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론 평온한 얼굴, 속으론 흐느껴 통곡했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0장 혈염산하(血染山河)(20-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7/06 [10:57]

겉으론 평온한 얼굴, 속으론 흐느껴 통곡했다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0장 혈염산하(血染山河)(20-1)

이슬비 | 입력 : 2018/07/06 [10:57]

신씨가의 원군이 도착한 날부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투는 날로 치열해졌다. 양쪽 모두 쇠뇌와 석포, 삼궁노를 쓰며 공방전을 벌이는 가운데, 신씨가 군사들은 운재와 충차를 대놓고 성벽을 기어오르고, 성문을 부수려 시도하였고, 이에 맞서 나고현성벽 위에서는 끓는 기름이며 끓는 물, 불 붙은 나뭇단, 돌과 바위, 기와 등을 있는 대로 던지고, 성벽 아래에서는 건장한 병사들과 노예들이 서로 손에 손을 잡고 성문이 열리는 것을 막고 있었다.
 
석포를 날려라!”


쇠뇌를 쏴라!”
 
양측 모두 상대편에서 날아드는 돌덩이와 화살로 정신이 없었고, 이 가운데에도 유흔과 유향은 지휘소로 쓰이는 남문의 망루 위에 꼿꼿이 서서 적진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르강으로 가시지 않고요.”
 
아무르강의 사정이 더 급할 터인데 어찌 이곳으로 왔느냐 타박하는 유향의 말에 유흔은 적진 깊숙이 묻혀 있는 쌍검기를 가리켰다. 붉은 바탕에 황금빛으로, 서로 엇갈려 있는 두 자루의 검을 새겨 넣은 문장이 그려진 저 깃발은 분명, 신씨가 가주의 깃발이었다.
 
저 깃발 때문이오.”


?”


지금 이곳에 신씨가 원군을 이끌고 온 자가 누구라 했소?”


그야…….”
 
척후들의 보고에 의하면, 신씨가 원군을 이끌고 온 지휘관은 신씨가 가주 신다희의 정실남편 신백연이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인지, 한동안 신백연이라는 이름을 곱씹던 유흔이 이윽고, 유향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번에 잡아야할 상대는 김서인 따위가 아니오.”


하면……?”


나는 이번에 기필코 신다희를 잡을 것이오.”
 
뜻 모를 말을 내뱉으며 유흔은 성벽 아래 저 멀리로 눈을 돌려, 태수부를 내려다보았다. 성벽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태수부 관저. 지금 저곳에는 서란이 있을 것이었다.
 
전투가 날로 치열해감에 따라, 유향은 역대 키야트 아이누의 지휘관 중 그 누구도 내린 적이 없는 결정을 내렸다.
 

 
키야트 아이누는 본래, 종족의 모든 구성원들이 전사인 종족. 하여, 신분이 높든 낮든, 장애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현재 임신을 하였든 그렇지 않든 모두 똑같이 군역을 졌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그런 키야트 아이누이기에, 키야트 아이누의 모든 구성원들은 싸울 수 없는 것을 죽음보다 더한 수치로 여겼고, 싸울 수 없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빈번했다.
 
하지만 유향은 절대 키야트 아이누의 그러한 방식에 찬성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싸울 수 없는 그날에는 지키면 되고, 지킬 수 없는 그날에는 항복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는 유향은 신씨가와의 전투가 치열해질수록 누구보다 괴로워했다.
 
쇠뇌와 석포가 성벽 위로, 또 성 안으로 날아들 때마다 가장 먼저 화살과 돌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걸음이 느려서 빨리 피할 수 없는 노인들과 아이들, 장애인들과 임산부들이었고, 화살에 온몸이 꿰뚫리고 커다란 돌에 깔려 뇌수가 튀어나오고 온몸의 뼈와 관절이 으스러진 그들의 시신을 볼 때마다 유향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끝내 오열했다.
 
그러기를 사흘, 유향은 마침내 노인들과 아이들, 장애인들과 임산부들을 모두 모아 태수부 관저의 빈 방마다 집어넣고, 밖에서 자물쇠를 잠그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만일에 대비해 그들을 지킬 군사 열댓을 남겨 놓았는데, 그중에는 검은 군복을 입은 서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눈의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다. 상처가 더디 아무는 겨울이라 하나, 새살이 차오르는 속도는 지나치게 느렸다. 서란은 손으로 상처를 쓰다듬었다. 고래 힘줄로 만든 실로 꿰매놓은 상처가 자꾸만 따가웠다.
 
