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 시원의 물질로 되돌리며 혼 불어넣는 도예, 34년 '소요유' 실천"

[연재]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 최창석 바우가마 대표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22/05/11 [10:15]

"태초 시원의 물질로 되돌리며 혼 불어넣는 도예, 34년 '소요유' 실천"

[연재]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1) 최창석 바우가마 대표

최방식 기자 | 입력 : 2022/05/11 [10:15]

“도예는 누억년 산화돼 부서진 광물질을 태초 형태로 되돌리는 작업이죠. 그 환원 물질에 새 생명(예술의 혼)을 불어넣고요. 딱딱한 알맹이에 불과한 씨앗에 새 싹을 틔우는 농부처럼요. 치밀한 계획, 그런 건 없습니다. 영감을 따르는 거죠. 수십억년 시원을 찾아가는 데 자잘한 기술이나 꾀로 되겠어요?”

 

여주 가남에서 ‘바우가마’를 운영하는 최창석 도예가(61·남). 그가 기자에게 털어놓은 34년도예인 삶이다. 그는 바이러스 공세를 딛고 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오는 13일부터 사흘간 안금리 작업장에서 ‘시를 굽다’ 행사를 개최한다. 김동환 시를 새긴 작품을 전시하고 시를 낭송하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10월에 또 한 번 열 예정.

 

얼핏 넘겨다본 그의 삶은 발버둥. 도자 예술·산업 지원이 없다시피 하니 도예인으로선 피할 수 없는 숙명. 입에 풀칠조차 힘겨운 예술인들 삶. 코로나19까지 겹쳐 그들은 수개월째 작품 활동을 못하고 있다. 생명이 피어나고 봄꽃 화사한데 굶을 수만 없어 소매를 걷어 붙인 것. 살아내야 하기에.

 

최 작가는 여주의 백자부터 분청, 그리고 회령자기까지 섭렵했다. 중국 일본, 그리고 유럽의 도자 보다 월등하다는 한국 도자를 알게 됐고, 이제는 어엿한 중견.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도자인생이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손사래부터 친다. 설명도 못하겠고 비교도 말란다.

 

▲ 34년 도예인 삶을 풀어놓는 최창석 바우가마 대표.  © 최방식


13~15일 가마터 ‘시를 굽다’ 작품 전시회

 

자신의 도자 미학을 짚어 달랬더니 작가는 버나드 리치 이야기를 꺼낸다. 영국 현대 도예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나드. 중국도예를 배우고 일본에 유학했다. 거기서 조선도자를 보고 흠뻑 빠져들었다. 조선 ‘달항아리’ 한 점 구입해 ‘행복을 가득 품었다’고 즐거워했다는.

 

“버나드가 미국의 한 도자학교에서 이런 말을 했대요. 세상 사람들은 도자 하면 흔히 중국 일본 조선 도자를 손에 꼽지요. 그런데 공부가 깊어지면 조선도자가 최고임을 알게 됩니다. 거기까지 가면 도예공부를 끝냈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어떤 차이를 말한 것일까 궁금해 하자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중국 일본 도자는 합리주의, 조선도자는 자연주의를 구현하죠. 조선도자는 심심한 가운데 은은한 매력을 가졌거든요. 그릇을 질식시키지 않는 비우는 도자. 새 상상력을 무한 자극하는 거지요.”

 

한중일 도자 구별법은 간단하단다. 매병이나 옹기 등 한국 도자를 풀밭에 세워놓으면 어디든 잘 어울린다고. 현란하거나 지루함을 거부하는 자연주의 미학의 집합체. 조선 건축이 중국 일본과 달리 좌우대칭이 없는 특징과도 일맥상통한단다.

 

도자가 무엇인지 궁금했는데 답이 놀랍다. 수십억년 산화된 물질을 가열해 산소를 빼내고 본래 물질로 되돌리는 환원. 불완전연소(산소 부족)에 따라 탄소가 표면침투(침탄작용)해 물질 속 산소와 결합(이산화탄소)해 날아감에 따라 물질을 산화전 상태로 돌아가는 도자. 그 과정서 색 또한 깊고 고와진단다.

 

“그러니까 도예는 조물주 아님 우주 자연이 애초 만든 시원물질로 수십억년 산화된 것을 되돌리는 작업이죠. 물질을 구성하는 지수화풍을 주무르는 예술이고요. 실패작은 깨버리니 특수폐기물을 만들기도 하지만요.”

