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서> “그런데 유흔, 가락지 언제 사줄 거야?”
처소로 들어서자마자 서란은 침상 위에 드러누워버렸다. 유흔이 옷은 갈아입고 누우라며 엉덩이를 한 대 찰싹 쳤지만 서란은 피곤하다며 어리광을 부렸다.
“나 피곤하단 말이야. 우우웅.”
“에휴, 아직 애야, 애.”
서란은 유흔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유흔이 서란의 머리끈을 풀고, 세 갈래로 땋아 쪽을 지어 말아 올린 머리에 꽂은 장식빗과 금비녀를 뽑아주었다. 유흔은 서란의 땋은 머리를 마저 풀었다. 삼단 같은 서란의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를 이루며 무릎 위로 쏟아져 내렸다.
“수고했어.”
유흔은 서란의 머리를 손가락에 감고 토닥였다. 유흔은 서란의 손에 뭔가를 쥐어주었다. 서란이 화색을 띠며 손에 들린 작은 함을 열어보았다.
“뭐야, 이건 가락지가 아니잖아!”
“흐흐흐.”
“가락지 사달라니까! 이런 뒤꽂이 말고!”
유흔이 건넨 함 안에는 금으로 만든 뒤꽂이가 들어 있었다. 루비로 꽃잎들을 하나하나 깎아 만든 장미장식에는 역시 붉은 루비로 된 보요 장식들이 매달려 있었다. 서란은 흐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이런 거 말고 가락지!”
서란의 어리광에 유흔은 흐흐, 하고 웃으며 서란의 머리를 한 움큼 쥐고 말아 올려 뒤꽂이를 꽂아주었다.
“가락지는 혼인해야 낄 수 있는데. 우리 화야 혼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있어?”
“…….”
“응? 정말 있나 보네? 누구일까? 우리 화야가 혼인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유흔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서란에게 물었다. 서란이 아직 혼인할 나이가 아니라는 것도, 무엇보다 서란은 후계혈전에서 살아남기 전에는 혼인할 수 없다는 것도 유흔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디 보자. 우리 화야가 차기 가주가 되면 누구와 혼인하게 되려나? 사씨가? 도씨가? 아니면 다른 가문이려나? 어디 보자. 공가일 수도 있고, 무가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
“…….”
“이왕이면 공가였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우리 화야는 방계 출신이라서 정통성 논란에 휘말릴 수도 있고, 어떻게 후계혈전에서 방계가 살아남았냐며 후계혈전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들도 있을지 모르니까 공가 출신의 정실부군을 맞으면 시가의 힘으로 조금 덮을 수 있을 거야.”
“…….”
“왜? 공가는 싫어? 그러면 무가 출신 사내가 좋아? 응? 무가는 아무래도 공가보다는 우리 화야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할 텐데.”
“…….”
“앗, 그러고 보니 내 정신 좀 봐. 미리미리 공가에 우리 화야의 혼담을 넣는다는 걸 깜빡했네. 공가 출신 정혼자가 있으면 우리 화야가 지금보다 훨씬 더 유리해질 텐데. 그렇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참 쓸데없다 싶을 만큼 유흔은 서란의 혼사에 대한 계획을 벌써부터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혼사인데, 서란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마음대로 계획해도 되나 싶었다.
그러나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언제 자신의 마음이 가는 대로 혼인을 할 수 있었던가. 다 정치적 목적으로 혼인을 하는 것을. 이제부터 서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든든한 시가를 알아봐야겠다 생각하는 유흔의 귀에 서란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혼인하기 싫어.”
“왜?”
“유흔도 혼인 안 했잖아.”
“그럼 내가 혼인하면 화야도 혼인할 거야?”
“아니.”
“그러면?”
“나는 유흔이 좋아.”
“……?”
“나는 계속 유흔이랑 살래.”
“……?”
“그리고 정 혼인해야 한다면, 유흔 같은 남자랑 할 거야. 유흔 같은 남자가 좋아.”
서란의 말에 유흔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서란은 자신의 조카이기보다는 주군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서란과 혼인한다 하여 문제 될 것도 없었다. 제화족이든, 삼백족이든 모두 근친혼이 잦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서란이 너무 고통스러울 것이었다. 유흔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화야 나한테 시집오고 싶어?”
“……?”
“삼백족은 여자가 혼인하는 걸 ‘시집간다’, ‘시집온다’고 하거든. 화야, 나한테 시집올 거야?”
“흐응.”
“그러면 이렇게 하자, 화야. 우리 화야가 서른 살까지 혼인 안 하면 나한테 시집오는 걸로.”
유흔은 웃으며 잠든 서란의 가슴을 토닥거렸다. 서란의 가슴에 멍울이 잡히기 시작하는 것이 손바닥으로 느껴져 유흔은 한숨을 내쉬었다. 키워서 색시 삼는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어 유흔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
새벽이 깊어, 유흔은 조용히 처소를 나섰다. 서란은 깊이 잠들어 있었다.
‘곧 동이 터오겠구나.’
그 어느 때보다 칠흑 같아 보이는 새벽의 어둠은 은은한 안개까지 머금고 있었다. 유흔은 서안의 서랍에서 작은 함을 꺼내들었다. 자단나무로 만든 붉은 함에는 두꺼운 솜이 깔려 있고, 그 위에 푸른 옥가락지 한 쌍이 들어 있었다. 서란에게 어울릴까 싶어 샀으나, 다시 생각해보니 손이 하얀 그녀에게는 붉은색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어 넣어둔 것이었다.
“화야.”
유흔은 잠든 서란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차가운 감촉에 서란이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앞으로는 아파도 아프지 마. 네가 아프면…….”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돌아서겠어.’
다음 말을 끝내 잇지 못하며 유흔은 처소를 나섰다. 유란의 처소 앞에 다다른 유흔은 아직도 불빛이 새어나오는 방 앞에 서서 밤번을 서며 졸고 있는 시녀들을 깨웠다. 시녀들이 얼른,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안에 고해라.”
“예.”
“유란님, 유흔 도련님 드셨습니다.”
여태 잠을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인지 유란은 방 한가운데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유흔은 품 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준비해간 자단나무함을 유란에게 건네며, 유흔은 유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함 속에 들어 있는 가락지를 확인한 유란이 착잡한 눈으로 유흔을 바라보았다.
“삼백족식으로 말하마. 네 딸을 내가 데려가도 되겠니?”
“……."
“유란아.”
말을 마치며 유흔은 유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마치 네가 허락하지 않아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것이 생(生)이 정해준 길이라는 듯이. <다음 글로 이어짐>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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