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요? 멋모르고 외면하는 거죠”

18.6km 서울성곽 문화역사여행① 장충체육관~혜화문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12/07/18 [01:49]

“서울살이요? 멋모르고 외면하는 거죠”

18.6km 서울성곽 문화역사여행① 장충체육관~혜화문

최방식 기자 | 입력 : 2012/07/18 [01:49]
‘서울살이’,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가족을 건사하고, 돈을 벌고, 삶을 이어가는 도시인의 존재란 무엇인지. 멀고 유명한 제주도나 푸켓은 찾아가면서도 늘 마주하고 스치는 이 가공할 도시 속 이웃, 그리고 우리의 삶은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으니까요. 맹목적 서울 탈출로는 그 답을 얻을 수 없는 게 당연. 그러니까 나를 찾기 전 내 사회적 존재를 찾는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자에게 주말 가방 둘러메고 집 나서는 건 그리 새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난 14일의 출발은 여느 때완 달랐습니다. 뭐 하나 딱 부러진 게 없어 늘 미적거리는 도시촌놈이 작심하고 여행길에 올랐거든요. 두근거림 반, 불안 조금. 배낭에 우산 챙겨 넣고 까칠한 지하도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거대 도시 깊숙한 곳으로 내려섭니다.

여행협동조합(사실은 추진위)을 올 말까지는 설립하겠다고 안간힘을 쓰고 중인데, 도심 문화역사여행도 그 중 하나입니다. 지인 몇, 아님 혼자 토요여행을 즐기는 저에게 몇 달 전부터 권고가 이어졌습니다. 서울성곽, 북한산둘레길, 수도권 주변 산과 산성들을 여행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죠.

▲ 서울성곽여행 18.6km.     © 최방식

▲     © 최방식

도시인 습성이 대게 그럴 테지만 필자 역시 망설임의 대가입니다. 거대도시에 산다는 게, 그 공룡체제에 나름 버텨본다는 게 쭈뼛거리고 주춤거리는 것이죠. 세상에 여행할 줄 모르는 바보가 어디 있겠냐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는 응답엔 어렴풋이 눈치챘죠. 빨리 해보라는 건데, 이쯤해서 손을 들었습니다. “간다, 서울성곽여행.”

망설이고 쭈뼛대다 “간다, 서울성곽여행”

가다 놀고, 놀다 가면 되겠거니 하고 질렀는데, 은근 걱정이 많습니다. 여행협동조합 카페에 안내 글을 올렸는데, 동행자가 안 나타나면 낭패라 생각했거든요. 사서 고생이라니? “없으면 혼자 가지 뭐.” 중얼거리며 문득 달리는 전철 앞자리 사람들을 쳐다봅니다. 하나같이 무표정. 딱 하나, 눈 마주친 한 꼬마만 ‘방긋’.

장맛비도 여행의 걸림돌이 되진 못합니다. “비 온다는데 갈 수 있냐”는 전화에 “까짓 비야, 도심여행에 아무 것도 아니다”고 응답했지만 그래도 찜찜해 한마디 덧붙이긴 했습니다. “서울은 그리 많이 안 온답니다.” 불안감에 후배·지인 몇을 꼬드겼습니다. 아마 부탁에 못 이겨 서넛이 온다고 했을 겁니다.

장충체육관 앞에 도착하니 비가 그쳤습니다. 하늘 맑고, 바람 살랑살랑. 땡볕조차 구름에 가렸으니, 최고의 날씨. 뭔 놈의 공사를 해대는 지 사방을 가림막으로 막아놔 답답한 데, 여행자들이 하나 둘 모여듭니다. 한 지인은 프랑스인까지 대동했더이다. 여행협동조합 카페 보고 온 이도 여럿. 모두 열둘이 모였습니다.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마치고 성곽길로 고고씽^^*. 장충동·신당동으로 이어지는 성곽 흔적을 찾아 광희문까지 가는 골목길. 박원순 시장과 동행 취재차 가봤다며 헛갈리는 길을 안내해주는 참여자가 있어 광희문까지 30여분 잘 찾아갔습니다.

