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연재] 홍매지숙명-하망연(40-1) "이제야 유흔을 볼 수 있겠군"

이슬비 | 기사입력 2021/11/15 [10:12]

[무협연재] 홍매지숙명-하망연(40-1) "이제야 유흔을 볼 수 있겠군"

이슬비 | 입력 : 2021/11/15 [10:12]

<지난 글에 이어서>

사절의 인수와 임명장을 받고 객잔으로 돌아온 서란은 탁자 앞에 앉아 오랫동안 공을 들여 먹을 갈았다. 평소보다 더 공을 들여 먹을 가는 서란의 손길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떨리는 것을 비화는 애써 모른 채하며 밖으로 나가주었다.

 

이제 유흔을 볼 수 있겠다.’

 

서란은 유구에 있을 유흔을 생각하며 화지(和紙)를 펼쳤다. 하얀 종이 위에 유흔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서란은 애써 고개를 털어내며 벼루에 붓을 담가 먹물을 담뿍 찍었다. 서란은 종이 위에 서신을 한 글 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며 잔잔히 미소를 머금다 곧 푸흐흐, 하고 큰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곧 유흔과 만나게 된다는 사실이 너무 기뻐 웃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그 바람에 먹물 한 점이 종이 위에 떨어졌지만 서란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워낙에 악필인 자신이니 떨어진 먹물 위에 글씨를 흘려 쓴다면 유흔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었다.

 

유흔이 글씨를 잘 쓰는 것은 공가 귀족들과 황족들의 기본소양이라고 그랬는데.’

 

하지만 자신은 공가 귀족도 황족도 아닌 영주가문의 후계였다. 그런데 글씨체가 악필인 것이 무슨 상관이람. 서란은 마치 눈앞에 있는 유흔의 얼굴을 쓰다듬듯 섬세하게 붓을 놀렸다.

 

"오랜만이야, 유흔.

아마 지금쯤이면 장기도를 거쳐 유구에 갔을 거라고 생각해. 유구는 일 년 내내 기후가 따뜻하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따뜻한지 궁금해. 유흔도 잘 알다시피 우리 북해도는 일 년의 절반이 넘는 계절이 춥고 혹독한 겨울이잖아.

어쨌든 그동안 소식이 없어서 걱정 많이 했지? 걱정 따위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어깃장 놓으면 나 정말 몇날며칠 울 거야. ,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는 만큼 유흔이라면 따로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소식이 없는 동안 걱정 많이 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이렇게 투정부려도 이해해줘.

우리가 계획했던 대로 김서인과 신다희가 우리 한씨가와 동맹을 맺겠다고 했어. 나는 두 사람에게서 김씨가 사절의 인수와 임명장과, 신씨가 사절의 인수와 임명장을 받았어. 이제 남은 건 가주님을 설득하는 일이야. 그러니 우리 마지막까지 한 번 잘해보자. 우리 한씨가와 견원지간인 김씨가의 가주 김서인도, 북해도의 숨은 용이라 불리는 신씨가의 가주 신다희도 설득했는데 가주님이라고 설득하지 못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까 우리 마지막까지 한 번 잘해보자. 알겠지?"

 

그러나 서란은 곧 붓을 벼루 위에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서인과 다희를 설득하는 일보다 정옥을 설득하는 일이 훨씬 더 어려울 수 있음을 서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동안 손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서란은 옷소매가 먹물로 더러워졌음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효를 찾으러 밖으로 나섰다.

 

나도 참 바보 같긴. 가주님을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렇다. 정옥을 설득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든 그것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김씨가와 신씨가와의 동맹을 성사시켜 서란 자신과 유흔이 전장에 설 기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서란은 밖에서 꼬치에 꿴 과일절임을 사먹고 있던 효를 데려와 서신을 건네주었다.

 

유구로 가서 유흔에게 전해줘. 그리고 너는 유흔과 함께 가라고루성으로 출발해. 우리도 가라고루성으로 갈 테니까.”

 

효가 객잔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서란은 침상 위에 몸을 던졌다. 포근한 비단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 비화가 문을 벌컥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야?”

 

서란은 비화의 뒤를 따라 들어선 이들을 살펴보았다. 비화의 등 뒤에는 아까 자신을 데리러왔던 백연의 시종들과 함께 신씨가의 다른 시종들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너희들은 무슨 일이지?”

 

서란이 침상에서 일어나자 시종들이 다가와 서란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서란은 꽃모양 매듭으로 묶인 붉은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눈꽃과 나비를 그린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저희 신씨가의 가주님께서 서란 아가씨를 다회(茶會)에 초대하셨습니다.”

