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은 그리움"

백두의 기슭에서⑤ 원시의 자유, 노마디언의 고향에 어우러져...

정미경 | 기사입력 2007/07/17 [21:23]

"끊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은 그리움"

백두의 기슭에서⑤ 원시의 자유, 노마디언의 고향에 어우러져...

정미경 | 입력 : 2007/07/17 [21:23]
낯설지만 전혀 낯설지 않도록 살갑게 반겨주던 백두고원 입구의 자작나무숲. 북방계통의 대명사가 된, 끝없이 펼쳐지는 이 자작나무숲을 내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이 떠도는 벌판의 밤을 하얗게 뜬 눈으로 지새우며 말없이 서 있을 것만 같은 자작나무숲은 모르긴 몰라도 내안의 어떤 그리움을 안으로 켜켜이 묻어두고 있는 가물거리는 기억인지도 모릅니다.
 
▲ 백두고원 초입 끝도 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     © 정미경

빈 가지 사이를 휑하니 지나가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안으로 자적해 들어가는 긴 침묵이 두려워지기는커녕 도리어 익숙해지는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합니다. 북풍한설이 차라리 포근해서 일까. 눈보라속의 얼어붙은 햇살에 눈맞춤하는 것 이외에는 도무지 요지부동이에요.

그런 자작나무숲이 내 앞에 끝도 없이 펼쳐져있습니다. 북방기후대에 들어선 것이 실감나는 첫걸음이지요. 숨길 수 없는 내안의 그리움을 들켜버린 느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백두산 야생의 원시림.     ©정미경


위도상으로 보자면 이곳은 한대림에 속하는 북방기후대입니다. 하지만, 워낙 높은 고원지대라 온대와 한대, 그리고 툰드라 기후대가 수직적으로 분포해있는 백두고원은 그에 따른 종 다양성이 매우 풍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같은 위도상에 다양한 기후대에 속한 생태사슬이 공존하는 천혜의 보고이지요.

해발고에 따라 낙엽활엽수림대, 침엽 및 활엽혼합림대, 침엽수림대, 아고산관목림대, 고산초본대로 구분되는 수직적 산림대는 남방계통의 생물로부터 북방계통의 생물까지 모두를 아우르고 있어, 이 모두를 확인하고 느낀다는 것은 도무지 엄두를 낼 수 없는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 백두고원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지하삼림,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온대우림.     © 정미경

오래된 원시림으로부터 새로운 식물 천이가 시작되고 있는 시점까지 포괄하고 있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더욱이 복잡다난한 지사학적 과정을 거쳐 오면서 종 및 아종적 분화가 일어나 고유한 생물상을 이루고 있어 백두고원 자체가 신비스러움으로 우뚝 서 있기에 그 장관은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어요.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를 거쳐 오면서 진화해온 생물상이 저지대에 고스란히 살아있는가 하면, 불과 수백 년 전의 화산폭발로 이제 겨우 산림 천이가 시작되고 있는 단계의 고산지대 식생을 동시에 바라본다는 것은 먼 과거와 바로 엊그제 일어난 일을 평면도에 함께 올려놓고 바라본다는 것과 같이 매우 난해하기 짝이 없는 어려운 숙제이기도 합니다.

수천만 년이라는 시대를 동시에 포괄하고 있는 이 백두고원엔, 하늘못에 물 마시러오는 곰들의 어슬렁거림이 있는가 하면, 번뜩이는 호랑이의 눈빛이 서린 폭포 한켠의 바위틈에서 바짝 긴장하는 침묵이 숨어 지내는 묘한 풍광 또한 엄연히 존재합니다. 
 

▲ 수목한계선을 기선으로 하여 거대한 사스레나무 군락이 산림 천이의 중간단계인 두터운 이끼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 정미경

우리에게 익숙한 금강소나무 군락이 있는가 하면, 한 뼘도 되지 않는 고산대의 목본성 식물들 또한 즐비합니다.

냉수성 어류가 지천에서 활개치는가 하면, 왁자지껄한 개구리의 합창과 명멸해가는 반딧불이의 춤들이 어우러지는 이곳은 하늘가는 길목, 시린 이슬을 맞으며 숲에서 밤을 지샐 때 꾸었던 꿈속의 별천지입니다.

뜨거운 기운은 아래로, 차가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야 건강하다는 한방의 인체론, 이른바 하화수승(下火水昇)이론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백두고원은 생태적 완결성을 갖춘 우리시대에 보기 드문 거대한 산림대로 되고 있어요.
 
▲ 광활한 평탄고지에는 핀 신비로운 자주빛깔의 하늘매발톱꽃.     © 정미경

사실 그 모든 풍부한 산림대의 종 다양성은 종횡무진으로 착종하며 지나가는 바람의 자취이기도 합니다. 같은 위도상에 전혀 다른 식생의 분포를 가능하게 하는 바람이야말로 백두고원을 천혜의 보고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요.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과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합쳐져서 이루어낸 백두고원의 허리를 휘감고 있는 금강대협곡과 지하삼림,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온대우림은 포근함에 대한 기억과 시림에 대한 기억을 푸른 안개 속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으로 하여 바람이 일구어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뼘 높이의 상록소관목인 담자리꽃나무 군락.     ©정미경

낙엽활엽수림대에는 그래도 우리 눈에 익숙한 수종들이 태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위 침엽 및 활엽혼합림대에는 신갈나무와 사시나무가 전나무등과 함께 어우러져있어요.

