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대리 문상(問喪)과 긴 이별

광화문단상 “부조금만 전달하고 그만둘까 하다가...”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7/06/17 [02:28]

6월에, 대리 문상(問喪)과 긴 이별

광화문단상 “부조금만 전달하고 그만둘까 하다가...”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7/06/17 [02:28]
며칠 전 포항의 한 상가(喪家)에 다녀왔다. 지인의 장모 상이었다. 연락을 받고 어찌하나 망설이다 곧 조문을 다녀오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음 한 구석엔 거리도 멀고 일도 바쁜데 꼭 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혹시 누구에게 대신 부조만 해달라고 할까도 생각해봤다. 그만두고 고속터미널로 향했다.

세상에 나고 돌아가는 건 자연의 순리다.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선지 누군가 태어나고 출세하고 마침내 돌아갈 때면 친지들이 모여 함께 기뻐하고 슬퍼한다. 그게 인륜지대사니까.
 
“경조사 달갑지만은 않았지만...”
 
하지만 나처럼 게으른 사람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경조사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옳을 성 싶다. 아니면 철이 덜 들었거나. 나름의 변명은 이렇다. “경사는 나 없어도 즐겨주는 이가 많을 테고, 조사는 왠지 서글퍼서 싫고... 격식을 차려야 한다는 게 거북스럽기도 하고...”

죽음은 슬프다. 주검은 참담하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그래서겠지? 하지만 종교인이나 현자는 그리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슬퍼하고 참혹해 하는 이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라고 말들을 하니까.
 
▲ 87년 이한열 죽음을 애도하는 시민들. 이 문상행열은 독재정권에 큰 타격을 줬다.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 전기가 됐음은 물론이다. 

나도 철이 좀 들면서 경조사를 비교적 챙기고 있다. 다 챙기기 어려우면 경사는 아니더라도 조사는 지나치지 말라는 사회적 가르침도 이해하고 있다. 헌데 이날 포항의 상가를 갔다가 지인으로부터 대리문상 푸념을 여러 번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이랬다. 지인이 아는 사람이 한명 있는데 전국에 지부가 있는 노조 위원장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포항 지부장이 대리 문상을 온 것이었다. 그는 왜 대신 왔는지를 설명하고 문상객 틈에 앉아 술도 한잔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이 아니니 소임을 다했으면 얼른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 것을 아는 지인은 얼른 가라고 했고 그 분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리곤 그는 독백이라도 하듯이 “대리문상, 대리문상” 중얼거렸다. 또 한 명의 대리문상 이야기도 해주었다.

한 시인이란다. 지인의 친구인데 그가 도저히 올 형편이 안 돼 포항에 사는 여동생을 대신 보냈다는 것이었다. 2명의 대리문상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인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정이 있는데 대리문상이라도 보내줘 고맙다”는 말을 하면서도 말이다.
 
“위로·부조 뜻 왜곡, 서글프기만”
 
나도 출발 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어서 뜨끔했다. 착잡한 마음에 연거푸 소주만 마시고 있었다. 애초 문상이라는 게 슬픔을 나누는 게 먼저일 테고 대사를 치르는 데 필요한 일손과 돈을 부조하는 게 그 다음이었을 것이다. 헌데 요즘의 세태는 좀 왜곡된 듯싶어 서글펐다.

우리는 위로보다 부조금을 먼저 따지는 풍토 속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꼭 그런 건 아니겠지만 대리문상이라는 게 부조금을 안전하게 전달하는 수단정도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지인도 착잡한 표정으로 ‘대리문상’을 여러 번 언급한 게 아닐까.

이 화려한 계절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게 어쩐지 좀 꺼림칙하다. 하지만 인간에게 그 시작과 끝은 하찮거나 자질구레한 일이나 인연이 아니니 하던 말을 좀 더 해둬야겠다. 싫든 좋든, 원하든 아니든 모두의 관심사인 것도 틀림없으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일이다. 아들놈이 다섯 살 쯤 됐을까. 이 녀석이 한 달 동안 할아버지 죽음에 대해 물어댄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 거냐. 관속에 넣으면 답답해서 어떡하냐? 아빠도 죽느냐... 그 궁금증을 해소하면서 나도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타인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모양이다. 이한열의 죽음이 그랬다. 그는 제명을 다 못살고 갔다. 흉악한 폭력배들에게 살해당한 것이었다. 분노였을까. 제명을 누리지 못한 그의 운명이 안타까웠을까. 문상객이 많았다. 폭력 정권이 놀랄 만큼 말이다.

북의 김일성 주석의 죽음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의 죽음은 남북 화해·협력에 어떤 전기가 될 터였다. 강희남 선생으로 기억한다. 북행 문상길에 경찰에 붙들렸다. 선생은 “조문간다, 길 비켜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했다. 속 좁은 정권은 문상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야 이기는 줄 알았겠지?
 
‘이한열 문상’, 독재정권 놀라...
 
속 좁고 철이 덜 든 기자도 남들의 죽음을 보며 느끼는 게 많았다. 친한 이의 조사에는 가급적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 중 하나다. 먼 친인척이나 친한 이의 경조사 아니면 모른 채 하는 버릇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당해봐야 안다는 말을 절실하게 깨달았으니까. 왜 부조를 하는 지, 슬플 때 친구들의 위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았으니까. 대리문상이 서글픈 건 그래서일 것이다. 긴 이별의 예도 아닌 듯싶고...
  • 도배방지 이미지

  • 문상객 2007/06/19 [19:42] 수정 | 삭제
  • 나도 대리문상 꽤 했는데,
    바쁠땐... 그게 불가피하게
대리문상과 긴 이별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