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미지의 자유를 꿈꾸는 반역의 소굴"

녹색 반가사유④ 낯선 탈주를 그리는 자연의 억척스런 모험...

정미경 | 기사입력 2007/05/12 [00:40]

"숲, 미지의 자유를 꿈꾸는 반역의 소굴"

녹색 반가사유④ 낯선 탈주를 그리는 자연의 억척스런 모험...

정미경 | 입력 : 2007/05/12 [00:40]
송홧가루가 고인물의 가장자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람이 불더니, 그 바람결을 타고 고운 미세가루를 온 천지에 흩뿌리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침엽수는 바람에 의한 이른바, 풍매로써 수정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활엽수는 벌과 나비등과 같은 곤충을 통한 충매로 수정을 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지요.
 
▲ 대체적으로 활엽수는 곤충을 통한 충매로 수정을 합니다.   © 정미경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도 있고 곤충도 있으며,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수를 헤아릴 수도 없는 각양각색의 생명체와 비생명체가 숲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숲은 참으로 기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요.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동물들의 행동을 유인하는 것을 한번 보셔요! 동물뿐만 아닙니다. 무기물질 또한 순환을 매개로 하고 있으니 말이에요.
 
식물보다 생태적 지위가 한 단계 높다고 말하는 동물들의 생존과 일상적인 행동까지도 규정하는 식물. 식물을 수동성의 표상으로 본다면 동물을 적극성의 표상으로 말하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이 동물들의 행동을 유인하는 것을 한번 보셔요!     © 정미경

수동성을 여성성의 상징이라고 한다면, 남성성을 적극성으로 표현한 사회적 통념은 아직은 보편화된 사회적 의식이지요. 하지만, 숲은 그러한 가치를 전복시키고 있습니다. 수동성이 적극성을 통제하는 것 말이에요.
 
어쩌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역의 소굴이 숲이 아닌가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그러한 것은 비단 이것뿐만이 아니지요.
 
대체로 식물은 같은 종끼리는 경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햇빛과 물, 그리고 양료와 같은 것을 두고 벌이는 경합은 때로는 치열하기 그지없어요. 물론 경쟁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 반역의 소굴이 숲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 정미경

하지만, 짝짓기를 한다던지 수정을 할 때 등 번식을 위한 행동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매우 특이한 경향성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같은 종 끼리 경합하는 대신, 다른 종과 전략적인 협동을 통해 종 다양성을 넓혀나가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근친교배나 자가수정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대신, 전혀 다른 종을 매개자로 하여 번식을 꾀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바람에 맡기는가 하면 이동하는 동물의 몸에 붙거나 먹이로 되었다가 배설물로 새로운 곳에 정착하는 것은 고전적인 번식의 전략입니다.
 
꽃을 피워, 나비와 벌 등을 유인하여 꽃가루를 퍼뜨리고, 동시에 그들이 묻혀온 신선한 꽃가루로 가루받이를 하여 수정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식물은 근친교배나 자가수정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는 대신, 전혀 다른 종을 매개자로 하여 번식을 꾀합니다.     ©정미경

 그래요. 익숙함이 가져다주는 편안함보다는 낯선 것으로의 탈주를 꿈꾸는 그 너머는 어김없이 모험과 도전이 도사리고 있어요. 안락함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 쉽고 너른 큰길을 마다하고 샛길마저 등지며 지도에 없는 길을 간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험과 도전입니다.

주어진 틀, 이를테면 체제, 계급등과 같은 이른바 제도를 뛰어넘어 파격에 몸을 맡기는 것은 극심한 불안감을 자초하는 것이 아닐 수 없어요. 그것은 어쩌면 탈옥을 꿈꾸는 수인이 감내하는 불면의 기나긴 밤 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낯선 길을 가는 것에 대한 흥분 또한 따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한번도 가보지 미지에로의 동경이 왜 그리도 억척스러울까.
 

▲이화수정을 선택하려는 경향성은 변종을 그리는 식물의 본능입니다.     ©정미경


자기부정! 나는 그것을 자기부정이라고 보고 있어요. 이화수정을 선택하려는 경향성은 변종을 그리는 식물의 본능입니다. 변종과 변종, 돌연변이의 출현을 기대하는 열망이 생사를 가르는 모험으로 선뜻 나서게 하는 것이라고 믿어요. 이 돌연변이의 축적이 진화의 동력이라는 것을 식물들은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종의 창조! 그리하여 종 다양성을 넓혀나가고자 하는 갈망이 도전에 조그마한 주저함도 없이 온몸을 던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때로는 돌개바람에 휘말려 제트기류를 타고 대양을 건너는가 하면 한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기슭에 뿌리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 바람과 함께 나비와 벌과 같은 곤충은 종 다양성을 넓혀나가는 진화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정미경

대부분은 흔적하나 없이 사라지지만, 바늘 끝보다도 더 적은 가능성에 저토록 온몸을 던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참으로 익숙함에 안주해왔던 삶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바람과 함께 나비와 벌과 같은 곤충은 종 다양성을 넓혀나가는 진화의 메신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아름다움은 우아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짧은 한생을 통째로 바치는 처절함 그 자체예요. 저들의 날개짓이 얼마나 고단한 것인지, 때로는 바람을 등지며 나래치는 그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보수주의자입니다.
 
더 이상,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아까시 꽃잎을 따라 북상해오는 벌들의 기나긴 행렬 뒤에는 새로운 창조의 새벽이 열립니다. 나비의 나래짓에 여울지는 숲바람은 창조의 전주곡, 그것을 알리는 불멸의 가락입니다.

 
▲ 나비의 나래짓에 여울지는 숲바람은 창조의 전주곡입니다.     © 정미경

다시금, 바람과 곤충을 부르는 꽃들의 쭈뼛한 기다림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탈과 변태라는 단어가 가지는 주변어가 사실은 창조의 주어가 된다는 사실 앞에 나는 더 이상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부정과 탈주! 그것은 고단함 뒤에 가려져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흙바닥에 수놓아진 송홧가루는 사실은 처참한 시체들의 무덤입니다. 숲은 자유를 꿈꾸는 반역의 소굴입니다. 주검이 즐비한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는 공동묘지입니다.

보셔요! 어제의 숲은 오늘의 숲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내일의 숲은 오늘의 숲과 전혀 다를 것입니다. 거기에 바람과 나비, 그리고 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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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다 2007/05/28 [00:13] 수정 | 삭제
  • ... 이렇게 참 아름답게 표현이 되네요....
    멋진 사진과 아름다운 숲속 감사히 감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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