침엽수림대엔 분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낙엽송과 나란히 섞여 자라며 수목한계선을 기선으로 하여 거대한 사스레나무 군락이 산림 천이의 중간단계인 두터운 이끼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위로 상록소관목인 가솔송, 담자리꽃나무가 노랑만병초들과 함께 납작 엎드려 있어요. 한 뼘 높이에서 아기 키 높이 정도까지.

▲하늘못을 가로지르며 날고 있는 바위종다리와 바람, 바위틈에 웅크리고 있는 우는토끼 또한 애초에는 하나였지요.     ©정미경
이어 펼쳐지는 광활한 평탄고지에는 신비로운 자주빛깔의 비로용담, 하늘매발톱을 비롯하여 붉은 보랏빛의 구름송이풀, 두메자운꽃, 구름국화, 그리고 청아한 빛깔의 두메양귀비, 소담스런 바위돌꽃이 널부러진 바위틈 사이로 피어나 있습니다. 이슬을 듬뿍 머금고 있는 바위로 번져가고 있는 지의류는 말 할 것도 없지요. 
 
저지대로부터 고원에 이르기까지 어디하나 조림한 흔적이 하나 없는 말 그대로 야생의 원시림 입니다.그 안에 깃든 신성함은 너무도 자연스러워요. 큰나무는 반드시 어린나무를 키우고 있으며 어린나무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야생화를 길러내고 있습니다. 
 
그에 따른 곤충과 동물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헤아릴 수 있을까. 감히 엄두조차 낼 수가 없습니다. 저들간의 생태적 연관관계는 더더욱 가늠하기가 힘들 수밖에.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인 대형 식육류가 날쌘 걸음으로 돌아치고 이끼를 먹고 사는 우는토끼가 바위틈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흔하디흔한 정경이지요. 은환호라 부르는 소천지에 힝둥새가 머무는가 하면 운무와 바람은 하루 종일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영락없는 애증의 관계임이 틀림없어요. 

 이 모든 것이 바람이 만들어낸 다채로움입니다. 바람이 그려내는 자취이지요. 그래서 그토록 바람 맛이 달랐던가. 신성하기 그지없는 바람 냄새가 저토록 생동하는 화폭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 그것은 바람과 비와 햇살의 거대한 오케스트라가 뿜어내는 신성함 바로 그것입니다. 보셔요! 그 신성함에 취한 자연의 절묘한 어우러짐을…. 
 
사람은 오를수록 욕망이 강해지는데 숲은 오를수록 자기를 낮추면서 비워가는 것을 말이에요. 시린 아픔에 움츠리는 것이 아니라 동토에서 피워내는 열정의 꽃을 보면, 그것도 자외선에 더 진한 빛깔로 드러내는 열정을 말이에요.
 
▲하화수승(下火水昇)이론이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백두고원은 생태적 완결성을 갖춘 우리시대에 보기 드문 거대한 산림대로 되고 있어요.     ©정미경


하늘못을 가로지르며 날고 있는 바위종다리는 시린 별을 물어오기 위하여 바람을 거슬러 때로는 바람과 함께 그렇게 날고 있잖습니까.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고원의 야생화로 피어나잖아요!

그 자유. 밀림의 다채로움을 품고 있는 허허로움의 빈 공간에 외로이 날고 있는 신성한 바람의 친구, 그 자유.

군웅할거 하던 영웅들의 밀영과 귀틀집이 처처에 널려있는 그곳을 외면한 채 자유는 외로움을 숨쉬고 있습니다. 신조차 부끄러워 내 세울 수 없는 신성함의 극치, 이곳은 자유의 회귀처입니다. 
 
▲신조차 부끄러워 내 세울 수 없는 신성함의 극치, 이곳은 자유의 회귀처입니다.     ©정미경


하늘못에 몸을 던져 다음 세상에서는 꼭 바위종다리가 되어 끝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숲을 구름을 헤치며 멀리서 바라보고 싶습니다. 아무런 자취 없는 길을 따라 마냥 걷고 싶을 뿐 입니다.그러다 지치면 한 송이 꽃으로 피면 그만.

하늘에는 시린 별, 고원에는 열정의 꽃, 그 둘은 원래 둘이 아니라 하나였습니다. 바위종다리와 바람 또한 애초에는 하나였지요. 구름과 바람 또한 하나였고요. 햇살과 눈 또한 마찬가지였지요.

자유가 자연을 창조하였습니다. 백두고원에서 나는 이것 하나를 확인하였어요. 광활한 자작나무숲에 눈이 내리면 나는 그때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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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거리 2007/07/26 [09:55] 수정 | 삭제
  • 백두 산자락의 여러 군상도 신기하지만
    정선생님의 여러 해석들이 더욱더
    그 자연에 무한정한 뜻을 심어주고 있어요
  • 유요비 2007/07/23 [11:02] 수정 | 삭제
  • 사진을 보니 명불허전이군요. 적금들어서 꼭 가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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