석포의 사정거리가 꽤 긴 것인지, 돌덩이들이 태수부 주위로도 날아와 떨어지고 있었다. 서란은 고개를 들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비를 올려다보았다. 관저 주위를 지키던 병사들 몇이 온몸에 화살을 고슴도치처럼 맞고 쓰러졌다.
 
참 쉽게도 죽는구나.’
 
서란은 아무런 감흥이 없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사람을 처음 찌른 그날 이후로, 서란은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보아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굳이 어떤 느낌을 찾자면, 큰 고깃덩이가 옷을 입고 쓰러져 있는 기괴한 광경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긴, 죽고 나면 모두 고깃덩이니까.”
 
스스로의 생각에 애써 납득하며 서란은, 아무 의미 없는 손짓으로 자물쇠를 한 번 들었다 놓았다. , 하고 자물쇠가 나무 문살에 부딪치는 소리에 놀란 것인지 방 안에서 아이들이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 시끄러워! 좀 조용히 해!”
 
정신 사납게. 뒷말을 덧붙이고도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서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입 닥치지 못할까!”
 
서란의 목소리에 서려 있는 싸늘함이 방 안으로도 전해진 것인지,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아까보다 작아져 있었다.
 
안에 누구든, 내가 들어가기 전에 입을 닥치는 게 좋을 거다. 수틀리면 밖에 널려 있는 고깃덩이들보다 더 잘게 다져줄 테니.”


…….”


그러니 적들도 아닌 내 손에 죽기 싫다면 알아서 입을 닥쳐라.”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서란은 마키리를 뽑아 문살을 한 번 찍고 칼집에 집어넣었다. 찢겨진 문풍지 사이로, 겁에 질린 사람들의 눈동자가 보였다.
 

 
전투가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서란은 자신이 지키게 된 이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려 애썼다. 일부러 더 모질게 대했으며, 일부러 더 독설 가득한 말들을 내뱉었다.


그러한 서란을 두고 백부장 타레주가 어찌 그리 사람들에게 모질게만 대하느냐질책하였지만, 서란은 이 한 마디만 던질 뿐이었다.
 
그래야만하니까.”
 
그래야만하니까. 그렇게 해야만 내가 덜 아프니까. 덜 무서우니까. 속말은 목구멍 깊숙이 넘겨버리고, 서란은 죽은 이들의 시신을 일렬로 늘어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하나같이 병졸이었거나 백성들이었던 이들의 시신은, 죽음의 순간에 느꼈을 고통과 두려움으로 치떠진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입가에 굳은 피조차 닦지 못한 채 낡은 천들로 덮여 있었다.
 
서란은 젖은 천으로 죽은 이들의 입가에 굳은 피를 닦아주었다. 피를 닦아주고 눈을 쓸어 감겨주며 서란은 시신들 사이에 향초를 피웠다. 시취(屍 臭)를 막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춥고 혹독하기로 유명한 북해도의 겨울. 그러니 당분간은 시신이 썩어서 부패할 일은 없을 터였다.
 
고깃덩이. 서란은 시신들을 그리 불렀다. 옷을 입고 쓰러진 고깃덩이 하나, 또 하나, ……. 어찌 들으면 잔인하고 섬뜩한 말이었지만, 어찌하랴. 서란의 눈에는 그리 보이기만 하는 것을. 또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을.
 
그러나 서란은 고깃덩이라는 말을 내뱉고 나면 항상 가슴속으로 울었다. 겉으로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 가슴속으로 끊임없이 흐느끼며 세상 누구보다 더 크게 통곡했다. 아무리 잔인해 보인다 하여도 서란은 고작 열한 살 어린아이에 불과했고, 그렇기에 여느 아이들과 같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살고 싶다.’
 
서란은 이따금 제 손으로 목을 감싸거나 팔뚝을 벅벅 문지르고는 했다. 그럴 때면 으레 시체들이 하나하나 불길 속으로 던져졌고, 서란은 시체들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을 목격해야만했다.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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