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4-1) '전면전 기운'

이슬비 | 기사입력 2020/06/01 [10:39]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4-1) '전면전 기운'

이슬비 | 입력 : 2020/06/01 [10:39]

<지난 글에 이어서>

그 무렵, 한씨가와 신씨가 사이에는 분쟁이 잦아지고 있었다. 가유와 단헌. 북해도의 북서쪽과 남서쪽. 한씨가에서 남쪽, 신씨가에서 북쪽. 그렇게 서로의 영지를 맞대고 서로의 군사력이 주둔하고 있는 접경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연히 두 가문의 사이는 좋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영지를 맞대고 접경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따지자면 수많은 가문들이 모두 사이가 좋지 않아야 할 터이나, 과거, 대부분의 공가 가문들은 사이가 좋았다. 그러니 영지를 맞대고 접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고, 무가 가문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순전히 군사력에 있었다.

 

전국일통(全國一統).’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때로는 합종연횡을 도모하고, 때로는 하나의 가문이 멸망할 때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는 작금의 전국에서는 접경에 군사를 주둔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 보니 항상 서로의 군사력이 접경에서 충돌해 사소한 국지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잦은데.”

 

사린현, 나고현, 고야현, 나로성으로 이어지는 신씨가 접경지역에서 들어온 보고를 읽다 말고 유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도 신씨가와의 분쟁은 종종 있어왔지만 최근 들어 그 정도가 더욱 빈번해졌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신다희가 일부러 도발을 하는 건가?”

 

신씨가가 전면전을 위해 일부러 도발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뭔가 이상한 것이, 현재 신씨가는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태였다. 아무리 북해도의 숨겨진 용이라 불린다 하나, 삼 년 전의 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와 한씨가에 대한 배상금으로 한동안 전쟁을 할 여력을 내지 못했던 신씨가가 지금 도발을 한다? 한씨가에 낸 배상금만큼의 피해복구를 이제 겨우 끝마친 상태에서?

 

유흔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신다희가 호전적이기로 유명하다고는 하나, 그녀는 북해도의 숨은 용을 이끄는 군주였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굳이 도발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흔은 다시 한 번 보고들을 읽어 내려갔다.

 

사린현 군사들과 강화현 군사들, 강화현 인근 벌판에서 교전. 사소한 무력충돌로, 사린현 군사 다수 중경상.’

나고현 군사들과 강화현 군사들, 나고현 성문 앞 벌판에서 교전. 사소한 무력충돌. 사망자 다섯. 부상자 다수.’

 

보고에는 하나같이 사소한 무력충돌이라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유흔은 그 말에서 묵직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분명, 이 일에 석연치 않은 무언가가 있음이라. 유흔은 얼른, 북해도의 모든 접경지역들이 표시된 지도와, 신씨가 접경지역의 상세한 지도, 그리고 신씨가 접경지역 각 성들의 군사편제도를 펼쳤다.

 

사소한 충돌이라면 보통 백호 단위에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의 사소한 분쟁은 백호 단위에 해당하는 군사들 일 분()이나, 이 분, 혹은 삼사 분, 대여섯 분 정도가 출진해 싸우면 끝이 났고, 천호나 만호 이상의 단위에 해당하는 군사들이 나서게 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천호 단위에 해당하는 군사들이 나선 일도 드문드문 보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거냐.’

 

유흔은 다시 한 번 사린현과, 나고현, 나로성의 지휘관들을 떠올려 보았다. 사린현의 태수 도화란은 천성이 아주 간교하고 교활한 자로, 절대 자신이나 도씨가가 손해를 보는 일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점을 늘 정옥이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가신 주제에 자기 가문에 유리한 일만 하려 한다고.’

 

그리고 나고현의 태수 도유향은 알다시피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람. 아니, 한 인간으로서는 좋은 사람이나, 한 명의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은 의심되는 사람. 그리고

 

유흔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무언가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또 왜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도 없어 유흔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마음에 걸리는데?”

 

그날 저녁, 서란에게 이 실체 없는 불안감을 토로했을 때, 서란은 그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류트의 현을 갈며 서란은 무심한 얼굴로 유흔을 한 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서란의 손끝이 류트의 몸통을 연신 톡톡 두드리는 것이 그녀가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천호 이상의 군대가 사소한 분쟁에 잘 나서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지?”