 

다회에?”

 

, 이따 술시부터 저택의 정원에서 다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주십사 하는 저희 가주님의 전언이십니다.”

 

알겠다.”

 

무슨 다회를 저녁에 연담. 다회는 낮에 여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나. 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서란은 다희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지금으로서는 다희가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저녁이 되어 서란은 자신이 가지고 온 옷들을 살펴보며 그 중 가장 수수한 것으로 골라 입었다. 한씨가의 문장조차 새겨져 있지 않은 민무늬의 진한 청색 저고리와 검정색 바지, 그리고 연한 청색 포를 차려 입은 서란은 머리를 땋아 말아 올려 포와 같은 색의 머리끈으로 묶고 사파이어 장식이 매달린 은비녀 하나를 꽂았다.

 

옷이 너무 수수한 거 아닌가?”

 

방 밖으로 나선 서란을 본 비화가 물었다. 서란은 다회이니만큼 수수한 옷차림이 좋다고 비화의 말을 일축했다.

 

그대도 잘 알 텐데. 다회에서는 차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는 걸. 차와 함께 밥과 맑은 국, 생선회와 야채절임이 나오고, 그 다음에 술과 안주가 나오고, 또 그 다음에는 구이와 조림이 나오고, 마지막으로는 과자가 나오고. 그런데 그런 차림으로 가게?”

 

다실에는 주인과 손님만이 들어갈 수 있어. 주인은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 낮은 문 안에 있는 좁은 방 안에서 손님을 맞이하지. 오직 차를 즐기기 위해 주인과 손님 단 둘이 좁은 방 안에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화를 하는 것. 그게 다회야. 그런데 나더러 화려한 옷을 입고 가라고?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야.”

 

그런가. 그런데 그건 선불교의 정신을 따르는 다인들을 고용한 영주들의 다회에 한해서 그런 것 아닌가? 아직도 많은 영주들은 황금으로 꾸민 다실에서 많은 사람들을 초청해 여는 호화로운 다회를 즐기지 않나?”

 

어쨌든 다회에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갈 수 없어. 그러니 지금 이 옷이 가장 무난해.”

 

서란은 갈아 신을 버선을 옷깃의 가슴께에 찔러 넣고 객잔을 나섰다. 다실로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가야 하니 만큼 더러워진 버선을 갈아 신고 주인 앞에 나서는 것이 예의였다.

 

서란 아가씨이시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신씨가 저택에 도착하자 시녀들이 서란을 맞이하며 다실의 외정원으로 안내했다. 커다란 연못을 파고 연못에 작은 섬을 띄워놓고 주위에 소나무와 커다란 돌들을 배치한 정원은 눈이 시원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침잠해보였다.

 

서란은 외정원을 지나 중문 앞에 이르러 신발을 벗었다. 신발을 벗고 버선발로 딛는 땅의 느낌이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라 서란은 자꾸만 발끝을 오므렸다. 중문을 지나 내정원에 들어선 서란은 모래와 바위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을 표현한 정원양식을 잠시 감상하고 다실의 출입문 앞에 섰다.

 

들어가시지요.”

 

시녀의 안내에 따라 서란은 낮은 출입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문턱을 기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몇 명의 손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어서오시오, 서란.”

 

짚자리로 만든 바닥을 한 단 높여 만든 장식용 단 앞에 앉아 있던 다희가 서란을 반갑게 맞이했다. 서란은 다희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 한 손은 꿇은 무릎 위에, 나머지 한 손은 옆의 바닥에 두고 고개를 숙였다.

 

일어나시오. 그리고 오늘의 다회에서는 말을 해도 좋소. 본래 다회에서는 말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나 이 다실의 주인은 어디까지 나 신다희요. 그러니 오늘 이 다회에서만은 말을 해도 좋소.”

 

서란은 소리가 나지 않게 무릎을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장식용 단에 걸린 족자를 살펴보았다. 향기로운 꽃에 나비가 날아드는 것을 표현한 족자에는 사비국이 세워지기 이전에 그 자리에 있었던 나라인 고려의 가요가 적혀 있었다.

 

덕은 뒤에서 바치옵고, 복은 앞에서 바치옵고,

덕이며 복이라 하는 것을 임에게 바치려 하니 오십시오.

아으 동동다리.

<다음 글로 이어짐>

알바노동자, 여성, 정신장애인, 성소수자. 노동자와 다중소수자라는 정체성 속에서 길어올린 이야기. 해방세상이 와도 탄압받을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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