 

자연주의 한국도자 심심하나 은은한 매력

 

도자를 농사에도 비교했다. “농사는 생명을, 도자는 무기물을 다루죠. 무기물을 환원 또는 산화 소성으로 필수 생활용품과 예술품을 창조지요. 무기물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해 그릇농사라 부르죠. 정성을 바치면 결과 또한 좋은 게 닮았고요.”

 

▲ 여주 가남에 있는 바우가마 담장 위 풍광.  ©최방식


오랜 경력과 거침없는 언변에도 작품 해설이나 평가를 삼가는 그의 태도. 스타워즈 삽입곡으로 사용된 오케스트라 ‘목성’을 떠올렸다. ‘행성’(영국 근대음악 대표작가 구스타프 홀스트의 1914년 작)에 수록된 7개 관현악 중 가장 장중하며 서정적인 표제음악. 점성술에 끌려 작곡했다는 ‘환희의 전령’ 부제를 단 음악. 탁배기 한 잔, 그 불콰함을 담은 듯.

 

최 작가는 요즘 회령자기에 빠져있다. 천지 화산재가 북서풍을 타고 날아갔을 회령. 귀한 화산재 점토가 있어 일찍 도자문화가 발전했던 지역. 볏짚 유약을 잘 활용하면 호쾌하고 시원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회령자기. 그에겐 특별한 인연이 있단다.

 

그의 본은 경주.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 가문. 갑오년(1894년) 혁명이 좌절되고 조부는 야반도주 함흥으로 이주했다. 한데 작은 할아버지가 일왕 암살활동 혐의로 일본 유학(메이지대) 중 붙들려 취조받다 사망했고, 할아버지는 독립군 지원 혐의로 일경에 치도곤을 당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다. 그의 부친 나이 아홉 살 때.

 

아버지는 17살에 징용을 피해 금강산으로 숨어들어 승려 행세를 하며 신계사 목수를 했다. 48년 월남해 월정사 방하남 스님(탄허 스님 상좌)과 절 건축 일을 했다. 그러다 여주로 와 군청 한옥목수를 맡았지만 보수가 형편없었다. 여튼, 신륵사 등 여주 문화재에 부친 손이 안 간 데가 없을 정도라고.

 

그는 여주에서 나고 자랐다. 독재를 싫어했던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민주주의에 관심이 컸더랬다. 학교를 가본 적 없던 부친이지만 라디오를 늘 들어 그럴 거라고 그는 추정했다. 그래선지, 박정희가 총에 맞았을 때 고3 학생이었는데 춤을 췄다고 했다.

 

탁배기 한잔 그 불콰함 담은 ‘회령자기’

 

대학에선 사회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독재는 그를 학문에 매진하게 두지 않았다. 집회 시위에 빠져들었다. 정권 나팔수 방송 시청료 거부운동, 조선일보 안보기 캠페인 등. 언론고시를 준비했지만 포기하고 여주 지역문화운동을 시작했다.

 

여주민예총 창립을 주도했고 첫 지부장을 맡았다. 그는 풍물에 노래실력을 활용, 여주 문화운동을 키우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넉넉지 않은 집안 사정에 활동비와 생계비를 마련해야 했던 최씨. 도예를 하는 선배 작업장에서 알바를 시작했다. 유신 반대운동을 했던 그 선배와 함께 일하며 토론하고 술 마시며 지내기를 9년. 그만 자신이 도자장이가 돼 있더란다.

 

▲ 최창석 도예인 작품 전시실.  ©최방식

 

선배 가마에서 알바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물레를 샀다. 여분이 없어 연습하려고 구입했던 것. 자취방에 들여 놓고 열중한 지 육개월. 물레 대장(조각 그림 성형 등 부분별 최고)이 될 수 있었다. 월급이 25만원에서 80만원으로 올랐다. 돈 벌어 풍물(당시 장구 3만원)을 마련하려던 계획이 열매를 맺은 것. 그리고 이젠 30년을 넘긴 중견 작가.

 

바우가마 뜻을 물으니 어릴 적 아버지가 그를 줄곧 불렀던 ‘바우’라고 했다. 도자가 산화해 해체된 흙을 다시 바위처럼 단단한 물질로 만드는 것이기도 해서. 그의 이름 창석(昌錫)도 따지고 보면 산화(부식) 되지 않는 바우 속 희귀물질 주석처럼 되라는 뜻. 아버지가 붙여준 것이다.

