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의 전투란 곧, 지옥의 아귀다툼"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1장 혈염산하(血染山河)(21-2)

이슬비 | 기사입력 2018/08/13 [10:58]

"비 오는 날의 전투란 곧, 지옥의 아귀다툼"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1장 혈염산하(血染山河)(21-2)

이슬비 | 입력 : 2018/08/13 [10:58]

<지난 글에 이어서>

그날따라 갑자기 때 아닌 소나기가 쏟아졌다. 북해도는 겨울이 오면 봄이 중간쯤 지나기까지 쌓인 눈이 녹지 않을 정도로 추운 날씨를 자랑했다. 하니, 겨울에 비 따위가 올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이 부서진 성문을 빠져나가는 그 순간, 때 아닌 소나기가 쏟아졌고, 소나기는 곧 세찬 장대비로 변했다. 후드득, 툭 하는 빗방울 소리에 유흔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온통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이, 마치 해의 신 사라타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양새라 유흔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곳곳이 부서지고 깨진 망루의 기와를 두드리는 빗방울의 기세는 점점 더 거세졌고, 곳곳에 널린 시체에 비가 쏟아져 비릿한 비 내음과 코를 찌르는 시취가 섞인 지독한 냄새가 땅 위에 피어올랐다.
 
때 아닌 빗줄기에 백연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날씨에는 활시위를 걸 수 없었다. 비가 내리면 활시위가 풀어지고, 짐승의 뿔에 나무와 아교를 섞어 만든 활의 몸체가 틀어지니 비가 오는 날의 전투란 곧, 지옥의 아귀다툼과 다름없는 백병전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 이겨가는 마당에 귀찮게 되었군.”
 
유흔의 5천 군대는 곧 철수할 터였다. 그리고 성문도 부서져 있었다. 그러니 갑자기 내리는 비만 아니라면 좀 더 쉽게 싸울 수 있을 터였다.
 
, 어쩔 수 없군.”
 
백연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며 푸른 깃발을 올려 궁수들을 뒤로 물렸다.
 
이때였다.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부서진 성문을 빠져나오는 한 무리의 인영이 백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뭐지……? 백연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았다.
 
뭐야, 저건?’
 
성 밖으로 나오는 이들은 노인이나 아이들, 장애가 있거나 뱃속에 아이를 가진 임부들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의 손에는 무기라고는 들려 있지 않았다.


맨손으로 성 밖으로 나온 이들은 일제히 신씨가 군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신씨가 군사들은 아무렇지 않은 동작으로 그들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베어냈다.


그리고 그런 신씨가 군사들의 몸짓과 표정에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들에 대한 귀찮음과 짜증이 역력하게 배어 있었다.

하하하하하하!”
 
백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광소를 터뜨렸다. 오랜만에 배를 쥐고 땅바닥을 굴러가며 미친 듯이 웃은 백연은 큰소리로 유향을 비웃기 시작했다. 천하의 한씨가, 그런 한씨가의 가신가문 사람인 유향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책이라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느냐며 비웃는 백연의 위로, 어느새 폭우로 변한 장대비가 내리꽂혔다.
 
고집만 센 줄 알았더니 멍청하기까지 한 것이던가? 하긴, 융통성 또한 총명함의 다른 이름 중 하나라면 그러할 수도 있겠지.”
 
유흔은 성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맨몸으로 적들에게 달려들다, 적들의 창칼에 찔려 목숨을 잃는 저들의 모습은 제화족 사회에서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노인과 아이, 장애가 있는 자와 임신한 여성들은 죽이지 않는다는 삼백족의 불문율과는 달리, 제화족은 눈앞의 상대가 그 누구든 찔러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야만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이, 그리고 종족 전체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제화족은 종족 전체가 전사인 탓에 상대가 자신보다 약한 자라 해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러니 우리는 저들을 방패로 삼은 것이고, 이제 방패의 효용이 다했으니 칼을 빼들 때가 되었지.”
 
유흔은 다시 검은 깃발을 올렸다. 철수를 보류한다는 명령이 유흔의 5천 군대 전체에 하달되었다.
 

 
낮부터 이어진 전투는 다음날 새벽이 올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성을 빠져나간 이들이 모두 스러진 뒤, 나고현성 안에 있던 모든 군사들과 신씨가 군사들은 성문 앞 벌판에서 대치했다. 그저 서로가 서로를 찌르고 베는 피비린내 나는 혈투는 쉬이 승부가 날 줄 몰랐고, 벌판에는 사상자들의 시신과 다친 몸뚱이가 널브러지고, 붉은 피가 강을 이루어 흘렀다.
 
그 사이, 유흔은 적진 깊숙이 있던 백연의 가까이로 다가드는데 성공했다. 달려드는 나고현성 군사들을 베어내느라 미처 유흔의 공격을 피하지 못한 백연은 유흔이 던진 밧줄에 목이 엮였고,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도 전투를 지휘하다 유흔의 칼날에 몇 군데를 찔려 붉은 피를 불컥불컥 쏟았다
 <다음 글에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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