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꿈 중년에야 이뤄, 늦깎이지만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5) 이의열 문인화가 인터뷰

인터넷저널 | 기사입력 2022/09/22 [10:57]

“화가 꿈 중년에야 이뤄, 늦깎이지만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요”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5) 이의열 문인화가 인터뷰

인터넷저널 | 입력 : 2022/09/22 [10:57]

“어릴 적부터 그림을 동경했죠. 형편이 안 돼 못했어요. 축산업·화공(도자기공장)을 거쳐 공무원을 하며 독학을 했죠. 오십 중반 들어 문인화로 미술대전에 입선했어요. 올부터 산수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퇴직했으니 전력을 쏟아보려고요. 작업실도 마련했고, 하루 종일 그림공부라니. 이런 행복이 또 있을까요.”

 

이의열(64) 문인화가의 말이다. 21일 여주시 대신면 장풍2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난 화가는 오래전 이야기를 꺼냈다. 재능 있고 좋아했지만 하지 못했던 미술. 중년에 혼자 공부해 상을 받았고, 정년퇴직 뒤 그림에만 전념하게 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시간·공간·재료까지 갖췄으니 늦깎이 열정을 불태워보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의 그림 공부는 쉰둘이 돼서야 시작됐다. 여주지검 공무원 생활을 하며 인터넷을 뒤져 4군자 그리기를 시작했다. 평생 품어왔던 꿈을 펼치기 시작한 것. 온라인에서 문인화가 손광식씨(전기업계에서 전업 중국 유학으로 4군자 익혀 미술협 이사 지낸)도 알게 됐다. 연락해 사제관계로 발전했다.

 

“동경했지만 형편 안 돼 포기”

 

“여주에 주말이면 머문다고 해 그 때 찾아가 채본을 받아 1주일간 모사했습니다. 직장 다니랴 축산업 하며 진 빚을 해결하려고 시작한 부업까지, 시간이 모자랐죠. 새벽잠을 포기하고 그렸습니다. 난초가 특히 어려웠는데 8개월이나 걸리더군요. 4군자를 익히니 그 분이 미술대전에 출품해보자 더 군요. 2003년(6월 4일) 문인화로 입선했습니다.”

 

▲ 이의열 문인화가.


그해 그는 미술대전에 이어 서예문인화대전(7월 22일 입선), 일본인테리어서예대전(12월 23일 특선)에서 상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침체기. 그림 모사가 다가 아니라는 생각에 다시 인터넷을 뒤지며 배움의 열정을 불태웠다. 하지만 혼자하려니 쉽지가 않았다. 시간도 없거니와 배울 길도 없었다. 15년을 허비하다 정년퇴직을 하며 초심을 떠올렸다. 산수화로 분야도 확대키로 했다.

 

물론 그간 손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여주민예총(5년전)에 가입해 산수화 공부를 하고 회원들끼리 전시회도 다섯 차례 개최했다. 지난해엔 9월 28일부터 11일간 ‘걸어서 동네한바퀴’(여주세종문화재단 후원, 묵지파 주최) 전을 개최했다. 올해도 11월 8일부터 17일간 여주세종문화재단에서 전시회를 연다.

 

“산수화는 또 다른 그림 기법이 필요해 쉽지가 않네요. 인터넷을 뒤져 한 유명 교수의 유투브 영상을 접하고 따라하고 있습니다. 빨리 하려고 서둘지 말고, 스케치로 80%를 완성하라는 말, 8개월째 작업실에 처박혀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 보이기 시작하네요. 하지만 고독과 번뇌의 연속입니다.”

 

못 이룬 어릴 적 꿈을 좇아 뒤늦게 붓을 들고 인터넷을 뒤져 배워가는 문인화가의 길. 추상화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잘 다니던 법대(모스크바) 교수를 그만두고 그림을 시작한 계기를 연상케 한다. 인상파 전시회에서 모네의 작품 ‘건초더미’ 내용을 알아보지 못한(제목을 보고서야 파악) 충격에 그림을 시작했고, 결국 그는 ‘보이는 것’을 넘어 ‘마음’을 그리는 예술 지평을 열었다. 1백여년 전의 일이다.

