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 읊은 왕소군의 딱 그 마음

[포토에세이] 박정희 요정서 늦깎이 봄맞이, 나름대로 화사하게

최방식 기자 | 기사입력 2008/04/13 [03:43]

춘래불사춘 읊은 왕소군의 딱 그 마음

[포토에세이] 박정희 요정서 늦깎이 봄맞이, 나름대로 화사하게

최방식 기자 | 입력 : 2008/04/13 [03:43]
점심 나들이에 늦깎이로 봄을 맞았습니다. 울긋불긋 곱고 예쁜 자태였습니다. 것도 모르고 난 왜 그리도 무심했는지 서럽고 한심하더이다. 지난겨울이 그리 춥고 길었던 모양입니다. 2천 년 전 춘래불사춘을 읊조린 미녀 왕소군의 딱 그 마음이었을까요?

컴퓨터 모니터 앞에 쪼그리고 앉았는데 점심 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이따금 찾아와 호프 한잔씩 나누는 분이죠. 전 신문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이기도 하고요. 20여 년 전 국가보안법을 피해 파리에 살며 10여년 교포신문을 냈던 언론인이죠.

▲ 삼청각이 고즈넉합니다. 춘곤증에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하던 상춘객은 풍경소리에 그만 화들짝 놀랍니다. 봄은 그렇게 뒤 늦게 찾아왔습니다.     © 최방식
▲ 고개를 드니 저기 숙정문이 보입니다. 서울성의 북대문인데 험한 산속에 있어 그런지 낯설기만 합니다. 저 문 넘어에도 화사한 봄이 찾아 왔을까요?     © 최방식
▲ 삼청동 골짜기에 봄이 흐드러지게 피었습니다. 골짜기 그 어딘가에 콘크리트 궁궐을 지은 그 독재자는 오래전 갔지만 그가 데려다 세워놓은 꽃들은 다시 피었습니다. 화무십일홍인가? 세불십년장인가?     © 최방식
 
제가 있던 신문의 파리통신원을 했는데, 국내에서 동포참정권 찾기 캠페인을 하며 관련신문을 내겠다고 자기 일을 제쳐두고 영구 귀국을 했죠. 그런데 세상은 참 몰인정 합니다. 싹을 틔우고 키워온 그 신문이 그를 내쫓았으니까요. 저와 동병상련 같은 게 좀 있지요.

“세상은 참 몰인정 합니다”

삼청동 수제비집은 오늘도 만원입니다. 아실 테지만 이 집 맛 하나는 으뜸입니다. 20~30분쯤 줄을 서야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 오늘은 운이 좀 좋았나봅니다. 담배 한 대 참 만에 자리가 났으니까요. 야들야들 부드러운 수제비 반죽솜씨 때문인 성 싶습니다.

서둘러 배를 채우고 길거리로 나서는데 날씨가 참 기가 막히게 요사스럽습니다. 사무실 곁 음식점에 쪼르르 달려가 후닥닥 먹어치우고 달려오기 일쑤였는데 좀 멀리 나오니 이리 다릅니다. 삼청각 구경 좀 하잡니다. 봄꽃이 활짝 피었을 거라면서요.
 

▲ 일화당 뜰엔 양쪽에 하얀 목련이 한그루씩 서있습니다. 권력은 저렇게 안마당에 나무도 꽃도 들여놓기도 하고 내놓기도 합니다. 우윳빛 속살을 드러낸 목련꽃은 자리가 마땅찮아서 그런지 파리해 보입니다.     © 최방식
▲ 북녘으로 고개를 쳐든 목련화. 북녘사람을 맞으려고 지은 요정에 늘 그렇게 피어납니다. 티없이 맑은 목련꽃은 며칠 안 가 꽃술을 떨구며 초여름을 알릴 겁니다. 황석영의 손님인가요? 저 그늘 아래서 다시 한번 읽고 싶어집니다.   © 최방식
▲ 진달래 곱게 핀 따스한 언덕은 엄마의 품이었습니다. 물오른 소나무 진한 향기에 취해 오솔길 어딘가를 헤매다 빠알간 진달래 꽃술 하나 입에 물고 전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 최방식

삼청터널을 지나 골짜기로 막 들어서니 벚꽃, 진달래가 벌써 활짝 피었습니다. 카메라를 꺼내 드는 데 또 여지없는 머피의 법칙입니다. 건전지가 죽었습니다. 휴대폰이라도 꺼낼까 생각 중인데 그분이 자기 카메라를 꺼내줍니다.