▲ 가족을 건사하고, 돈을 벌며 삶을 이어가는 도시인. 낯섦 속 자기를 찾겠다고 관광지를 찾아 제주도나 푸켓으로 날아가지만, 정착 늘 마주하고 스치는 이 가공할 도시와 그 속살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멋모르는 나. 속살을 헤집는 여행을 시작합니다.     ©유영훈

▲ 가지각색의 동대문표 의류 속에 살아난 전태일을 봤습니다. 청계천 다리 위 거기 그렇게 늘 서있는 추모동상엔 잠시 입맞춤을 해봤습니다.     © 유영훈

성곽돌이 개인집 축대로 쓰인 걸 여러 번 목격하며 장탄식을 해대던 아쉬움도 잠시. 2백여 미터 남짓. 광희문까지 복원해놓은 높이 10여미터의 웅장한 성곽이 자태를 드러내자 일제히 환호성을 지릅니다. 처음으로 마주한 성곽이니 감격스러웠죠. “와~ 이거야.”

성문밖 신당동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 일행은 잠시 광희문의 역사를 공부했습니다. 1396년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20여만명을 동원해 봄·가을 90일에 걸쳐 축성한 18.6km 도성과 4대·4소문. 일제강점기 망가진 문루를 75년 복원하며 길 밖으로 옮겨버린 이력까지. 도성안 시체를 빼내가던 시구문(屍口門), 성 밖 마을 신당동(神堂, 시체의 명복을 비는, 훗날 新堂으로 표기)이 생겨난 이야기를 하며 좀 엄숙해졌을 겁니다.

역사공원 건물이, 시청사는 또 어떻고

한양공고 옆, 동대문문화역사공원까지 성곽이 싹둑 잘려나간 현장을 보며 느낀 아픔도 잠시. 공사 중인 샛길을 지나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시원한 느낌입니다. 오세훈 시장시절 복원해놓은 성곽 길을 2분여 밟았나요. 다시 끊기고... 문화역사와 어울리지 않는 공원 내 건축에 한숨이 여기저기 터져 나옵니다. “시청사도 저렇다며. 뭐야 그게...”

남산서 흘러내린 도성 개울물을 빼내던 이간수문(二間水門)을 거쳐 평화시장. 섬유·봉제인들의 일터와 주변을 꿰찬 재벌·대기업들의 ‘첨탑건물’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가지각색의 동대문표 의류 속에 살아난 전태일을 잠시 보다, 청계천 다리 위 세워놓은 추모동상에 잠시 입맞춤을 해봅니다.

평화시장 한쪽에는 고서점들이 늘어섰습니다. 늘 새 것만을 찾는 세태를 되돌아보게 하죠. 낯선 도시를 적잖게 여행한 편인데, 새 도시를 갈 때마다 벼룩시장을 들릅니다. 뉴욕·파리, 그리고 서울에서도 풍물시장이 늘 붐비는 걸 보면, 건 기자만의 취향은 아닌 모양입니다.

▲ 흥인지문입니다. 안내소를 찾으니 성곽길지도와 순례인증이 있습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생겼는데, 문구는 없고 잘생긴 선비 그림입니다.     © 유영훈

▲ 성곽길이 채소밭으로 쓰이고, 한 젊은이는 여장 위에 올라 더위를 식힙니다. 아, 성곽길 곁에 산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절감하는 순간, 여행자들 한마디씩 뱉습니다. “이런데도 있네.”     © 유영훈

맘이 편해지고, 그 도시 문화역사 향기를 느낄 수 있어서 그럴까요? 낡은 건 버릴 게 아니라 간직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가르쳐주니까요. 아버지가 입던 옷, 이웃이 쓰던 물건을 건네받을 때면 “뭐, 이런 꼬질꼬질 한 걸 다... 버리라”고 했던 기억뿐인데 ‘헌 것 향기’ 운운하는 걸 보니 나이가 드는 모양입니다. 늦게 철이 들었거나?