 

중년 넘어 문인화를 시작하고 정년퇴직 뒤 화실까지 마련해 산수화에 매진하는 이유가 궁금했는데, 화가는 동경이라고 했다. 어릴 적 하고 싶었지만 못했고 맘 속 간직해 온 꿈을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평생의 숙제로 간직해오다 여건이 되니 망설임 없이 시작한 것이다.

 

▲ 미술대전에 입선한 작품(맨왼쪽) 등 그의 그림.  ©최방식


“직장 다니며 독학 미술대전 입선”

 

“고교 졸업 뒤 여주의 서예학원에 다닌 적이 있어요. 그림을 하고 싶었지만 길이 없었고, 글씨라도 배워보려고 간 거죠. 거기서 4군자 그림을 봤는데 가슴이 뛰었죠. 학원은 곧 문을 닫았고, 제 작은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죠. 생활고에 시달려 미술 할 여력도 없었지만요.”

 

그는 축산업을 시작했다. 돼지를 한 마리부터 시작해 2백마리까지 늘렸다. 하지만 1979년 축산파동으로 빚만 떠안고 망했다. 도자기공장에 화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검찰 기능공무원(2018년 정년퇴직까지)을 시작했다. 빚 부담에 부업으로 사슴목장(이후 가공하는 건강원까지)을 열었다. 생계에 도움 됐지만 그림공부에는 걸림돌이기도 했다. 사슴 탈출사건으로 목장을 폐쇄하고 건강원만 운영하다, 그림에 전념키로 하고 이 역시 그만뒀다.

 

그렇게 찾아온 늦깎이 그림 공부. 작업실(건강원을 개조)도 마련했다. 산수화도 모사 중심이 아닌 자신이 본 세상을 담겠다고 했다. 화가들이 종이와 붓(연필)을 들고 야외에서 스케치하는 게 부러웠는데, 왠지 쑥스러워 선뜻 나서지 못했다며 이제 용기를 내겠다고 했다. 한국화(산수화) 분야에서 미술대전에 도전하겠단다.

 

그림이 당신 인생의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망설임 없이 “내 전부”라 했다. 맘 속 깊이 간직해 온 화가의 꿈. 회갑을 넘겨 그 오래된 꿈을 실현해가는 화가. 자기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에겐 “결코 놓지 말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꼭 할 수 있다”고 당부했다.

 

문화예술 인생역전 하면, 조지 윈스턴(73)을 빼놓을 수 없다. ‘캐논 변주곡’(피아노 연주)으로 스타가 됐는데, 원곡은 17세기(바로크음악) 요한 파헬벨이 작곡한 ‘캐논’(현악 합주곡)이다. 조지가 피아노 음악으로 편곡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듣는 건 그의 변주곡. 3백 년 전의 음악을 활용, 세기적 행운을 거머쥔 것이다.

 

▲ 최근 산수화 그리기에 푹 빠진 화가.  © 최방식

 

이 문인화가의 ‘자발적 고난과 영광’ 뒤엔 가족의 지원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인은 한지·도자기 공예 예술 감각으로 그의 작품을 맨 먼저 품평한다. “여백이 없네”, “탁하네” 등 놀랄만한 지적들이었다. 칭찬이 박한 게 그의 불만. 심장판막 수술 3번, 백혈병 1년 치료 뒤 회복 중이란다. 어쩌다 화실에 들려 “멋있다야” 한마디 건네는 어머니, 제 사업에 바쁜 아들(외)도 심적 지원군. 손윗동서도 그와 같이 공무원을 하며 문인화가(공무원문인화가대전 초대작가)가 됐다니 재밌다.

 

‘여대장...’ 등 마을공동체 열심

 

그는 마을공동체 활동에도 열심이다. 수년 전부터 마을기업 설립 추진위원(현재는 감사)을 맡아 ‘여대장 버섯마을’(영농조합법인, 2018년)을 설립했다. 이주노동자(외국인) 4명 등 임직원 8명이 근무하는 어엿한 중소기업. 그는 또 마을쉼터(공원) 설립을 주도, 5백평 부지에 정자, 분수, 물레방아, 족구·농구·탁구·당구장을 갖춰 주민(이웃 군부대도 활용)들의 칭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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