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신 레이나 축복이 깃들면 아인 여자가 되고"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3장 폐월수화(閉月羞花)(23-1)

이슬비 | 기사입력 2018/11/30 [04:20]

"달 신 레이나 축복이 깃들면 아인 여자가 되고"

[연재소설] 홍매지숙명 피다, 제23장 폐월수화(閉月羞花)(23-1)

이슬비 | 입력 : 2018/11/30 [04:20]

<지난 글에 이어서>

을 먹었던 것은 그날 밤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똑같이 아침이 시작되었으며, 여느 때와 똑같이 평화로운 날이 될 듯하였다.

 

미쳐버린 어머니는 스스로 무엇 하나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아니, 그 어느 것도 스스로 하려 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산해진미가 차려져도, 유구에서 건너온 귀한 조후로 지은 옷이 목함에 담겨 와도 어머니는 그것들을 그저 흘깃 바라보기만 할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가 유일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은 오직 딸 서란이었고, 스스로 하려 하는 유일한 것을 꼽자면 서란을 매질하는 것 정도일 것이었다.

 

그날도 스스로 일어나려 하지 않는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어제 저녁, 가주를 뵙고 온 어머니는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앉아 있다 시녀들의 손길에 마지못해 잠이 들었고, 그런 어머니를 깨우기 위해 시종들이 부지런히 대야며 겨비누, 수건을 날랐다.

 

일어나세요. 이미 해가 중천에 떴답니다. 오늘은 날이 정말 포근해요, 유란님. 서란 아가씨와 함께 산책이라도 나가지 않으시겠어요?”

 

내가 왜 일어나야하지?”

 

어깨를 흔드는 시녀들의 손길에 눈을 뜬 어머니는 멍한 눈길로 그렇게 물을 뿐이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시종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이불을 젖히고, 어머니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오늘은 난향을 풀었어요. 어제 너무 독한 용뇌향으로 목욕을 하셔서 오늘은 조금 순한 난향으로…….”

 

시녀들이 어머니를 부축해 의자에 앉히고 손과 발, 얼굴을 씻기기 시작했다. 겨비누를 발라 구석구석 깨끗이 씻기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나자, 다른 시녀들이 어머니의 침의와 속곳을 벗기고 깨끗한 속곳을 입혀주었다. 간밤에 악몽이라도 꾼 것인지, 어머니의 침의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섯 살, 어린 서란은 미리 일어나 혼자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등 뒤에 카이문이 새겨진 진한 청색 포를 입은 서란에게 늙은 시녀 하나가 다가와 머리를 빗겨주었다.

 

사흘 전부터 유란님의 처소에서 일하게 된 분이할미라고 합니다, 아가씨.”

 

…….”

 

본래 이름은 그저 분이인데, 나이가 들어 주름도 늘고 쪼글쪼글해지니 다들 할미라고 부르더군요. 그래서 이제는 저도 그냥 분이할미라 불러달라고 하고는 합니다.”

 

시녀 하나가 어머니의 옷을 가지고 나타났다. 언제나 삼백족 복식을 고집하는 어머니는 오늘도 새하얀 포 하나만을 몸에 걸쳤다.

 

어머니가 단장을 마치는 동안, 서란은 면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제 어머니에게 맞은 뺨에는 아직도 시퍼런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서란은 눈썹 주위에 맺힌 피멍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일주일 전에 맞은 상처임에도 불구하고, 멍은 빠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어머니의 단장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어머니의 머리를 참빗으로 빗어 가지런히 늘어뜨린 시녀가 어디선가 만들어온 화관을 씌워주려 했으나, 어머니에게 맞고 그만두어야했다. 마지막으로 은으로 만든 소박한 귀고리를 단 어머니가 서란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란은 면경을 통해 그 모습을 바라볼 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였다. 바닥에 흘러내린 붉은 핏방울이 면경을 통해 서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러나 서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별안간, 서란을 향해 다가오던 어머니의 걸음이 멈췄다. 서란은 시선을 면경 아래로 내렸다. 면경 아래에는 어머니의 하얀 포에 묻은 붉은 피가 비춰지고 있었다.

