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도시 위로 '우뚝한 고독' 삼각산

녹색반가사유(21) 갈가리 찢기고 포박당해 주눅든 회색무덤...

정미경 | 기사입력 2007/11/30 [12:25]

잿빛도시 위로 '우뚝한 고독' 삼각산

녹색반가사유(21) 갈가리 찢기고 포박당해 주눅든 회색무덤...

정미경 | 입력 : 2007/11/30 [12:25]
 만산홍엽(萬山紅葉)으로 온 숲을 물들이더니, 드디어 갈빛으로 갈무리하는 서울의 북쪽 휘장! 

 코크타운으로 변해 버린 드넓은 분지를 에워싸고 위풍당당하고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북한산, 이른바 삼각산입니다.

 숲으로 통하는 길섶 가로수는 노란 은행잎으로 융단을 깔았으며, 산정에서 바라보는 가을 하늘은 청명하기가 짝이 없었지요.
 
▲ 위풍당당하고 늠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북한산, 이른바 삼각산입니다.     ©정미경
  그 푸르른 하늘 아래 흰빛을 반사하는 백운대·인수봉 그리고 만경대. 발아래 펼쳐졌던 붉디 붉은 단풍잎은 차라리 투명했습니다.

 이어지는 밤, 희뿌연 도심의 불빛이 저 멀리 가물거리지만 틀림없이 숲에서 바라본 하늘은 까만, 못내 그리던 그런 칠흑 같은 까만 밤이었을 거예요.
 
▲ 늦가을 푸르른 하늘 아래 흰빛을 반사하는 백운대, 인수봉 그리고 만경대.     ©정미경

 나무들 사이로 풀잎을 밟고 지나가는 야행성 동물들의 형형한 눈빛에 아른거리는 총총 하늘별은 또 얼마나 밝게 빛났을까.

 이러한 오방색의 삼각산도 갈빛으로 수렴되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저마다의 본성을 드러냈던 오방색의 가을이 저물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저 유전적본성도 대지의 빛깔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 수직의 절벽과 가파른 벼랑 같은 바윗길만이 우뚝한 고독으로 잿빛 도시를 우울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삼각산.     ©정미경

 다만 빛나는 건 불끈 솟은 연봉들! 수직의 절벽과 가파른 벼랑 같은 바윗길만이 우뚝한 고독으로 잿빛 도시를 우울하게 내려다보고 있을 것이 뻔합니다.

 분지위에 점점으로 떠있는 것 같은 작은 산들을 장대한 산줄기로 품어 안았을 삼각산은, 산의 크기만큼이나 가슴속에 안고 길렀던 헤아릴 수 없는 뭇 생명체들을 재우며 자기의 꿈을 꿀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나의 시선이 자연의 비밀을 여는 하나의 창이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무슨 수로 산 전체의 진면목을 그려낼 수 있을까.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태산이 자기만의 묵직한 꿈을 꾸려하고 있습니다.
 
▲ 분지위에 점점으로 떠있는 것 같은 작은 산들을 장대한 산줄기로 품어 안았을 삼각산.     ©정미경

 왁자지껄한 타산 속에 번뜩이는 홉스의 눈빛으로 하루 종일 헤매면서 휩쓸려 다니던 군상들의 피곤한 일상을 풀어냈던 숲은 도대체 얼마만큼이나 더 시달려야 노곤한 몸을 뉘고 깊은 잠에 들 수 있을까.
 
 등반! 그것은 문명에 찌든 도시인의 야생에의 절절한 갈망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자연에 들어 원초성에의 회귀를 체험하는 것, 그것은 뿌리 뽑힘에 대한 저항이며, 파편화된 삶에 대한 반성이기도 합니다. 집안에 정원을 끌어들이고, 교외에 주말농장을 운영하는 것도 그것에 대한 일종의 탈주일 수도 있어요.