 

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그랬다. 이름은 이미지의 의미를 정박한다고. 바우는 그의 이름이고, 가마 이름이며, 아버지의 염원이고, 자신의 평생 일터가 된 것이다. 마치 사진 제목이 모호했던 이미지의 메시지를 특정해 오해소지 없이 전달하듯.

 

최씨는 지역 문화예술계에서 바른말 잘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다. “제 눈에는 모순 보이거든요. 행정이나 도자재단 관계자들은 모르거나 뭉개는 거고요. 말하면 불편해 하죠. 난 이해관계가 없으니 할 말 하는 거고. 지적해도 바뀌지 않지만요.”

 

학생운동 여주 문화운동 뒤 숙명, 도예의 길

 

봄꽃 이팝이 흐드러질 때다. 그의 작업실 가득한 백자를 보며 그 하얀 꽃을 연상했다. 미움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며 입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그의 성정. 꽃무리를 수북한 쌀밥(이밥)으로 봤던 이들은 또 얼마나 허기졌을까. 풍년이라도 예측(氣象木)하고팠겠지.

 

여주도자에 그는 할 말이 많다. 강천면에 30~40개의 가마터가 있고, 안금리 한 골프장엔 8백년도 더 된 게 있다. 광주(조선 사옹원 분원 있던)나 이천에 없는 고령토가 나는 도예 본고장. 1884년 분원 폐쇄 뒤 사기장 6명이 들어와 분원 생산량보다 많은 도자를 만들어낸 여주. 도자재단이 이천에 들어서고 여주가 밀리기 시작했다.

 

“국내 도예 가마는 2천개 정도. 그 중 50%가 여주·이천·광주에 있죠. 여주에만 6백여개 넘게 있었어요. 하지만 행정 난맥상으로 이천 등으로 빠져나갔죠. 이천에 들어선 도자재단은 이천 중심으로 지원해요. 여주시는 도예과를 없애고, 여주지역 대학은 취업 안 된다며 도예학과를 폐쇄했고요.”

 

▲ 바우가마 도예 전시실 밖.   © 최방식


도자기를 빚는 그의 모습은 어떨까. “도예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실험이지요. 사전에 아무런 계획도 안합니다. 물레 앞을 빙빙 돌며 착상을 하죠. 영감이 떠오르면 바로 물레를 돌리죠. 마음 가느대로 하는 겁니다. 잡념이 사라진 경지에서.”

 

일부러 계획하지 않는 도예. 문득 떠오른 생각, 그 순간의 영감과 창의력을 좇는 예술. 그 무한 에너지를 자연으로부터 받아 완성해가는 열정. 흥과 멋을 완성하는 신명이겠지. 편협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위자연(無爲自然), 장자의 소요유((逍遙遊) 실천인가.

 

그는 여주양평 문화예술판에서 노래하는 도예가로 알려져 있다. 대선 때 ‘양평 땅, 다 니 땅이냐’(윤석열 후보 장모와 부인의 양평 땅 투기 비판) 문화 버스킹을 하며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했어요. 아버지가 소리를 해 따라한 게 밑천이 됐나 봐요. 재능도 좀 있었던 것 같고. 풍물이나 기타를 독학으로 익혔죠.”

 

알맹이 없는 도예정책 비판에 늘 ‘미운털’

 

가족으론 서양화를 공부했고 서울에서 문화센터 강사를 하는 아내와 아들·딸을 뒀다. 잘생긴 외모 장대한 몸. 여인들의 관심을 꽤 끌었을 듯싶은데, 그렇지 않단다. 청년 시절 후배들이 ‘결대위’를 구성하고 매주 한 번 맞선을 추진키로 했을 정도로 숙맥이었다나.

 

혼인 스토리는 의외. 이웃 도예인 집 한 모임에서 처음 본 여인. 몇 차례 만나 불꽃이 튀었고. 월악산에 놀러가 혼인 승낙을 받았다고 했다. 듣고 있던 하현주 화가가 못 참고 나섰다. “아니잖아요. 정상에 올라 결혼해주지 않으면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해 꼬셨다고 했잖아요.”

 

큰 애(아들)는 살가운 친구. “밤새 술을 따르며 노장자와 동학 이야기를 하죠.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며. 한 스님이 동자를 데려와 집안을 들여다보는 꿈을 꾸고 얻은 아이여서 그런지...” 딸은 디자인 공부를 마치고 직장에 다니는 데, 페미니즘에 관심이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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