걷기를 멈추고 잠시 허기진 배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동대문의 유명한 닭칼국수로 의견일치. 식당 하나를 골라 들어서는데, 웬 카메라맨(무비)이 다가옵니다. 00케이블채널이라며  취재를 하겠답니다. 프랑스인이 있어 흥미로웠던 모양. “닭이 맛있다, 칼국수는 더 맛있다”고 사실과는 좀 거리가 있는 찬사를 남발하며 1시간여를 먹고 놀았습니다.

막 일어서는데 프랑스인 다비드가 커피에 초콜릿을 배낭에서 꺼냅니다. 진한 맛이 스페인의 어느 시골 카페에서 느꼈던 그 에스프레소 맛입니다. 초콜릿까지 즐기며 그에게 “복 받을 겨”를 외치고 다시 걷기를 10분. 흥인지문입니다. 안내소를 찾으니 성곽길지도와 순례인증이 있습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처럼 생겼는데, 문구는 없고 잘생긴 선비 그림.

다비드 커피에 에스프레소, “복 받을 겨”

동서남북의 음향오행과 풍수를 봤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동, 어둠이 찾아오는 서, 햇볕이 드는 남, 차가운 기운의 북. 인의예지(신)를 따 좌청룡-흥인(지)문, 우백호-돈의문, 남주작-숭례문, 북현무-숙정문(넘어 홍지문)도 탄생했다죠. 인왕산(338미터)에 비해 낙산(125미터)이 낮아 비보(裨補, 기를 보강)를 한 게 첨자(갈지, 之). 옹성(성문 둘레로 작은 울타리성)도 그래서 쌓았고요.

흥인지문이 잘린 왼쪽 성곽길 초입. 표지석에 6백년 전 메시지를 봅니다. “...이패석 000, 삼패석 000, 강희 00년...” 돌이 새까맣게 그을려 글씨도 잘 안보이지만, 설령 보여도 한자를 제대로 모르니 읽을 길 없는 메시지들. 한양도성 6만자(18km)를 97구간으로 나눠 고을별로 축성하게 하고, 고을과 책임자 이름을 새겨놨답니다. 공사실명제죠.

▲ 백두대간 등줄기에서 연천·포천·동두천·의정부·북한산을 거쳐 북악산, 그리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기(氣)를 한눈에 느낄 수 있습니다.     © 유영훈

▲ 낙산공원을 지나 작은 암문으로 빠져나가니, 성밖 세계가 다시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그렇게 1시간여, 성곽이 가장 시원스럽고 웅장하게 자태를 드러낸 곳입니다.     © 유영훈

이화동쪽 성곽 안쪽 길을 따라 낙산에 오릅니다. 백살이 넘었다는 동대문교회가 성곽길을 가리고 서 있습니다. 이대병원 자리는 말끔하게 공원으로 바뀌었고 건물 중 하나는 개조, ‘디자인센터’로 활용되고 있답니다. 병원이 증축을 고민하며 교회에 건물을 팔라고 제안한 적이 있는데, 교회가 그랬다네요. “병원을 우리한테 파세요.”

이화동 성곽길을 오르는데 예상 밖 풍경이 펼쳐집니다. 성곽길이 채소밭으로 쓰이고, 어딘가에선 한 젊은이가 여장 위에 올라 더위를 식히더군요. 아, 성곽길 곁에 산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절감하는 순간, 여행자들 한마디씩 뱉습니다. “이런데도 있네.”

낙산공원 어디쯤일 겁니다. 정자 하나 있어 좀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시원히 내려다보이는 서울 구경도 좀 하고. 백두대간 등줄기에서 연천·포천·동두천·의정부·북한산을 거쳐 북악산, 그리고 경복궁·창덕궁·창경궁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기(氣)를 한눈에 느낄 수 있더군요.

내사산(內四山)인 북악산·인왕산·낙산·남산과 한양도성의 풍수(장풍득수)를 느끼며 임진년 여름 장맛비 그친 어느 오후를 여행자들은 그렇게 즐겼습니다. 누군가 타온 원두커피, 바리바리 싸온 과일을 조금씩 나눠먹으며 참가자 소개시간도 가졌습니다.

