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숨쉬는 공기’, 영상속 동서 만남

[시네프리뷰] 희로애락을 옴니버스영화로 엮은 수작, 9일 개봉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8/04/03 [00:35]

‘내가 숨쉬는 공기’, 영상속 동서 만남

[시네프리뷰] 희로애락을 옴니버스영화로 엮은 수작, 9일 개봉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8/04/03 [00:35]
▲ 9일 개봉하는 이지호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 '내가 숨 쉬는 공기' 포스터.     © 무비앤아이 제공
동양의 정서가 짙게 밴 할리우드 영화 한편을 봤다. 오랜만에 시사회에 갔다가 건진 ‘대어’였다. 이지호 감독의 할리우드 데뷔작이란다. 9일 개봉하는 ‘내가 숨 쉬는 공기’. 서울 사람들에겐 ‘지하철 2호선’ 같은 가치로 다가온다. 도심을 도는 순환선, 그 인연의 끈으로 연결된 도시인의 삶을 느끼게 한다.

이지호 감독이 일을 냈다는 말이 맞을 성 싶다. ‘따로국밥’ 같은 여느 옴니버스영화와는 좀 달랐다. 그 걸 알게 된 것도 영화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맨 마지막에 교통사고를 낸 여 주인공의 차 위로 쿵하고 떨어지는 돈 다발 소리를 듣고서야 무릎을 탁 쳤으니까.

네 개의 옴니버스 소재는 행복, 기쁨, 슬픔, 사랑이다. 이 감독이 서울에 살면서 주변에서 보고 들은 내개의 스토리다. 어찌 연결할까를 고민하다 어머니로부터 들은 ‘희로애락’을 키워드 삼아 시나리오로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시놉시스 첫 문장을 이렇게 쓰고 있다. “우연한 만남은 없다.”
 
이지호 감독 할리우드 데뷔작
 
사랑에는 기쁨도 있지만 슬픔도 있다. 불행과 슬픔을 넘으면 기쁨이 찾아온다. 일탈에서 찾은 행복, 절망에서 추려낸 기쁨, 슬픔 끝에 오는 즐거움, 인습을 뛰어넘는 사랑은 그래서 언제나 돌고 도는 ‘윤회’였던 것이다. 하나이면서 넷이고 넷이면서 하나인 게 딱 ‘지하철 2호선’인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눈이 아플 만큼 빠른 카메라워크다. 좌석이 너무 앞쪽이어서 그랬는지 눈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그러다 초점을 맞춘 곳은 ‘행복’의 주인공. 지루한 일상의 탈출을 꿈꾸는 소심한 펀드매니저(포레스트 휘태커)의 일상 속으로 녹아든다.

▲ '행복' 역의 포레스트 휘태커.     © 무비앤아이 제공

 
우연히 승마조작 경기 이야기를 엿들은 그는 확률 100%의 도박게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예측은 빗나간다. 언제나 시나리오는 어긋나게 돼 있으니까. 큰돈을 잃고 빚에 시달리던 그는 은행털이로 나선다. ‘식은 죽 먹기’는 또 빗나가고 잠깐의 추격전 끝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옥상까지 쫓겨 온 뒤 마지막 장면. 권총과 가방을 내려놓고 손을 들라는 경고 뒤 몇 발의 총성. 그리고 잠깐 뭉게구름 떠다니는 파란 하늘. 궁금증은 순식간이다. 왜 돈가방을 애써 건물 아래로 던지며 총을 맞고 죽는지 의아할 겨를도 없다. 하지만 한가지, 휘태커가 죽기 전 파란하늘을 보며 기쁘게 웃는 모습은 ‘행복’이 분명하다.

브렌든 프레이져의 조폭연기가 돋보인 ‘기쁨’.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그는 한 조폭조직의 전문 해결사. 이 능력 때문에 그는 절망한다. 미래를 알면서 바꿀 수 없는 처지니까. 하지만 독자들에게 신선함과 감동을 줘야하는 게 영화 아닌가. 시나리오는 그 절망을 깬다. 미래 예측이 빗나가고 말았으니까.
 
“우연한 만남이란 없다”
 
그는 미래예측 실패로 조폭간의 싸움에서 죽을 만큼 두들겨 맞고 응급실에 실려 간다.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도 그는 파안대소를 터뜨린다. 매번 절망을 안겨주던 ‘고정된 미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절망의 미래’ 대신 ‘노력하는 현재’에 설 수 있으니까. 그 뒤엔 유치하지만 순수한 사랑이 찾아든다.