 

그야 천호 이상의 군대는 주로 국지전에 쓰이고, 만호 이상의 군대는 주로 전면전에 쓰이니까. 관례 상, 천호 이상의 군대가 출진하면 국지전이나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이유가 그것이지. 통상적인 범위의 전쟁을 할 의도가 있다 보여지니까.”

 

서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란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몇 모금 홀짝이고는 팥소를 입혀 튀긴 과자를 우물거렸다. 과자는 담백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돌았다.

 

이 과자 맛있네.”

 

, 막과자야. 보현이 요즘 길거리에서 유행하는 과자가 있다기에 하나 사와보라고 했어.”

 

서란은 과자를 하나 더 우물거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요즘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곳이 있었다.

 

도화란, 도유향 모두 사소한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키는 것은 원치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지.”

 

그런데 왜 천호 이상의 군대가 출정했을까?”

 

여기까지 생각하다 말고 서란은 문득 아, 하는 소리와 함께 탁, 하고 손가락을 퉁겼다.

 

정말 엉뚱한 생각이긴 한데 유흔.”

 

?”

 

만약 이 일에 가주님이 관련되어 있다면?”

 

서란의 말에 유흔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신씨가와의 분쟁을 전면전으로 키우는 일을 정옥이 주도하고 있다니. 유흔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약 주위에 정옥이나 추을, 자여의 첩자라도 있다면 근거도 없이 가주를 비방한 죄로 금족령이나 물과 음식조차 먹지 못한 채 사서오경을 백 권 베껴 쓰는 벌에 처해질 것이었다.

 

가주님이 신씨가와의 전면전을 주도하고 있다고? 대체 왜?”

 

정확히는 그렇게 되도록 막후에서 조종하고 있다고 봐야겠지만.”

 

그거나 그거나.”

 

어찌 되었든 가주님이 이 모든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건 분명해. 지금 신씨가와의 사소한 분쟁이 전쟁으로, 것도 이왕이면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으로 확대되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은 바로 가주님이야.”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서란의 말이 일리가 없는 말도 아닌 것이, 지금 정옥은 단 한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바로 유흔의 눈앞에 있는 서란이라는 한 사람을.

 

지금 추을은 금족령을 받은 상태야.”

 

추을. 이제는 추을에 대해서 따로 호칭을 붙이지 않는 서란이었다. 부군이라든가 이모부님 같은 호칭을 붙이지 않고 이름으로만 추을을 부르는 서란에 유흔은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후계혈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진 상태라는 것인가.’

 

유흔은 놀란 기색을 지우고 서란의 기색을 살펴보았다. 이제껏 서란이 정옥의 수를 미리 읽은 적이 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가주님은 지금 나를 가장 두려워하고 있어. 나고현성에서의 일로 나는 시조이신 무녀 훌란의 현신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천하의 이목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기 시작했지.”

 

…….”

 

거기에 우리 가문의 방계가 나를 지지하고 있고. 북해도의 용이라 불리는 신씨가 가주의 정실남편 신백연과는 친구이고, 이제는 유흔과 혼인까지 하게 됐잖아. 신씨가 가주 신다희는 남편의 친구에 대한 배려라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나를 지지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했고. 거기에 데 바옌 부인과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상국 주재 서양 상인들도 나를 지지하고 있지.”

 

…….”

 

그에 비해 자여는 무엇 하나 이뤄낸 것이 없잖아. 후계혈전이 없는 가문이라면 나이가 어리니 이뤄낸 것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겠지만 우리 한씨가는 후계혈전이 있는 가문이야. 후계혈전이 있는 가문에서는 나이가 어리다 해서 이뤄낸 것이 없는 걸 봐주지 않아. 그 점은 사촌동생을 죽이고 친동생에게 복종맹세를 받아내 지금의 자리에 앉은 가주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

 

…….”

 

그러니 이 상황에서 가주님이 선택할 수는 단 하나야. 바로 전쟁’. 정확히는 전쟁으로 시선을 돌리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자여를 지지하는 세력의 기반을 다져놓는 거지. 물론, 그를 위해, 유흔이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는 사전에 차단하려 할 거야. 유흔이 전장에 나간다는 것은 곧 내가 시조이신 훌란의 현신으로서의 모습을 증명해보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을 잘 아실 테니까.”

 

유흔은 이제 놀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 서란은 자신이 처한 모든 조건들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작금의 전국이라는 정세 속에서 정옥이라는 한 인간이 택할 수단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유흔은 말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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