, 머리장식이 담긴 함을 하나 가져왔다. 서란은 함에 든 장신구들을 이리저리 살펴보다 흰 옥으로 만든 보요 끝에 하얀 연꽃 장식이 달린 은비녀와, 붉은 연꽃 장식 바로 아래에 붉은색 보요가 달린 은빗을 골랐다.


시녀가 단정하게 빗긴 서란의 머리를 절반쯤 땋아서 위로 틀어 올렸다. 시녀는 서란의 틀어 올린 머리에 비녀와 빗을 꽂고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보현.”


, 아가씨.”


어머니는 어찌하고 계시지?”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얼른, 말아 쥐었다. ‘어머니라는 존재를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서란에게는 가장 큰 공포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주의 눈을 어떻게든 피하는 것일 뿐.
 
항상 똑같으십니다. 사람을 잘 인식하지 못하시는지 하루 종일 허공만 바라보고 계세요. 그리고 이따금 밖에 나와 한참을 서 계시다 처소로 돌아가시고는 합니다.”


그게 전부야? 다른 건 안 하셔? 서책을 읽는다거나 자수를 놓는다거나…….”


.”


식사는 잘 하시고?”


아니요. 여전히 식사의 대부분을 남기고 계십니다.”
 
서란은 시녀를 시켜 침상 옆 협탁에 올려진 서안을 가져오게 했다. 서안의 서랍에는 엽낭과 패옥노리개가 들어 있었다.
 
이걸로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음식들을 좀 사다드려. 내가 기억하기로, 어머니께서는 단 음식을 좋아하셨어. 그러니 타래과라든가, 부용고라든가, 유밀과 같은 단 음식들을 사다드려.”
 
엽낭과 노리개를 받아 든 보현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을 나섰다. 서란은 몇 걸음 뒤에 시립해 있는 시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너도 그만 나가보거라.”
 
시녀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문을 나서려는 찰나, 서란은 잠깐하고 시녀를 불러 세웠다. 시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서란은 손짓으로 시녀를 가까이 오게 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자경이라 합니다.”


그래, 자경아, 너는 올해 몇 살이냐?”


올해 열여섯입니다.”


그렇구나. 그래, 너는 제화족이냐?”


, 그렇습니다, 아가씨.”
 
서란은 서안의 다른 쪽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진주가 박힌 은팔찌 하나와, 금가락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가지거라.”


……?”


이것을 가지거라.”
 
서란은 머뭇거리며 서 있는 시녀의 손에 팔찌와 가락지를 쥐어 주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든 시녀가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몰라 하고 있는 가운데, 서란의 작은 손이, 팔찌와 가락지를 쥔 시녀의 손 위로 포개졌다.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 머리를 빗겨준 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더구나. 하여, 지금이라도 작은 성의의 표시라도 할까 하여 주는 것이니 그리 황송해할 필요는 없다.”


아가씨…….”


, 어서 옷 속에 숨기거라. 이것은 너에게만 특별히 내리는 것이니 아무와도 나누어 가지지 말고. 알겠느냐?”

 
자경이 방문을 나서자마자 서란은 서안을 바닥에 내려놓고, 탁자 위에 엎드려버렸다. 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하다 서란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서란은 자경이 정옥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경이 정옥에게, 서란 자신이 어머니 유란의 끼니를 염려하여, 어머니의 시종을 시켜 평소 어머니가 즐기는 음식을 사오게 한 것을 고할 것이라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어디던가. 이곳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믿을 수 없는 한씨가였다. 그런 만큼, 이곳에서 시종들과 사병들, 노예들을 매수하는 일은 의외로 쉬웠다. 이곳에서는 재물만 쥐어주면 그 누구든 원하는 이를 매수할 수 있었으니까.
 
서란은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자경은 서란 자신과 정옥 사이에서 갈등하게 될 것이었고, 결국에는 한씨가의 제3후계 한서란을 선택하게 될 것이었다.
 

 
같은 시각, 유흔은 가라고루의 가장 유명한 요리집인 향일화에서 고도의 상인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고 있었다. 요리집의 진귀한 요리란 요리는 모두 내오게 한 것인지, 상 위에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요리접시들이 줄을 지어 놓여 있었고, 삼백족식으로 지어진 손님방마다 모두 옆문을 터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큰 연회장을 이루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호화로운 연회라니, 이것 참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수많은 연회에 참석해 보았습니다만, 지금처럼 호화로운 연회는 처음입니다. 이리 환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자님.”


인사 올리겠습니다, 도련님. 저는 향신료와 비단을 주로 취급하는 목향상단의 행수 진명이라 합니다. 그리고 여기 이쪽은, 제 안사람 되는 이로, 향화라고 합니다.”
 
공자님도련님이라는 호칭이 뒤섞여 불리는 것은 이곳에서나 한씨가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어느 곳에서든 마찬가지였다.


유흔은 한씨가의 36대 가주 한하윤의 양자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따라서 그가 한씨가의 유일한 36대 남자 후계였다.
 
다른 가문과 정략혼인을 시켜서 정치적 도구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아들이라는 것이지.’
 
스스로의 처지를 다시 되새기다 말고, 유흔은 상인들의 인사에 일일이 화답하며 덕담을 내려주었다. 지금 이곳에서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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