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곡의 숨은 유혹, 그 쓸쓸함의 자태

녹색반가사유⑬ 평온함에 곯아떨어지는 사랑의 변주곡처럼...

정미경 | 기사입력 2007/09/14 [15:12]

계곡의 숨은 유혹, 그 쓸쓸함의 자태

녹색반가사유⑬ 평온함에 곯아떨어지는 사랑의 변주곡처럼...

정미경 | 입력 : 2007/09/14 [15:12]
 가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 촉촉한 안개를 피워올렸던 계곡의 바람이 오늘은 마루금을 타고 올라, 구름들을 마구마구 흩뜨려놓습니다. 금세 하늘은 푸르름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그 하늘을 담아내는 계곡은 조금씩 기우는 태양과 함께 자기만의 색깔을 비로소 드러내기 시작하지요. 여름 내내 아우성치던 골짜기는 천천히 묵언수행을 할 채비를 시작합니다.
 
▲ 여름 내내 아우성치던 골짜기는 천천히 묵언수행을 할 채비를 시작합니다.     ©정미경

 다래와 머루를 비롯한 덩굴류는 벌써 과실을 떨어뜨리고 있어요. 골짝의 푸르른 기운을 가득 머금은 물푸레나무는 넘치는 생명력으로 기웃거리는 가을을 냉큼 끌어당깁니다. 시원스레 흐르던 계곡수는 벌써 시릴 정도로 차가워졌습니다.
 
 발길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계곡이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음수성 수종들로 이루어진 계곡 주변의 나무들은 왕성한 자맥질로 가을을 꼬드깁니다.
 
▲ 흩뿌려져 저마다 숨어지내던 동무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곡이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도 모르라고 고독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 정미경

  이른 봄, 차라리 늦겨울이라고 해야 할 때, 이른 시기에 얼음새꽃을 피워냈던 계곡은 싱그러운 녹음방초로 여름을 빌려오더니 벌써 계절을 저만큼 앞질러가고 있어요. 일광이 짧을 수밖에 없는 골짝에 가을을 물들이려고 스스로 자적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위험한 바위등성이를 타고 오르내리는 산양과 같은 은둔자에게는 이처럼 안성맞춤의 놀이터가 따로 있을 턱이 없을 정도입니다. 타는 햇살에 수줍음으로 다소곳했던 단풍나무도 이제 서야 조금씩 솔직한 부끄러움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시간의 문턱에서 고개를 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 발길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계곡이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습니다.     © 정미경

 어쨌든, 계곡은 계절을 앞질러 스스럼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내렸던 비조차 표면수로 남김없이 흘려보내놓고 이제는 토양 속에 머금고 있던 간극수까지 서서히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수맥을 따라 흐르던 중력수는 샘을 통해 또다시 계곡으로 합류합니다.
 
 흩어져 있던 것을 하나로 모으는 계곡의 마술입니다. 흩뿌려져 저마다 숨어 지내던 동무들을 하나로 모으는 계곡이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도 모르라고 고독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어요. 흘러내렸던 토사, 나뒹굴러 떨어진 바위까지 모아들이면서 말이에요.
 
▲ 계곡은 계절을 앞질러 스스럼없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정미경

 그렇게 흐르는 계곡수는 이중삼중의 나선운동으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품에 안고서 강을 건너 바다로 흘러갑니다. 왕성했던 숲의 날숨으로 포화 상태가 된 산소를 듬뿍 머금으며 시린 생명의 젖선으로 말입니다. 자기 안에 무기물을 듬뿍 훑은 중력수와 간극수는 침묵으로 이 대열에 녹아듭니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자리잡고, 숨어있는 계곡은 그래서 생명의 시원이라 부를 수밖에. 숲의 기운을 담아내는 공간의 예술은 그런 점에서 성적 흥분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바위를 에돌아 쏟아지는 폭포 아래서 치던 소용돌이, 틈사이로 비껴들다가 합치는 맴돌이가 만들어내는 나선운동은 온갖 번거로움을 씻어내고, 이렇게 침묵 속으로 자적해 들어갑니다. 마치 절정을 지나 평온함 속에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는 사랑의 변주곡처럼 말이지요.
 
▲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자리 잡고 숨어있는 계곡은 그래서 생명의 시원이라 부를 수밖에.     © 정미경

 그러므로 이번에는 어떤 부끄러움으로 계곡을 물들일까. 못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혹의 자태는 언제나 계곡을 닮았습니다. 내리 모아 하나로 용해하고, 잠시 안았다 끝내는 예외 없이 품안에서 떠나보내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하고 많은 생명들이 스쳐지나갔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영원한 처녀!

 
 계곡이 언제나 계절을 앞질러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계곡은 예외 없이 위험한 벼랑으로 둘러쳐져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목을 축이는 한 모금의 물은 벼랑을 탈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법. 쭈볏한 긴장은 깊은 심호흡과 함께 우리를 한층 성숙으로 이끄는 새로운 소절입니다. 
 
 

▲ 왕성했던 숲의 날숨으로 포화 상태가 된 산소를 듬뿍 머금으며 시린 생명의 젖선으로 흘러갑니다.     ©정미경
 
 가을입니다! 지난 계절의 기억을 망각 속에 떠나보내고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악상을 그려내야 할 과제가, 우리를 고아처럼 내던지는 그 계절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습니다. 계곡은 깊어지고 하늘은 높아만가는 이 계절에 당신과 나는 고아와 진배없는 외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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