▲ 슬픔 역으로 나오는 유명 팝가수 분의 사라 미셀 겔러.     © 무비앤아이 제공

 
‘슬픔’의 팝가수(사라 미셀 겔러 분)가 관리대상으로 들어왔다. 조폭 브렌든에게 유일하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여자. 촉망받는 가수지만 매니저의 도박 빚으로 그만 조폭조직에게 넘어가고 만 그녀. 운명적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고, 보스 몰래 그녀를 빼돌리려다 들켜버려, 행복한 최후를 맞는다.

조폭의 사랑을 이어받은 또 다른 ‘사랑’ 주인공은 한 의사 커플. 사랑을 고백 못해 머뭇거리다가 친구에게 여인을 빼앗긴 의사.(케빈 베이컨 분) 옛 애인은 독사의 독을 채취하다 독사에 물린다. ‘희귀 혈액형’ 때문에 별의별 위험을 무릎 쓰고 그녀의 목숨을 구한다. 조폭과 관련돼 생사를 여러 차례 넘나든다. 그녀의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외 받을 게 없는데도 말이다.

옴니버스영화를 본 게 몇 안 된다. 2~3년 전으로 기억하는 데, 짐 자무쉬 감독의 ‘커피와 담배’를 떠올렸다. 몸에 해롭다는 기호품을 못 끊는 의지박약을 욕하면서도 “난 끊었으니까 한 대 정도는 괜찮아”라며 다시 담배를 무는 주인공의 대사가 지금도 기억에 선하다. 건강 강박관념을 묘사한 멋진 영화로 기억된다.
 
일탈 뒤 행복, 절망 속 기쁨
 
또 하나는 박찬욱·임순례·여균동 감독 등이 합작한 ‘여섯 개의 시선’. 국가인권위가 후원해 만든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장애인, 이주노동자, 여성외모지상주의 등 소수자 인권을 다룬 작품이다. 이 옴니버스영화의 재밌는 캐치프레이즈는 이렇다. “내 멋대로 찍었다, 네 멋대로 봐라.”
 
▲ 기쁨 역의 조폭 연기를 멋지게 보여준 브렌든 프레이져.(왼쪽)     © 무비앤아이 제공


‘내가 숨쉬는 공기’에 주목하는 건 네 개의 소재를 하나로 연결하는 옴니버스영화라는 점이다. 펀드매니저가 도박을 하다 돈을 빌린 고리대금업자는 바로 브렌든이 일하는 조직. 조폭조직에 팔려온 가수 또한 매니저의 도박 빚 때문. 희귀 혈액형을 가진 ‘슬픔’의 팝가수는 여의사를 살리고 전 애인(케빈)의 차를 타고 조폭조직을 탈출해 도망가다 ‘행복’ 펀드매니저의 ‘돈 폭탄’을 맞는다.

영화를 다 본 뒤에야 든 생각이지만 감독을 칭찬하고 싶다. ‘우연한 만남이란 없다’는 감독의 철학이 그렇고, 동양의 정서를 옴니버스 형식에 안착시킨 것 또한 돋보이니까. 뉴욕타임즈가 “마치 큐브조각을 맞추는 것처럼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천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했다니 내 예측이 빗나가지는 않을 성 싶다. “이 영화를 한국 관객에게 바친다”는 자막엔 뿌듯함도 느꼈다.

또 하나 칭찬할 게 있는 데 좀 슬픈 이야기다. 수입 배급사는 “기적 같은 캐스팅”, “2년 동안 본 시나리오 중 가장 훌륭”이라는 할리우드의 평가를 전한다. ‘라스트 킹’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포레스트 휘태커, ‘오션스’의 앤디 가르시아, ‘미이라’ 시리즈의 ‘브렌든 프레이져’,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의 사라 미셀 겔러, ‘할로우 맨’의 케빈 베이컨의 출연으로 이 영화는 더욱 빛을 발한다. 배우 덕 봤다는 게 싫을 리야 없을 테지만 ‘역시 할리우드’라고 하면 좀 서글프지 않을까?
 
4개의 시선, 1개의 플롯
 
한 번 보시라. 동양의 정서가 밴 할리우드 영화를 직접 봐야 그 맛을 알지 않겠나. 돈 다발 떨어지는 소리에 이어지는 엔딩크레딧에 벌떡 일어서지 마시길. 한 가지 꼭 할 게 있으니까. 가슴을 뒤로 젖히고 여러분이 숨 쉬는 공기를 맘껏 느껴보시라. 길어도 10초면 된다.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 도배방지 이미지

시네프리뷰, 내가 숨쉬는 공기, 이지호 감독, 포레스트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