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6-2) '사절 임명'

이슬비 | 기사입력 2020/10/01 [10:08]

[연재] 홍매지숙명(紅梅之宿命) 위대한 패자(覇者)(36-2) '사절 임명'

이슬비 | 입력 : 2020/10/01 [10:08]

<지난 글에 이어서>

일순간, 유진의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물드는 것을 서란은 놓치지 않았다. 유진이 얼른, 눈동자에 어린 당혹감을 지우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후예씨가의 가주가 아니라니요.”

 

김씨가 가주님.”

 

서란이 이 자리에 없는 서인을 불렀다. 서란은 서인을 부르고 가만히 유진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진의 눈동자에는 의외로 평온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유흔이 언젠가 서양의 강대한 두 나라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 백 년 넘게 지속된 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래요, 어떤 이야기를 가장 흥미롭게 들으셨습니까?”

 

그 시기에 홀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난 프랑스의 전쟁영웅이며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성녀로 여겨지는 한 여인, 잔 다르크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여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저 평범한 시골마을의 양치기에 지나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글도 몰랐고 검을 휘두르거나 말을 타는 법은 더더욱 몰랐지요. 그런데 어느 날, 태자를 도와 프랑스를 구하라는 신의 계시를 듣고 보쿨뢰르라는 곳에 주둔하고 있던 사령관의 앞에 나타나 태자의 알현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아마 사령관도 처음에는 그저 미친 여자가 아닌가 생각했을 겁니다. 시골마을의 양치기에 불과한 여인이 자신이 신의 계시를 들었다며 태자전하를 뵙게 해달라 간청하는데 그 누가 그 말을 순순히 들어주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결국, 거듭된 간청에 못 이겨, 또 그녀가 정말 신의 계시를 들은 것이 맞는지, 아니면 그저 미친 여자에 불과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여섯 명의 기사를 딸려 적진을 통과해 한 성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태자에게 가도록 했지요.”

 

호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그녀는 여섯 명의 기사와 함께 적진을 무사히 통과해 태자의 앞에 나아갔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태자는 그녀가 정말 신의 계시를 받았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시종에게는 태자의 화려한 옷을 입혀 왕좌에 앉히고, 자신은 신하들 속에 숨어 있었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태자를 뵈러 온 그녀는 왕좌에 앉은 가짜 태자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신하들 속에 숨어 있는 진짜 태자를 찾아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요.”

 

그 이야기와 아가씨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요?”

 

글쎄요. 저는 그저 김씨가의 가주님께서 저를 시험하고 계시니 충분히 관계가 있지 않을까 사료되어 말씀드리고 있을 뿐입니다만.”

 

말을 마치자마자 서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은 꿇은 무릎 위에, 나머지 한 손은 정자의 마룻바닥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유진은 그런 서란의 모습을 알 수 없는 일렁임이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다시 예를 올리겠습니다. 한씨가의 39대 제2후계 한서란이 김씨가의 38대 가주님을 뵙습니다.”

 

…….”

 

제 이야기가 들을 만 하셨는지요?”

 

유진이 대답 대신 자리에서 내려와 서란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주었다. 서란은 유진을, 아니, 서인을 바라보았다. 서인의 눈에 스쳐 지나가는 오만 가지 복잡한 감정을 서란은 애써 모른 채했다.

 

 

다음날, 서인은 가내회의를 열어 한씨가와 신씨가에 동맹을 제안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서란은 가내회의가 끝나고 김씨가 저택에 초대되었다. 서인이 객잔에 보내온 화려한 가마를 타고 김씨가 저택의 문을 들어선 서란은 곧 가내회의가 열린 한 전각으로 안내되었다. 전각 안에 모인 김씨가의 인물들이 일제히 서란을 돌아보았다. 서란은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은 꿇은 무릎 위에 올리고, 나머지 한 손은 전각의 마룻바닥에 늘어뜨리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한씨가의 39대 제2후계 한서란이 김씨가의 38대 가주님께 문후 올립니다. 밤새 편안히 침수 드셨는지요?”

