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방송에서 연일 머릿기사를 장식하던 카이스트 뉴스. 서남표 총장의 개혁에 대해 많은 이들이 흥미로워하는 것 같다. 젊은 사회엘리트의 극단적인 선택에 관심들이 집중돼 있어서 그럴까?
일반인들의 이런 반응은 대부분 젊은 엘리트의 죽음이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관측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자신이 발을 딛은 사회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비판적 사회의식을 갖고 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접근하는 태도들이 개인이나 사회 모두 그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언론은 특히 사회의 '수재'로 지칭되는 카이스트 학생들이 4명이나 자살을 한 사실을 두고 그저 평면보도만 쏟아내기에 바빴다. 향후에도 비숫한 사건들이 거듭될 수 있는데도 언론이 방관자적 자세를 가진 것이다. 여론을 주도하는 매체 역시 사인 등 한국사회의 현상을 제대로 분석하지 않고 재미거리로만 보도하곤 했다. 카이스트 사태의 본질은 경쟁위주의 1등만이 생존하는 독점·특혜 논리를 학교현장에 접목함에서 비롯되었다. 선택된 자로서 엘리트 계층의 자기 소외, 그리고 이를 부추기는 사회가 4명의 젊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다. 특히 이들의 죽음은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기득권을 누릴 대상인 당사자들이 죽음으로서 이를 거부하였다는 데 그 본질이 있었다. 인류는 오랫동안 진보(또는 평등)와 보수(또는 자유)라는 두 가치를 놓고 논쟁을 해왔다. 상대적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특정 가치만을 절대로 여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는 혁명전사의 대열에 기꺼이 합류하였던 것이다. 사실 진보와 보수라는 가치의 선택은 그 사회의 환경에 의하여 각자가 자연스럽게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두 가치 중 어느 가치가 더 중요한지는 사회의 흐름 속에서 현재엔 어느 지향점에 더 중점을 두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이다. 진보는 다수의 사람들이 고루하게 공존하도록 한마디로 평등을 의미한다. 자유는 능력있는 사람이 그 능력에 따라 더 많은 사회적인 혜택을 부여하도록 사회제도를 확립하고 자적으로 하는 틀거리이다. 카이스트의 문제는 민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세칭 소수 엘리트이념을 교육현장에 투입함으로서 이미 예고되었다. 게다가 언론이나 여론주도층도 카이스트식 엘리트교육을 부추켰다. 카이스트 사태를 접하면서 언론의 이중성도 경험하였겠지만 한국사회에서 현재 선택되어야 할 가치에 대하여도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갖게되는 것이 큰 교훈이다. 지형을 좁혀여수로 집중해 보자. 여수는 부정직한 정치인들의 양산체로서 오명을 외부로부터 받고 있다. 그러나 이를 제도적으로 혁파할 수 있는 그 어떤 실천적인 방안도 제시되는 않고 있다. 불량정치인의 자동퇴출이라는 절대절명의 명제앞에 정치권 사회지도층은 자신의 이해로서 이를 판단하고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회의 소금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일부 시민단체와 소속 활동가들이 꾸준하게 이에 대한 제도적인 개혁방안을 간헐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수준이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사회전체가 지향해야 할 대의엔 원칙적으로 동의를 하지만 사회전체의 공익과 자신의 사익이 충돌되었을 때 자신의 이해에 집착한다. 본능이기에 당사자의 도덕에 의해 자율적인 정화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운 집단들이 이를 자신이 몸담고 있는 현장의 구성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여 제도로서 정착하는 것만이 '윤리적 사회'의 최소한의 토대를 형성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현)대안대학 녹색대학교 교수(사회읽기), 경제평론/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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