72년 남북회담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지었다는 삼청각. 국빈급 손님을 접대하고 박통자신도 즐겨 왔다는 그 요정. 청와대 지시로 중정이 지휘하고 현대건설과 군 공병대가 투입돼 몇 달 만에 지었다는 요정이 문화재 흉내를 내고 있으니 세월이 야속해집니다.

문화재 흉내를 내고 있으니...

건평 1천여평에 4층으로 지어진 일화당은 늘 거대한 궁궐입니다. 뜰이 좁아 고개를 드니 멀리 서울성 북문인 숙정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능선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진 성곽은 꼭 어릴 적 마을 동구밖 길입니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벚꽃과 진달래는 이웃 순이 얼굴이고요.
 
▲ 숲속 조그만 개울은 겨울잠에서 아직 덜 깬 나를 부릅니다. 초록을 그리워하는 저 개울물은 한모금 입안을 돌아 내 온몸 실핏줄에 푸른 근력을 불어넣어주겠지요. 차갑습니다.     © 최방식
▲ 동막골 어딘가에 분명 와 있습니다. 왕방울 눈을 치켜뜬 장승도 진달래 고운 모습에 반했습니다. 부끄러워 슬쩍 고개를 숙였습니다. 사랑이 오려나 봅니다.     © 최방식
▲ 누군가 분명 씨앗을 뿌렸겠지요.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생존본능은 공중부양을 하니까요. 그리고 수천킬로미터를 날아 살아숨쉬니까요. 기름진 토양이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살지요.     © 최방식

일화당 앞마당 양편에 한 그루씩 서 우윳빛 보드라운 속살을 드러낸 목련은 풍상의 깊이를 간직한 채 말이 없습니다. 돌아 섬돌을 내려와 별채 한옥에 다가서니 제법 옛정취가 묻어납니다. 목재 건물로는 가장 멋져 보이는 천추당입니다. 배용준이 영화 촬영을 했다죠.

골짜기마다 연인들의 속삭임이 감미롭습니다. 사내들의 출연이 부담스런지 피하는 눈길도 있습니다. 풍채가 늠름한 팔각정(유하정)을 지나니 계곡이 기지개를 폅니다. 꽃·개울 구경을 하는 데 새들의 합창이 구성집니다. 연분홍 진달래에 빠져 늦깎이 봄맞이를 했고요.

육중한 담을 따라 여기 저기 피어난 개나리는 언제나 그렇듯 몽롱합니다. 노오란 꽃 잎 떨어지는 날 그 아래 누워 맘껏 취해보고 싶습니다. 막걸리라도 한 잔 있으면 더 좋을 테고요. 꽃잎 하나 띄워놓고 옛 요정 여인들이 애창했다는 권주가라도 부르면서요.
 
▲ 긴 겨울잠을 깬 생명은 두꺼운 갑옷을 뚫고 삶을 펼쳐 들었습니다. 비상의 자유의지는 제 살이 갈라지는 아픔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피어난 초록의지는 머잖아 큰 열매를 맺을 겁니다.     © 최방식
▲ 삼청각 육중한 담 여기 저기엔 노랑, 빨강, 하얀 아름다움이 맺혔습니다. 독재의 서슬퍼런 광기에 숨죽이며 거기 서 있었지만 제 멋과 향은 그대로 간직한 채 입니다.     © 최방식
▲청와대가 발주하고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이 시공했으며, 중앙정보부가 관리했던 요정 삼청각. 권력의 덧없음을 말해 주는 건지 지난 몇년간 폐가로 버려졌던 콘크리트궁궐이 이제는 제법 문화재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최방식


그 여인들의 권주가를 부르며

꽃은 시입니다. 송대 한 시인은 화무십일홍이라 했죠. 후세인들은 인불백일호, 세불십년장이라 덧붙였고요. 권력놀음이 빚어낸 유사 문화재에서 만난 봄은 그럴싸했습니다. 정치권에 때 아닌 박정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때 말입니다. 며칠 안가 지고 말 것을 알 텐데도요.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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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카고 2008/04/18 [09:19] 수정 | 삭제
  • 절 빼면 아니되옵니당~
  • 콩미 2008/04/16 [20:49] 수정 | 삭제
  • 저도 함 끼워주세요.
  • 평화사랑 2008/04/14 [14:31] 수정 | 삭제
  • 맛을 직접 봐야죠. 근데, 무슨 비법 같은 게 있을까요?
  • 자미 2008/04/13 [22:57] 수정 | 삭제
  • 봄, 잘 보고 갑니다.
    삼청동 수제비가 먹고 싶은 봄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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