“전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냥 왔어요”

3류 언론인이라는 자와 그 표현을 따라하는 자, 그냥 자기라는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이, 제 이름도 밝히지 않고 갈 데 없어 왔다는 이, 옆사람 따라왔다는 이, 노동운동을 하다 뒤늦게 대학에서 강의한다는 참여자까지. 여행자마다 자신의 흐릿한 정체를 제 맘대로 알립니다.

▲ 동숭동에서 한성대역으로 넘는 고개 끝에서 다시 끊긴 성곽. 임진왜란 때, 일제강점기 때 우리 문화유적을 처절하게 파괴한 일본인들의 폭력만행이 가슴 한편을 아리게 합니다.     © 유영훈

▲‘홍화문’ 이름을 창경궁 정문에게 빼앗기고 만 혜화문. 길 한 가운데서 우뚝 선 위세를 잃고 이젠 길 한편으로 쫓겨난 거기 혜화문 앞에서 일행은 다음 여행을 기약했습니다.    © 유영훈

낙산공원을 지나 작은 암문으로 빠져나가니, 성밖 세계가 다시 시원하게 펼쳐집니다. 혜화문까지 성밖 길을 걸어야 합니다. 암문이 없으니까요. 1시간여, 성곽이 가장 시원스럽고 웅장하게 자태를 드러낸 곳입니다. 제법 친해진 여행자끼리 돌의 생김, 부서져가는 모퉁이 돌을 보고 담소를 나누며 동소문을 향합니다.

동숭동·혜화동 끝 가톨릭대에서 한성대역으로 넘는 고개. 그 끝에서 다시 끊긴 성곽. 계단을 내려와 역 지하도를 거쳐 반대편 혜화문에 오르니... 임진왜란 때, 일제강점기 때 우리 문화유적을 처절하게 파괴한 일본인들의 폭력만행이 가슴 한편을 아리게 합니다.

혜화문. 성종왕이 대비 3분을 모시느라 창덕궁이 모자라 사용한 창경궁.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으로 기거했던 수강궁을 개조해 만든 궁궐인데, 정문을 ‘홍화문’이라 해 결국 그 이름을 빼앗기고 혜화문이 되고만 사연. 길 한 가운데서 우뚝 선 위세를 잃고 이젠 길 한편으로 쫓겨난 모양을 보며 일행은 다음 여행을 기약했습니다.

일부는 가고 9명이 뒤풀이에 모였습니다. 관심은 프랑스인. 다비드는 제법 막걸리를 잘 마셨습니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서울에 3년여 살고 있다는 그이. 파리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동경에서 무슨 정치연구소를 운영하다 아내 나라로 와 그림을 그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의 서울 직업은 화가.

칼국수에서부터 도토리묵과 감자전 등 음식을 먹을 때마다 맛 표현을 잘하기에 “요리 잘하냐”고 물으니 그렇다네요. “집에서 누가 요리를 잘 하냐”니 역시 자기라고 하고요. 확인할 길 없으니 그리 믿기로 하고. 부연설명까지 합니다. 유럽에선 남자들이 요리를 잘 한다나. 이젠 정치보다 문화예술에 더 관심이라고 합니다.

“그럼, 남자랑 안 살면 되지 뭐”

요리부터 온갖 테마가 술자리 안주거리로 등장했습니다. 여성 참여자 한 분이 퉁명스럽게 내뱉습니다. 왜 한국 남자들은 요리를 안 하냐는 거죠. 모두 여자가 해줘야 하고... 한 남자 여행자가 재빠르게 받습니다. “그럼 남자더러 하라고 해야죠. 요리를 잘 못하거든 가르쳐 주고...” 여자의 답은 그래도 안한대요. 남자 왈 “그럼 남자랑 안 살면 되지 뭐.” 곧 야유가 뒤따릅니다. “에이~”

아는 이들, 온라인 카페를 보고 찾아온 이들이 하나 둘 모여 화려하지 않은 도심 골목과 성곽길을 걸었습니다. 뭔가 찾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여행이 꼭 나와 삶을 벗어나야 시작되는 게 아니 듯이요. 다만, 도심 속 나를 찾는 여행에서 아쉽게도 아직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실마리라 할지, 깨달음이라 할지, 그저 하나 있다면 ‘멋모르고, 외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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