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8-1) "네가 내 가주다"

이슬비 | 기사입력 2019/10/07 [10:04]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여신의 춤(28-1) "네가 내 가주다"

이슬비 | 입력 : 2019/10/07 [10:04]

 <지난 글에 이어서>

 

독을 삼킨 아이는 쉬이 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듯이. 아직은 더 살고 싶다는 듯이. 독이 혈맥을 따라 몸 곳곳에 흘러 장기가 헐고 뒤집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아이는 손톱을 바닥으로 벅벅 긁으며 견디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고. 아니, 반드시 살아야 한다고. 아니, 반드시 살 거라고. 살아서 가주가 될 거라고. 그러니 자신은 이대로 죽을 수 없다고. 아이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독이 장기를 뒤집고 지나갈 때마다 검붉은 피가 목구멍으로 울컥 솟았다. 자신의 장기를 뒤집고 나오는 피를 입으로 뱉어내면서도 아이는 제 어미를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온몸을 경련하게 만드는 고통에 눈의 실핏줄이 터져나갔지만 아이는 한없이 검고 깊은 눈으로 어미를 노려보았다. 마치 당신이 원하는 나의 결말이 이런 것이냐 묻는 듯한 그 눈동자에 아이의 어미는 크게 오열했다.

 

누가 없느냐! 밖에! 누가! 누가 좀!”

 

아이가 아직 버티고 있는 것에 동요한 어미가 큰소리로 사람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자신의 딸이 독이 주는 극악한 고통을 견디는 것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어미는 끝내 아이를 끌어안고 세상이 떠나가라 통곡했다.

 

살아봤자 무얼 하려 그러느냐! 살아봤자 어차피 죽을 터인데! 그냥 내 손에 죽는 게 낫지 않겠느냐, 아가야. 아가야, 뭐라고 대답 좀 해보려무나. 아가야, 서란아, 불쌍한 내 딸아.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새벽의 광명아. 내가 낳은 하나뿐인 내 딸아.”

 

아이의 어미는 마키리를 가슴에 품고 있었다. 딸이 숨을 거두면 자신도 더 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식을 죽인 어미가 어찌 하늘 아래에 살 수 있겠으며, 어찌 땅 위에서 숨을 쉴 수 있을까.

 

어미가 오열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어미의 어깨를 손으로 짚고 손톱을 박아 넣으며 숨을 거두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숨을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 어미는 더욱 크게 울부짖으며 사람을 찾았고, 끝내 처소의 방문이 열리고, 유흔의 시위들이 처소 주위와 방 안팎을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오라버니…….”

 

상황 설명 따위가 없어도 조금 전 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하는 것은 쉬웠다. 유흔은 아직 숨을 놓지 못하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고작 다섯 살, 작은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아이의 온몸은 물론이고, 마룻바닥과 어미의 옷자락마저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어미의 어깨에 손톱을 박아 넣은 실핏줄 터진 눈동자는 벌겋게 달아올라 제 어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살려주어. 내 딸 좀 살려주어.”

 

여인의 말에는 관심도 없었다. 유흔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오직 작은 아이 하나뿐. 유흔은 아이에게 물었다.

 

살고 싶으냐?”

 

.”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가 대답했다. 유흔은 재차 물었다.

 

살아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

 

가주가 될 거야.”

 

더 이상 물을 것도 없었다. 유흔은 아이의 작은 몸을 안아들었다. 처소를 나서는 유흔을 아이의 어미가 울며불며 따라 나왔지만 유흔은 아이의 어미가 아이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시위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제부터 네가 내 가주다. 그러니 반드시 살아라, 카무라 프리 샤흐뤼나. 이제 너만이 나를 죽여줄 수 있을 테니…….”

 

이제 아이가 유흔의 가주였다. 한씨가의 39대 제3후계 한서란,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 그녀가 이제 자신의 가주였고, 주군이었다.

 

그 말을 하는 유흔의 눈은 마치 짐승이 먹잇감을 노리듯 어둠 속에서 반짝이며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작고 검은 눈이 너무 낯설게 느껴져 추을은 자신도 모르게 헙, 하고 숨을 들이켜야 했다.

 

나의 가주는,”

 

유흔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의 주인은,”

 

…….”

 

나의 새벽의 광명은,”

 

유흔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심장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유흔은 여유롭게 추을을 몰아세우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반드시 가주가 될 것이오. 그대의 딸들의 숨을 모두 앗아가고.”

 

…….”

 

그러니 얌전히 있으시오. 그 가벼운 목숨이나마 부지하고 싶거든.”

 

유흔에게 그 말을 들은 것이 언제였던가. , 유흔에게 그 말을 들은 것은 윤희가 죽은 그날이었다. 자리공에 중독된 윤희는 끝내 그 독을 견뎌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고, 서란은 그날로 제2후계가 되어 금족령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그날 밤, 유흔은 추을을 찾아와 그 말을 전했다.