 

한씨가의 39대 제2후계 한서란은 고개를 들라.”

 

서란은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서란의 앞에 시종 하나가 다가와 인수(印綬)와 두루마리 하나가 받쳐진 서안을 건네주었다.

 

사절의 인수와 임명장이다. 한씨가의 제2후계는 김씨가의 사절로서 명을 받들라.”

 

……!”

 

지금 이 시간부로 그대에게 사절의 지위를 부여하니, 그대가 제안한 전쟁을 신씨가는 물론, 그대의 가문인 한씨가의 가주에게도 똑같이 제안하여라. 성공하면 그대는 물론, 우리 김씨가도 막대한 이득을 얻을 것이나, 실패하면…….”

 

서란은 사절의 인장을 꼭 쥐고 서인을 노려보았다. 실패하면 모든 책임은 자신 혼자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후계의 권한을 남용하고, 그로도 모자라 적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게 될 테고. 그리 된다면…….

 

적과 내통한 후계이니 최소가 후계작위가 박탈되고 노예로 강등되는 것일 테고, 최대는 사형이겠지. 그것도 지지자들까지 모두 함께 참하는…….’

 

서란은 인장을 쥔 손을 더욱 더 꼭 말아 쥐었다. 지금 서인은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어제 후예유진인 척하며 자신을 시험한 것으로 모자라 이제는 서란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유흔의 목숨까지 가지고 자신을 시험하고 있었다. 서란은 무어라 말을 하는 서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지금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

 

어제는 후예씨가의 가주님이신 척하며 저를 시험하시더니 오늘은 저뿐만 아니라, 유흔의 목숨까지 담보로 저를 시험하려 하시지 않습니까. 아무래도 가주님께서는 제가 죽을지, 살지가 매우 궁금하신 듯하니 그 결과를 일찍 보여드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무엄하오!”

 

서인의 오른쪽 자리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소리쳤다. 서란은 방금 소리친 이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서인과 닮아 있었다.

 

한씨가의 후계는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망발을 내뱉는 것이오! 이는 우리 김씨가와 한씨가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일. 당장 정식으로 사죄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 말이 틀렸습니까?”

 

서란은 그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서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한동안 그런 서란의 눈길을 고스란히 맞받고 있던 서인이 갑자기 목젖을 드러내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과연 무녀 훌란의 현신이라고 불리는 이다운 기개로다!”

 

…….”

 

한서란.”

 

, 가주님.”

 

그대가 한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내가 그대의 목숨과 그대를 보호하고 있는 그대 외숙부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그대를 시험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그대가 죽을지 살지가 궁금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대가 신다희와 한정옥을 설득할 만한 담력을 가지고 있는지가 궁금하여 미리 그대의 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자 하였을 뿐, 그 외에 다른 의도는 없었음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

 

물론, 그대는 그대 스스로가 그러한 담력도 없이 이곳까지 오지 않았을 거라 여기고 있겠지. 그러나 사람의 본래 모습은 극한의 상황에 몰렸을 때에야 비로소 나오는 법. 하여, 실패하면 그대와 그대의 외숙부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대를 일부러 자극하였네. 그러니 이 추연의 주인 김서인의 노파심 어린 호기심이라고 생각하고 너그러이 이해해주길 바란다만 설령 그것이 잘 되지 않더라도 너무 노여워하지 않기를 바란다.”

 

…….”

 

무엇들 하는가! 오늘은 기꺼이 우리 김씨가에 동맹을 제안하고 사절의 역할까지 기꺼이 감당하겠다한 한씨가의 후계를 위한 날이다. 하니, 연회를 열어라. 밤새 연회를 열어 한씨가 제2후계의 서운함을 달랠 것이다.”

 

이제껏 자신을 시험해놓고 연회라. 자리에서 일어난 서란은 잠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서인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가문 간의 관계를 다 떠나서 개인 대 개인으로 놓고 보자면 자신이 가주가 되었을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은, 그리고 어쩌면 평생 동안 천하를 놓고 다퉈야할 인물은 바로 눈앞에 있는 김서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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