 

……?’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바닥에 핏방울이 떨어질 정도로 아래에서 피를 쏟는다면, 어머니의 몸이 많이 안 좋다는 뜻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유란님.”

 

시녀들이 어머니의 포를 벗기고, 속곳을 끌어내렸다. 속곳에도 역시 붉은 피가 선명하게 묻어 있었다. 서란은 면경을 통해 어머니의 아랫도리를 살펴보았다. 무성하게 난 검은 털들에도 핏방울이 조금 맺혀 있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이름이 분이할미라던 시녀가 물과 밑씻개로 어머니의 아랫도리를 닦아주고, 다른 시녀가 기저귀처럼 생긴 서답을 가져와 아래에 채워주었다.

 

지긋지긋하구나.”

 

어머니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처연해보였다. 그러나 서란은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직 월경이 끊길 연치도 아니시건만, 어찌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러니 지긋지긋하다는 말이다. 이 목숨이 언제까지 살아 모든 걸 지켜봐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니냐.”

 

유란님…….”

 

시녀들과 시종들이 일제히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서란을 향해 다가오는 어머니의 젖가슴은 살짝 늘어져 있었다.

 

가슴이 솟고, 첫 월경혈을 흘리고. 달의 신 레이나의 축복이 깃들면 그렇게 아이는 여자가 되고, 여자는 언젠가 어머니가 되지.”

 

…….”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지도 몰라. 어머니가 된다는 것은 내 딸이 누군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만 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어느새 서란의 등 뒤로 다가온 어머니가 서란을 살포시 끌어안았다. 젖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이 목 뒤로 서늘하게 와 닿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도했다. 부디 딸이 아니기를. 부디 아들이기를.”

 

…….”

 

네가 태어나고, 너에게 젖을 물릴 때마다 기도했다. 카무이신이시여, 사라타시여, 레이나시여, 제발 이 아이만은, 내 딸만은 빼앗아가지 마세요. 아아, 리아나, 우리 아이 내게서 빼앗아가지 말아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을 속삭이던 어머니의 볼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서란의 뺨을 쓰다듬으며, 더욱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 한 마디를 밀어냈다.

 

샤르휘나. 내 딸아.”

 

…….”

 

너는 부디 어머니가 되지 말아라. 너는 나처럼 어머니가 되지 말아라.”

 

 

샤르휘나, 너는 어머니가 되지 말아라.

너는 나처럼 어머니가 되지 말아라.

 

그날 밤 딸에게 독을 먹일 거였으면서 어머니는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그날 아침, 어머니는 이미 딸에게 독을 먹일 결심이 서있는 상태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말을 했던 것일까.

 

이왕 독을 먹일 거면 곱게나 먹일 일이지.’

 

살려달라 빌어보아도 소용없음을 안 것은, 그리하여 어머니에게 빌어볼 생각도, 내가 왜죽어야 하느냐 반박해볼 생각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은 어쩌면 어머니의 그 말 한 마디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다시 어머니의 눈동자가 떠올라버렸다. 텅 비어 있으되, 항상 울고 있었던 그 눈동자가 떠올라 서란은 자신도 모르게 푸흐흐,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그렇게도 내가 미웠단 말이야?’

 

그날 밤 독을 먹일 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리라. 너는 어머니가 되지 말아라.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유도, 맥락도, 의미도 모르겠는 그 말은 아직까지 서란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보라고? 뭐라고 반박이라도 해보라고? 당신이 그럴 기회를 안 줬잖아. 어머니, 당신이 내게서 그럴 기회를 앗아갔잖아.’

 

어머니의 손에 들고 있던 목함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목함을 열자 안에 들어 있던 자그마한 유리병. 그리고, 그리고...

<다음 글에서 계속>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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