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을 삼키며 서란은 유흔을 부르고 불렀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19장 혈염산하(血染山河)(19-1-2)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7/03 [09:44]

"울음을 삼키며 서란은 유흔을 부르고 불렀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19장 혈염산하(血染山河)(19-1-2)

이슬비 | 입력 : 2018/07/03 [09:44]

<지난 글에 이어서>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 동안에도 서란의 얼굴은 한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어린아이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이 처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서란은 겉으로는 평온해보이면서도,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삼키며 서란은 끊임없이 유흔을 부르고 또 불렀다.
 
유흔, 대체 어디 있는 거야? 나 무서워. 나 지금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나 좀 데려가줘, 유흔. 나 좀 데려가줘.”
 

 
치열했던 전투도 어느덧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곧 동이 터오려는지, 동쪽 하늘 끝이 붉게 물들어오고 있었다. 유흔은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급부대원들을 제외한 모든 살아남은 군사들이 유흔의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유흔은 전열을 정비할 것을 명하고, 서란을 찾아 나섰다. 서란을 찾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유흔은 불탄 천막들을 뒤로 하고 멍하니 서있는 서란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야!”
 
유흔은 서란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서란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서란의 눈에는 초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화야……?”
 
유흔은 서란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들었다. 피를 온통 뒤집어쓴 것인지 서란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피에 젖어 있었고, 양손에는 각각 피 묻은 검과, 피 묻은 마키리가 들려 있었다.


유흔은 옷자락에 침을 묻혀 서란의 얼굴에 굳어 있는 피를 닦아주었다. 눈처럼 하얀 서란의 얼굴에는 전날의 피로가 얼룩져 있었고, 왼쪽 눈 바로 옆에는 칼에 찔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화야.”
 
유흔은 손을 들어 서란의 상처자국을 쓰다듬었다. 칼날이 조금만 더 위쪽을 찔렀더라면 실명했을 위치였다.
 
흉이 져서 못나지겠네. 화야, 가서 치료부터 받자. ?”


유흔.”
 
유흔이 서란의 팔을 잡아끌었다. 서란은 초점 없는 눈으로 유흔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람을 찌르면 원래 피를 토해?”


……!”


그리고 사람을 찌르면 원래 다들 그렇게 놀란 얼굴을 해?”


……!”


그리고 말이야, 사람은 왜 그렇게 쉽게 죽어?”
 
내가 사람을 찔렀다고, 그리고 내가 사람을 찌를 때마다 그들은 모두 입에서 피를 토하고,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았다고, 무엇보다 그들은 자신의 칼에 너무도 쉽게 죽었다고. 그리 말하는 서란의 곁에서 유흔이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서 가자며 서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 유흔이 해줄 수 있는 전부였다.
 
우리 화야 배 안 고파?”


. 배 안 고파.”


목도 안 말라?”


, 목은 좀 말라. 나 물 줘.”


그래그래. 성 안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우리 화야 물부터 줄게. 다른 건? 졸리거나 피곤하지는 않아?”


, 나 졸려. 나 잘래, 유흔.”
 
유흔은 아대 끈을 잘라, 흐트러진 서란의 머리를 대충 묶어주었다. 가라고루성으로 돌아가면 서란의 비녀와 뒤꽂이를 몇 개 더 사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유흔은 서란을 품에 안아들었다.
 

 
간밤의 기습으로 인해 신씨가 군영은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다. 죽은 자들의 시체가 사방에 널브러지고, 다친 자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나고현성 앞 벌판의 하늘을 울리는 가운데, 유흔이 이끄는 본대와 척후부대가 나고현성문을 들어섰다.


등 뒤에서 성문이 닫히려는 순간에 유흔은 고개를 돌려 성문 너머 신씨가 군영을 바라보았다. 신씨가의 선봉대가 궤멸되다시피 한 지금, 가야성에서 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충분히 쉴 수 있으리라.
 
배정받은 처소에 여장을 푼 유흔은 계집종들을 시켜 목간통과 목욕물을 준비하게 했다. 건장한 사내종 둘이 목간통을 들고 오고, 계집종들이 뜨거운 물과 찬 물을 번갈아 가져오며 목욕을 준비하는 동안, 서란은 유흔의 품에 기대 앉아 노예들을 노려보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서란의 모습에, 겁에 질린 어린 계집종 하나가 뜨거운 물이 든 나무대야를 놓치며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다른 계집종에게 물을 끼얹고 말았다.
 
신기하다.”
 
서란의 목소리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했다. 서란은 까칠까칠한 유흔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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