 
▲ 등반! 그것은 문명에 찌든 도시인의 야생에의 절절한 갈망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 있습니다.     © 정미경

 하지만 제 아무리 멋들어진 정원수로 장식을 하고 인공폭포를 만든다 하여도, 별장에 텃밭을 직접 가꾼다 하여도 그것은 자연에의 복귀가 절대로 될 수 없지요. 한마디로 '과시적 유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비하여 등반은 친자연적인 자연 체험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벼운 일상복 차림으로 가까운 숲에 들어 오감을 활짝 열고 정적 속에 빨려들어 간다면 말이에요.
 
 이럴 때 우리는 그것을 입산(入山)으로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등반은 이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요.

▲ 그렇게 가을이 가고 모든 것은 갈빛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 정미경

 첨단의 기능성 등산복을 입고 고가의 장비를 갖추고 오르는 등반은 또 다른 자기과시이며 정복욕의 새로운 방편이기에 그렇습니다. 바로 이러한 군상들의 그물에 포박당한 형국이 바로 지금의 삼각산이 아닙니까.

 숲생태계는 갈가리 찢겨지고, 당당한 걸음을 걷던 짐승들은 갈 곳 없는 신세로 주눅이 들어 있어요. 그나마 사라져가는 희귀수종과 동물들은 점점 늘어만 갑니다.
 
 그리하여 너른 분지를 지켜 주던 산은 다만 그것과 대조적으로 어울리는 거대한 조형물에 지나지 않게 되었어요.
 

▲ 삼각산 숲속에서 바라본 일몰.     © 정미경

 마치 주인 없는 텃밭에 내려앉은 서러움, 무성한 풀들처럼, 끊겨진 시간처럼 아픈 것도 없지만, 동시에 날이면 날마다 등산화에 휘저이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자연 또한 아프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륙성의 찬 기운, 그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는 웅장하고 의연한 자태의 삼각산은 살갗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에 몰골을 다 드러내지만, 그래도 일망무제로 탁 트인 산정은 산하를 굽어보는 여유를 지녔습니다.
 
 내리치는 뇌성벽력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서도 반가사유하는 숲은 도대체가 요지부동입니다.
 
▲ 잿빛 하늘을 가로질러 서녘으로 기우는 노을.     © 정미경

 도시의 배신, 문명의 반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에요. 선남선녀의 헤아릴 수 없는 인연을 만들어 주면서도 한강을 내려다보는 북쪽의 큰 산으로서의 여유를 잃지 않았거든요. 

 저마다의 특색을 자랑하고 있는 암봉 사이로 절경을 내리 빚은 수많은 계곡들은 울창한 숲과 맑은 물, 우윳빛 화강암, 굽이치는 물살 그리고 고색창연한 사찰을 두루두루 자리 잡게 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구름은 그 얼마나 한껏 여유를 부릴까.
 
▲ 기슭의 슬픔은 그렇게 밤 속으로 묻혀 들어갔습니다.     ©정미경

 그러나 그 아래의 도시는 티격태격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입니다. 비수도권으로부터의 부양으로 연명하는 수도권, 비대할 대로 비대해진 서울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거대한 잿빛무덤에 다름 아닙니다.

혹여나 북한산의 계곡수가 청계천을 흐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도심의 생태하천이라고 불러 줄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아니기에 감히 잿빛무덤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어요.
 
북한산과 한강너머의 관악산, 청계산이 하나의 고리를 이루고, 남산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의 생태적 연결선이 촘촘하게 얽혀진다면, 그리고 그것을 종축으로 하여 횡축의 숲이 이루어진다면 삼각산은 말 그대로 태산중의 태산, 으뜸가는 연봉으로 될 터인데….
 
▲ 몽유병처럼 하늘을 휘감고 있는 음습한 잿빛공기가 못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 정미경

 잿빛 하늘을 가로질러 서녘으로 기우는 노을이 왜 그렇게 서러운가를 비로소 절감했습니다. 기슭의 슬픔은 그렇게 밤 속으로 묻혀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가을이 가고 있더군요. 그리고 모든 것은 갈빛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위눌린 삼각산의 꿈은 어지럽기가 짝이 없습니다. 몽유병처럼 하늘을 휘감고 있는 음습한 잿빛공기가 못내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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