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탄 손 하나가 서란의 팔을 잡아왔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19장 혈염산하(血染山河)(19-1-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6/21 [10:23]

"까맣게 탄 손 하나가 서란의 팔을 잡아왔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19장 혈염산하(血染山河)(19-1-1)

이슬비 | 입력 : 2018/06/21 [10:23]

눈앞의 세상은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허공으로 솟구치는 붉은 피와, 땅바닥에 널브러지는 시체더미들, 아니, 고깃덩이들뿐이었고, 한 곳에 눈길이 가 있으면 그 반대쪽에서 잘린 손과 팔다리가 날아와 서란의 등이나 뒤통수를 때렸다.


서란은 주인을 잃고도 한동안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잘린 손과 팔다리들을 들여다보았다. 다시 원래의 주인을 찾아가려는 것인지 한동안 꿈틀거리던 그것들은 끝내, 서란의 앞까지 다가와 부들부들 떨어대다 곧 잠잠해졌다.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내지르는 비명소리와 기합소리, 병장기가 부딪치는 묵직한 쇳소리가 서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서란은 자신의 앞에 널브러지는 잘린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목이 잘려나간 몸뚱이는 서란의 앞으로 다가와 손목을 붙들었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며 몸뚱이를 걷어차버렸다.
 
유흔!”
 
서란은 유흔을 큰소리로 불렀다. 유흔이 곁에 있다면, 유흔의 곁에 있다면 자신은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서란은 군영 곳곳을 돌아다니며 유흔을 불렀다. 그러나 유흔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타레주!”
 
서란은 이번에는 백부장 타레주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 또한 어디로 간 것인지 보이지 않았다.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전 몸뚱이에게 붙잡혔던 손목을 문질렀다. 몸뚱이에게 잡혔던 손목에는 아직도 소름이 돋아 있었다.
 
서란이 서 있는 곳의 주위로는 막사 서너 채가 있었다. 그리고 누가 불을 지른 것인지, 아니면 아까의 불이 옮겨 붙은 것인지 막사들이 금세 불에 타기 시작했고, 각 막사마다 갑옷과 투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병사들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로 뛰쳐나왔다.
 
불이야!”


, 뜨거워!”
 
그들은 저마다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옷을 벗어던지고, 땅바닥을 굴렀다. 일부는 막사 옆에 있는 물통을 들어 온몸에 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러나 맹화유로 붙인 불에 물이 닿으면 불길이 더 크게 번지는 법. 물을 뒤집어쓴 병사들은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도와줘…….”


살려줘.”


어머니가 보고 싶어.”


아내와 애들이 있어. 모두 나만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는 아내와 애들에게 가야해.”


죽기 싫어. 나 좀 도와줘.”
 
잠시 불이 꺼졌다 싶었는지 몸에 아직 잔불이 남은 병사들이 서란을 향해 다가왔다. 서란은 그 모습을 보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악! 하고 비명을 지르며 귀를 막은 서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려줘.”
 
까맣게 탄 손 하나가 서란의 팔을 잡아왔다. 서란은 으으으, 하고 공포에 질린 신음소리를 내다, 머리에 꽂은 은비녀를 빼내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손등을 찔렀다.
 
크윽!”
 
자신을 잡은 손의 힘이 약해진 것을 서란은 느낄 수 있었다. 서란은 손등에서 비녀를 빼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힘껏 찔렀다.
 
아악!”
 
까맣게 탄 손이 은비녀가 박힌 눈을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서란은 얼른, 아직 물이 남아 있는 물통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주위에 끼얹었다. 더욱더 거세어진 불길이 물의 흐름을 타고 병사들에게 옮겨 붙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고 서란은 얼른,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유흔!”
 
서란은 불길 속 이곳저곳을 헤매며 유흔의 이름을 불렀다. 곳곳을 에워싼 불길이 서란의 주위에서 사방을 좁혀왔다. 몸에 걸친 흉갑은 이미 불에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서란은 흉갑을 묶고 있는 끈을 마키리로 잘랐다.
 
하나, , !”
 
서란은 가장 앞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불길 속을 빠져나오자마자 서란은 깃발을 멀리 던지고, 입고 있는 군복 배자 또한 벗어버렸다. 다행히 근처에 있던 무너진 깃발을 뒤집어쓰고 뛰어든 까닭에 화상을 크게 입지는 않은 듯했다.
 
유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어디 있기에 나를 이렇게 혼자 두는 거야? 유흔, 나 두고 어디 가지 말랬잖아. 그리고…… 나 두고 어디 안 간다고 했잖아. 유흔, 유흔!’
 
부상을 입어 자리에 주저앉아 있던 적 병사 하나가 서란의 눈에 들어왔다. 서란은 그 병사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복부와 오른쪽 허벅지에 자상을 입은 그녀는 한 손으로 복부에서 쏟아지는 피와 내장을 누르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서란은 꼼짝하지 않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산발이 된 긴머리를 목 뒤로 대충 넘기다 말고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앞에 있는 상대가 어린아이라는 것에 갈등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녀는 자꾸만 욕지기를 내뱉었다.
 
한씨가년놈들, 데려온 것인가, 이런 어린아이까지?”


…….”


아직 목덜미에 문신조차 새기지 않은 어린아이가 아닌가. 대체 무슨 정신으로……!”


어린아이 아니야
 
서란은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녀가 말도 안 된다며 입을 열려 했다. 서란은 다음 말을 이어가며 그녀의 말을 막아버렸다.
 
나는 한씨가의 제2후계 한서란이야.”
 
흉갑끈을 자르느라 아대를 풀어 마키리를 꺼낸 탓에 마키리는 그대로 손에 들려 있었다. 서란은 마키리를 고쳐 쥐었다. 마키리의 칼집은 아까 불길 속에 흉갑과 함께 던져두고 온 터였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거, 처음 겪는 거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렇게 미적거려?”
 
서란의 말에 깜짝 놀란 그녀가 창을 들어 서란에게 던지기도 전에, 서란은 마키리를 그녀의 복부를 향해 던졌다. 마키리는 그대로 날아가 복부에 꽂혔고, 서란은 그 틈에 재빨리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마키리를 빼냈다.
 
나는 살아야해. 살아서 유흔을 찾아야해.”
 
서란은 빼낸 마키리를 더욱 더 고쳐 쥐고 그대로 목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단도에 목이 찔린 그녀가 입에 피를 머금었고, 서란이 마키리를 빼내자마자 그 피는 서란의 얼굴 위로 떨어졌다.
 
유흔!”
 
서란은 유흔을 찾아 끝없이 돌아다녔다. 유흔을 찾아다니는 동안, 서란은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적 병사들을 만났다. 아니, 돌아다니며 만난 적 병사라고 해봐야 고작 3, 40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아직 어린 서란의 눈에는 그마저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숫자로 보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적 병사들과 마주칠 때마다 서란은 깨달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엉키고 엉키는 이 전장에서 검법 따위는 아무 쓸모도 없다는 사실을. 그저 살기 위해 앞으로 창칼을 내질러 찌르고 베는 것만이 있을 수 있음을.
 
서란은 마주친 적 병사들을 검으로 찔렀다. 때로는 검을 빼내어 본국검법의 초식을 이용해 적 병사들을 베어 넘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마키리로 그들의 복부나 허벅지, 목을 찌르기도 했다. 그렇게 서란은 살아남기 위해, 유흔을 찾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또 죽였다.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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