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성가퀴 양지녘에 오랑캐꽃?[포토에세이-下] 고즈넉한 산성 혁명군 향연에 취한 봄날오후<지난 글 이어> 오리나무 군락지를 지나 구릉 너무 살짝 연주옹성이 넘겨다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일행 중 한명이 정성껏 싸온 원두향을 즐길 시간입니다. 커피 브레이크죠. 녹색전사는 과일과 계란을 꺼내고요. 숲속 진수성찬입니다.
이 맘 때쯤입니다. 벚꽃이 활짝 핀 아련한 봄날이죠. 찐 계란 몇 개와 도시락 하나 들고 동무들과 손잡고 소풍을 갔던 때가요. 왜 그리 시간은 더디 가던 지요. 일 년에 딱 두 번 누리는 호사에 맛난 걸 어서 먹고 싶은데... 초봄에 먹으려고 소금을 잔득 넣어 절인 ‘짠 김치’에 물렸거든요. 너무 짜 씻고 양념을 넣어 다시 무친 건데 그래도 짭니다. 춘궁기를 넘기는 지혜였지요. 한 줌만 있어도 반찬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 계란이라도 싸오면 정말 부러웠지요. 봄바람에 죽은 노인인가? 능선길입니다. 숲 속 혁명군들의 회합을 시샘이라도 하는지 날씨가 조금은 매섭습니다. 폐인들이 벌써 ‘봄바람에 죽은 노인’도 아닐 텐데, 동풍은 제법 쌀쌀맞게 불어옵니다. 왜, 봄바람을 첩의 죽은 귀신아라고 한다잖아요? 여우의 눈물을 흘리게도 하고요.
탁 트인 길 어디에선가 숲 해설사가 한마디 던집니다. “왜 망원렌즈 안 꺼내세요? 저게 연주옹성이에요. 수십 번을 올랐다더니 연주봉을 모르세요? 남한산성에 와서 뭘 본거예요?” 녹색전사가 가학성인가? 아닌 이가 또 어디 있겠어? 겨우내 청량산을 올라 다녔는데, 폐인들은 ‘3번 등산로’만 다닌 겁니다. 2번, 4번 길도 안 간 건 아닌데, 연주봉 옹성에는 와보지를 않았으니 헛것을 보고 다녔나요? 잿밥에만 관심 있었거나? 서문 안쪽 동동주 마시는 데까지만 왔다 돌아가곤 했거든요. 옹성의 성가퀴(女墻) 위로 멀리 내려다보이는 서울이 회색으로 고즈넉합니다. 발 뿌리에는 제비꽃이 곱게 피었습니다. 노랑, 하양, 빨강 가지각색이 있다 든데 오늘 만난 녀석은 보라색입니다. 신비스럽게 무장한 것이죠. 병자호란의 격전지에 오랑캐꽃이라? 옹성 쪽 암문(쪽문)을 통과해 산성 안으로 들어가니, 혁명수비대가 버거워 할 정돕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로 꽉 찼군요. 산성 안 분지 중앙엔 도심격인 종로거리가 있습니다. 길가 들꽃의 향연은 계속됩니다. 별꽃, 꽃다지...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아는 만큼만 보인다더니... 배가 그리 고픈 건 아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리 없습니다. 산성에 오면 늘 가던 곳이죠. 오후 2시가 다 돼 가는데 손두붓집엔 자리가 남아있질 않습니다. 멋쩍긴 하지만 식당 한 가운데 줄을 서야 합니다. 딴 집으로 가든지. 맛 좋은 손두부를 먹든지. 술자리에선 가끔 식탁 위 안주보다 더 맛난 게 있지요? 조롱거리입니다. 씹는 맛이 보통이 아니거든요. 이날 최고 안주는 일행 중 한명의 식습관입니다. 밥에 생된장과 올리브유를 비벼 먹는다나요. 이역만리서 혼자 살며 얻은 식습관이라네요. 그 맛이 괜찮을까요? 산성이 곧 비틀거릴지도 모를 거란 생각에 자리를 차고 일어섰습니다. 녹색전사가 보여줄 게 있다기에요. ‘노루귀’ 군락지가 있답니다. 한창 혁명기운을 고조시키고 있을 것이라면서요. 정확한 위치는 언급하지 말랍니다. 구경꾼들 몰려와 사고 칠까 봐 그런 거죠. 30여분 걸었을까요. 두 명의 카메라맨이 납작 엎드려 접사 중입니다. 장비가 보통 아닙니다. 녹색전사 또 한 말씀 합니다. “노루귀가 왜 저리 키가 작은 줄 아세요. 고개도 꼿꼿이 들지 않고 조금 숙인 건 또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폐인은 짐짓 망원렌즈를 꺼냅니다. 납작 엎드리지 않아도 찍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요. 하지만 꽃잎도 ‘허니가이드’도 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결국 엎드렸습니다. 숲 해설사 한마디 이어집니다. “바로 그 자세가 답이죠. 노루귀가 ‘날 보려거든 낮아지라’고 하는 거죠.” “날 보려거든 몸을 낮춰요” “여기도 있어요. 저기도. 또 여기도.” 일행 중 한 명이 신났습니다. 여기저기 노루귀를 가리킵니다. 나무뿌리, 바위, 돌 틈 황량한 곳에 무기를 꺼내 들고 도열해 있습니다. 하얀색부터 청보라, 진보라까지 가지각색입니다. 잔털에 싸인 고혹한 꽃잎은 숨을 멎게 합니다. 눈에 띄는 게 노루귀뿐이 아닙니다. 초록의 귀를 빠끔히 내민 ‘앉은 부채’(일명 앉은 부처)가 가부좌를 하고 있습니다. 땅속 아지트에서 창끝은 조금 내밀고 대기 중 명령이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땅 위로 튀어오를 듯한 기셉니다. 풀잎을 제치니 여지없는 동자승입니다. 해가 떨어져 하늘을 닫은 채요. 조금 더 숲 속으로 들어갔을 겁니다. 멋들어지게 핀 노루귀 세 송이와 주변 이끼가 오묘한 조홥니다. 렌즈를 고쳐 잡는데 어느 틈에 다가왔는지 낯선 카메라맨이 한마디 합니다. “저런 나쁜 놈들, 저건 범죄야.” 작품사진 찍겠다고 누군가 이끼를 얹혀놓은 거라네요.
폐인들은 성남으로 내려가기로 돼 있었습니다. 봉국사 효림 스님이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스님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출타를 해야 한다면서요. ‘노루귀’와의 접선은 그 때문이죠. 하지만 좀 늦게 온 모양입니다. 키 작은 미녀 혁명군들은 하나 둘 문을 닫고 저녁준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혁명군의 향연에 취한 겁니다. 동동주에 미혹됐나요? 요한 시트라우스의 행진곡이 제법 힘찼을 겁니다. 소총을 잃은 혁명군을 따라 숲을 얼마나 헤맸는지 모릅니다. 깨어보니 취재수첩을 꼭 껴안고 있었을 뿐입니다. 녹색 전사의 말을 기록하려고 그랬을까요? <저작권자 ⓒ 인터넷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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