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길, 구비구비 흥분된 고갯길

녹색반가사유⑮ 생은 언제나 고단하지만 놀라움과 흥분의 연속

정미경 | 기사입력 2007/10/10 [11:20]

친정길, 구비구비 흥분된 고갯길

녹색반가사유⑮ 생은 언제나 고단하지만 놀라움과 흥분의 연속

정미경 | 입력 : 2007/10/10 [11:20]
 어쩌면 고단한 시집살이 중에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다니러가는 친정길인지도 모릅니다. 시어른을 여읜지도 벌써 이태. 여식까지 출가 시킨 지가 오년. 홀몸으로 20여년을 살아오면서 한번도 돌아보지 못한 지난날에 대한 향수가 갈수록 사무쳐 결국은 몹쓸 병으로 도져버렸지요.
 
그래서 큰마음 먹고 사위에게 이야기를 하고 찾아가는 친정 길입니다. 물론 친정 부모님께서도 저 세상으로 이미 떠나셨습니다.
 
▲ 부풀대로 부푼 가슴을 안고 넘는 긴 고갯길.     © 정미경


하지만 언니와 남동생, 그리고 거동을 못하실 이모님을 찾아 볼 것을 생각하면 심장은 벌써부터 뛰기 시작합니다. 그네를 뛰면서 같이 놀던 동무들 소식을 얻어 들을 수만 있다면…. 바람결에 들은 그 소문대로만 있어준다면…. 부풀대로 부푼 가슴은 언제 그 긴 고갯길을 넘어섰는지조차 어림짐작을 할 수가 없어요.
 
뉘엿뉘엿 해질 무렵 저만큼의 거리에는 한 무리의 봇짐 장사꾼들이 주막에 걸터앉아 대폿잔을 부딪히며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마도 사랑방에는 과것길에 함께 오른 선비들이 느긋하게 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몰라요.
 
▲ 고갯길을 넘으며 숨쉬었던 하루는 망각과 정화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정미경

 떠나온 고향,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곳이 바로 고향이듯이 이 주막과 여관도 반드시 다시 들러야만할 곳이기에 애틋한 마음으로 눈가에 담아 넣습니다.
 
새벽부터 삼엄한 긴장 속에서 걸었던 탓에 몰랐지만 발은 퉁퉁 불어 버렸고, 골짜기에서 허기와 갈증을 달래느라 온몸은 구들장 속으로 녹아 들어갈 것만 같습니다.
 
▲ 고빗길의 하루는 지나온 삶보다도 길었으며 살아갈 나날들보다도 길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낀 시간입니다.     © 정미경

 글쎄, 떠나온 지가 만 하루도 못되었는데 집에 대한 그리움이 아련하게 새록새록 피어오르는 것은 무슨 연고일까. 몸서리쳐지는 밤의 공포와 외로움 탓이라서 그럴까. 기대감과 설렘은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예요.
 
기암절벽을 올려다보며 내질렀던 탄성, 까마득한 협곡을 유유히 흐르는 강을, 구름을 밟으며 가슴이 철렁하게 내려다보았던 이승과 저승의 쌍곡선을 몇 번이나 넘어서면서, 지나온 날들과 다가올 내일을 아예 잊고 숨쉬었던 하루는 망각과 정화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 몇 개의 봉우리와 셀 수도 없었던 골짜기를 건너고 비껴서 걸으며...     © 정미경
 
생은 지루하고 고단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놀라움과 흥분의 연속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 고빗길의 하루는 지나온 삶보다도 길었으며 살아갈 나날들보다도 길다는 것을 뼛속 깊이 느낀 시간입니다.
 
몇 개의 봉우리와 셀 수도 없었던 골짜기를 건너고 비껴서 걸으며 참으로 생은 알아갈수록 왜소해진다는 것이 왜 이리도 가슴 아프게 나를 찌르는지…. 먼저 간 이와 늦은 걸음이 함께 밤을 보내는 주막의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갑니다.
 

▲ 영마루에서 바라본 새로운 세계. 낯설기도 하고 기억이 남직도 한 그 세계를 바라봅니다.     © 정미경

 영마루에서 바라본 새로운 세계. 낯설기도 하고 기억이 남직도 한 그 세계를 바라볼 때 물밀듯이 닥치는 향수는 결코 과거만의 일은 아닌 듯 합니다.
 
아! 내가 걸었던 이 길은 어떤 길인가. 결코 혼자서는 걸을 수 없는 이 길을 오늘 밤에도 짐승들은 낯익은 습관처럼 어슬렁거릴 이 길은, 결국에는 짐승이 만든 길이지요. 바람이 지나가던 길 말이에요.
 
그 길을 혼자서는 결코 걷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더더욱 왜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흉흉한 소문이 전해지고 새로운 철학이 그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길 이었다지요?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곳이 없고,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려도 왕래하지 않는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 짐승이 만든 그 길을 혼자서는 결코 걷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더더욱 왜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 정미경

 
죽음을 귀하게 여겨 멀리 이사하지도 않는다는 친정과 시댁은 그래서 내겐 전부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산다는 것. 습관처럼 살아가는 일상에 한생을 통틀어 겨우 몇 번 찾아오는 고빗길이 그래서 내게는 그 모든 일상보다도 더 무게 있게 다가오는 것이지요.
 
구비가 있는 생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망각과 정화는 영마루에 올라선 자 만이 느낄 수 있는 생의 진미! 그 고갯길이 비로소 눌러져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결국은 그것이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니 말이에요.
 
 
▲ 구비가 있는 생은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망각과 정화는 영마루에 올라선 자 만이 느낄 수 있는 생의 진미!     ©정미경

그래서 말입니다. 제 아무리 앞날을 개척해 간다는 과학도, 내노라하는 이론도 자연의 순리를 떠날 수 없음을…. 모두가 잠든 그 시간에 짐승들은 홀로 그 길을 닦습니다. 우리는 그 길을 다만 뒤쫓아 갈 뿐입니다.
 
고갯길은 터널과 고속도로, 아니 일직선의 항공로보다도 최첨단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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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사랑 2007/10/15 [10:51] 수정 | 삭제
  • 친정길만이 아니고 우리 인생은 언제나 구비구비 놀랍고 흥분된 고갯길을 넘어가지요.
    한데, 자미님 친정집이 정말 구비구비 고갯길을 넘어 있나요?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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