 

나의 카무라 프리 샤르휘나는, 나의 새벽의 광명은 내가 선택한 주인이오. 그러니 자여 따위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아.”

 

그러면서 유흔은 한씨가에 후계혈전이 도입된 이유를 다시 한 번 설명하며, ‘지지자들의 준동에 휘말려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는 사례에 유독 힘을 주었다. 마치 자여를 준동해 쓸데없는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는 듯이.

 

그러나 서란은 고작 방계 출신의 후계일 뿐이었고, 자여는 가주의 정실부군의 딸인 어엿한 정후계였다. 그러니 자여에게 지지자가 몰려야 하건만 어찌 된 일인지 지지자들은 서란에게 몰리고 있었다.

 

하나, 서란은 정후계가 아니었기에 아직은 자여 쪽의 지지자들이 더 많았고, 자여에게 충성하는 시종장과 시종들은 자여가 열여섯이 되기 전에 눈엣가시인 서란을 제거하기 위해 꾸준히 자객을 보냈다. 지금 서란에게 몰리는 지지자들이야 서란이 죽기만 한다면 자여에게로 돌아설 테니까.

 

하지만 서란은 그때마다 여유롭게 그들을 죽이고 그 시신을 자여의 방문 앞에 쌓아놓기를 반복했고, 이제 추을은 열네 살이 된 서란이 더 나이를 먹기 전에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은 절대 실패할 수 없는 계획을 세워놓았으니 곧 놈들로부터 서란을 죽였다는 보고가 들어올 것이었다.

 

한데, 아까부터 왜 자꾸 윤희가 죽은 그날 밤의 일이 떠오르는 것일까. 무엇인지 모를 불안감에 몸을 떠는 추을의 머릿속으로 그날 밤 유흔에게 들었던 말이 웅웅 울렸다.

 

다음에는 자리공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오, 추을.”

 

***

 

후계혈전이라는 잔인한 전통이 있는 곳. 아니, 후계혈전이라는 것을 구실로 위협적인 방계 인물이 성장할 여지를 아예 제거하는 곳. 한씨가는 그러한 곳이었다.

 

그런 만큼, 한씨가에서 후계들끼리 혈전 전에 서로를 죽이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었고, 한 후계가 다른 후계를 죽였다 해도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후계가 아닌 후계의 아버지가, 다시 말해 후계의 지지자가 다른 후계를 살해하려 한 일이었다. 그러니 일을 꾸민 후계의 지지자가 가주의 정실부군이라 하여, 죄가 사라지는 것도, 가벼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계의 인물들은 정옥이 추을을 금족령에 처하게 될 것이니 그저 이번 일은 묵과할 수 없다는 한 마디만 해달라는 유흔의 계획을 거부했다. 입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가주의 부군이 아니냐’, ‘정후계의 부친을 처벌하라 말하는 것은 방계로서의 선을 넘는 것이다등의 핑계를 내세웠지만 유흔은 알고 있었다이들은 유란보다 더한 겁쟁이라는 것을.

 

말로는 후계혈전으로 자식들을 잃는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속으로는 무슨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하여 서란 편에 붙은 박쥐같은 놈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에게 떨어질 떡고물을 스스로 만들어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한심한 쥐새끼들.

 

이러니 너희들이 그 모양 그 꼴로 자식들을 잃으며 살아왔던 것이다. 내 동생보다 더한 겁쟁이들 같으니. 그래도 내 동생은 딸을 잃을까 두려워하면서도 치사량의 독을 먹이지 않았다. 조카의 손에 딸이 죽는 것을 지켜만 보느니, 차라리 자신이 직접 딸을 죽이겠다 마음먹고도 치사량의 독을 먹이지 않았어. 그리고 내가 나타나자 딸을 살려달라며 애원했다. 딸의 운명을,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조금이나마 바꿔보려. 그런데 너희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그저 떡고물이나 떨어지기를 기다리니 평생 그 모양 그 꼴인 게다.’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유흔은 한구석에 놓인 자그마한 패물함을 꺼냈다. 그것은 유흔이 한씨가에 올 때 유일하게 가슴에 품고 왔던 서씨가의 물건으로, 그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혼인예물로 준 것들이었다. 유흔은 그것들 중에서 가운데에 에메랄드와 터키석으로 만든 장식이 달려 있는 옥구슬 목걸이를 꺼냈다.

 

이제야 이것들이 주인을 만나나 봅니다, 나의 친어머니.”

 

유흔은 시종을 시켜 목걸이를 유란에게 전하게 했다. 유란이라면 이것의 의미를 알리라 생각하며 유흔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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